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태조 도참설에 의하여 호국사찰을 짓다

고려태조 도참설에 의하여 호국사찰을 짓다

신라 말기, 북쪽에는 궁예(弓裔)가 후 고구려국을 세우고, 서쪽에서는 견훤(强萱)이후 백제를 세우는 등 통일신라는 다시 셋으로 강토가 나누어지고, 또한 사방에서는 도적의 떼가 일어나고, 민심은 흉흉하여 모두 의지할 바를 모르고 있던 때에, 신라 제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6월에, 궁예 왕의 휘하에 있던 왕건(王建)이, 홍유(洪懦)·배현경(輩玄慶) 등의 혁명으로 궁예 왕이 쫓겨나고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혁명에 의하여 왕위에 추대된 왕건은 말할 것도 없이 고려의 태조이니, 왕건은 전주(前主)와 같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年號)를 천수(天授)라 고친 뒤(당시 왕건 42세), 전왕(前王)의 폐정을 일신하고 정치를 천하공법(天下公法)에 의하여 다스릴 것을 조서(詔書)로 국민 앞에 공약하였다.

이듬해에는 서울을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관제(官制)를 개혁함과 동시 여러 새로운 제도를 세우고, 또 숭불정책(崇佛政策)·융화정책(融和政策)을 건국이념으로 하여 나라의 기반을 닦아 나갔다.

그리고 특히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하여, 태조 즉위 2년에는 개경(開京)에 법왕사(法王寺)를 비롯하여 내제석원(內帝釋院)·사나사(舍那寺)·보제사(普濟寺)·신흥사(新興寺)·문수사(文殊寺)·원통사(圖通寺)·지장사(地藏寺)등 모두 10개 사찰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또 왕건 태조 즉위 5년에는 개경송악산에 일월사(日月寺)와 한양 삼각산에 청룡사(靑龍寺)를 창건하였다.

특히 청룡사는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유언에 의하여 왕건 태조가 직접 창건하였다.

즉 도선국사는 왕건 태조가 즉위하기 20년 전에 열반(徑槃)하였다.

그런데 열반하시기 전에 왕건 태조의 부친 왕융(王隆)에게 유서를 보내어

「20년 후에 당신의 아들 왕건이 왕위에 나아갈 터이니 즉위하면 즉위 다음 해에는 열 곳에 절을 짓고, 즉위 5년에는 개경에 일월사와 한양에 청룡사를 각각 지으라.」

고 하였다. 물론 그 유언대로 하면 왕씨(王氏)의 개경 도읍이 잘 성창(盛昌)할 것을 말하였음은 물론, 특히 청룡사에 대하여는

「한양은 이씨(李氏)의 5백년 도읍지요, 개경은 왕씨의 5백년 도읍지인바, 한양은 산세가 험준하고 거악(巨岳)하여 이씨 왕업의 운수가 날로 왕성하여지니, 이 한양의 이씨 지기(地氣)가 좀 늦게 돌아오게 하고 왕씨의 5백년 도읍이 잘 지나려면 한양의 외청룡(外靑龍) 산등에 절을 짓고, 조석으로 종(鍾)을 울리라.」

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양의 외청룡 산등이 음양지리설에 의하면 동방갑을삼팔목(東方甲乙三八木)이라 순양(純陽)의 나무(木)이니, 순양의 나무가 운이 왕성하면 이씨의 운이 속히 돌아오게 되므로. 여기에 절을 짓고 종을 울리면, 종소리의 금(金)이 이씨의 목<木>을 누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비구니로 하여금 이 절에 거주하게 하면 양(陽)의 극치를 막아 왕씨의 5백년 도읍이 제대로 성창할 수 있으며 이씨의 운이 늦어진다는 풍수지리설(風水池理說)과 음양도참설(陰陽圖懺設)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밖에 왕건 태조는 왕씨의 도읍을 위하여 최선의 정력을 기울인 나머지 한양의 이씨 지기를 누르기 위하여 한양땅(지금의 수유리 근방)에 오얏나무 수 천주를 심어 놓고 해마다 자라나는 순을 쳐서 더 자라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씨의 왕운을 막으려고 하였다.

즉 오얏나무는 이씨를 가리킨 것으로 이씨라는 이자(李字)가 「오얏리<李>」자인 까닭으로 오얏나무를 친다는 것은 바로 이씨를 친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수유리 근처에 벌리(伐李)라는 지명이 있는 것은 이렇게 오얏나무를 심어 두고 해마다 이를 자르던 곳이므로 이에 연유한 것이다.

여하튼 왕건 태조는 즉위 이래 후삼국통일의 웅지(雄志)를 품고, 건국이념을 뚜렷이 함과 동시,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하여 많은 절을 지었다.

마침내 즉위 19년에는 후삼국 통일의 숙원을 달성하고,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또 정치의 귀감(龜鑑)으로 『정계』(政誡) 『계백료서』(誠百療書)등을 저술하고, 그가 임종할 때는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條)를 유훈으로 남길 만큼 나라 사직의 유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참고로 여기 조문을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제불호위(諸佛護衛)의 힘을 입지 않으면 아니 되겠으므로, 선·교사원(禪·敎寺院)을 개창(顯創)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각각 그 업(業)을 닦게 하는데, 만일 간신들이 정권을 잡고, 승려와 신도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사(事社)를 경영하게 되면 서로 쟁탈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의당히 막아야 한다.」

는 것이다. 이것이 제 1조였다.

다시 말하면 국가는 불교에 의뢰하고, 사원은 국가와 왕실의 복리를 위하여 창건된 것인 만큼, 간신과 승려와 신도들의 이익과 욕심에 맡기어, 겸병(兼倂)·쟁탈(爭奪)을 일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2조에는

「새로 창건한 모든 사원은 모두 도선국사의 추점(推占)한 산수 순역(山水順逆)의 지리에 의하여 세운 것이라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도선이 말하되

「내가 점정(占定)한 이외의 땅에 함부로 사원을 창건하여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면 따라서 왕업이 길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후세의 국왕(國王)·공후(公候)·후비(后妃)·조신(朝臣)들이 각기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증가, 창건하면 이는 크게 우려할 일이다.

신라 말엽에 사탑(寺塔)을 남조(濫造)하여 지덕을 피손(衰損)하였으므로 마침내 나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니겠느냐.」

라고 하였다.

이와 이 불교를 국가 대업의 근본으로 삼는 곳에 태조의 국가 이념을 엿볼 수 있거니와, 동시에 만일을 위하여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또는 사회적으로 세속적인 사원의 세력을 견제하고 아울러 사원의 양적 확대를 경계하여, 왕씨 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기하였으니, 태조의 용의(用意)와 원려(遠慮)가 과연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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