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왕사 왕십리에서 도선의 예언을 보고 놀라다

무학왕사 왕십리에서 도선의 예언을 보고 놀라다

이씨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나아간지 3년이 되던 해에 태조 이성계는 무학왕사(無學王師)를 불러 평소 태조의 최대 관심사(最大關心事)의 하나인 서울 옮기는 것을 의논하였다.

즉 서울은 처음 개경에 두었으나, 개경은 고려의 구세력이 뿌리깊이 남아있는 근거지였던 만큼 새 왕조의 상징으로서 국가의 면목과 인심을 일신케 할 새 서울을 건설하여 경영할 필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래(傳來)의 음양설(陰陽說)로 보아도 옛 서울은 불길하다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무학사는 태조께 상주하여 여러 곳의 후보지를 물리치고, 고려의 남경(南京)인 한양으로 서울을 옮길 것을 경정하여, 먼저 왕십리에 와서 자리를 잡고 땅을 파게 되었다.

그런데 땅을 파던 중 문득 땅 속에서 글씨가 쓰여 있는 비석 한 개가 나오지 않는가.

그곳 비면(碑面)에 새겨있기를,

「요승무학 왕심우차 왕십리(妖僧無學 枉尋于此 往十里)라 하고, 끝 부분에 옥룡자서(玉龍子書)라고 되어 있었다.

옥룡자는 즉 도선국사의 별호로서, 고려왕조의 5백년 뒤에 이씨왕조가 등직하고, 이씨왕조의 새 서울을 정할 때에, 무학왕사가 이곳에 그릇 알고 잘못 찾아올 것을 미리 알아, 그 자리에 비석을 만들어 묻었던 것이었다.

무학왕사는 그 자리에 엎드려 합장하고 비석에 새겨있는 그대로 그 곳에서 10리를 더가서 자리를 잡으니, 북은 백악(白岳),동은 낙산(酪山), 남은 남산(南山), 서는 인왕산(仁旺山)이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성동구에 왕십리라는 지명이 있는 것은, 처음에는 잘못 찾았다고 하여「왕심(枉尋)」이라고 부르던 것을 뒤에 와서 십리를 더 가서 터를 잡았다고 하여「왕십리(往十里)」라고 불러 온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불교계의 거룩한 승려였던 도선국사가 도참비기의 최초의 대가로만 더욱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당시 시민들이 거룩한 승려와 신통을 부리는 도참가를 똑똑하게 구별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에서 불도를 닦고 있는 승려는 동시에 도참설도 잘 아는 술사로 보였다.

또 당시에는 위대하고 학식이 높은 인물은 누구나 풍수지리설의 비결을 체득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불교의 고승 도선국사는 자신이 도참설과 풍수지리설을 공부하였고, 또 그에 관하여 일가견을 이루게까지 되었기 때문에, 이 방면의 대가가 없던 당시 사회에는 국사를 불교의 면보다 도참비기의 대가로 더욱 알려지게 한 것이다.

<高麗史節要>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