사명대사 유정의 신통
신통 유정이 수신사의 명목으로 일본에 건너가니, 왜인들은 그의 도술을 실험하여 기를 꺾고자 하였다. 왜인들은 여러 가지 시험을 하였는데, 그가 학문이 깊고 도가 높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으므로 처음에 그가 가는 길목에다 비단 병풍을 개설하고 왜인들이 지은 선시를 쓸 금은의 병풍을 길 좌우에다 늘어 세웠다.
유정은 그 병풍에 쓴 글들을 걸어가면서 한번 훑어보고는 모두 기억하여 두었다.
그길로 관사에 들어가니 병풍에 쓰인 글에 대해서 왜인이 물었으므로 그는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아까 본 글을 다 외워 왜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왜인들은 다시 철마를 불에 달구어서 거기에 유정을 타게 하고 또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게 하였으나, 갑작스레 비가 내려 불더미를 감쪽같이 식혀버렸다.
혹은 무쇠 풀무의 화방 속에 앉혔는데 타죽기는 고사하고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으며, 그 불구덩이 속이 온통 얼음으로 되어 유정은 도리어 큰소리로,
「너희 섬나라에 나무가 많다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찬 방에서 사람을 욕보이는가?」
하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간특한 왜인들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시험으로 유정을 괴롭혔지만 유정은 모든 것을 도술로써 잘 막아내어 털끝만치도 다친 데가 없었다.
이에 왕을 비롯한 왜인들은 크게 놀라 선인 또는 생불이라고 우러러 받들었다.
그로부터 그들은 금으로 만든 가장 상품의 교자에 태워서 모시고 다녔는데 화장실에 갈 때에도 그렇게 금교자에 모시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왜왕에게 두 나라가 길이 친화할 것을 다짐받고, 포로로 잡혀갔던 우리 동포를 모두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에서 떠나을 때 우리 동포 남녀 3,000여명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고역 속설(한글 본 임진록(壬辰錄), 사한당(四漢堂)) 등에 의하면 소녀껍질 300매와 15, 6세 소년의 고환 서말(3斗)을 해마다 우리나라에 바치라고 명령하여 왜왕의 서약을 받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유정은 포악무도한 왜국에 가서 그네를 꼼작 못하게 억눌러 놓고 포로로 잡혀갔던 동포 3,000여명과 그 밖의 많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가 동래에 이르렀을 때 수신사(惟政)가 승려라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부사 송상윤이 병을 핑계 삼아 마중하러 나오지 않았다.
유정이 도임할 때 에도 응당 부사로서 사신을 배웅하러 나왔어야 할 직책이었는데도 업신여기고 병이라는 핑계로 나오지 않았었다.
유정이 알아보니 부사는 병을 앓는 것이 아니었고 기생들을 거느리고 주연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은 또 국기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신 유정은 동래부사의 목을 베고 곧 왕께 상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