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사 범해선사의 보조국사 지눌에 대한 설화

장고사 범해선사의 보조국사 지눌에 대한 설화

보조국사는 조계종의 개창조이시다. 우리 나라 불교에서는 많은 종파가 있지만 오늘날 가장 번창한 승단 조계종이고 그 개조이신 보조국사가 영산 팔공산에서 수도했다는 사실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은가?

스님은 고려 의종 12년(1158)에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에서 아버지를 정광우로 하고 어머니를 조씨로 하여 태어났다.

법명은 지눌(知訥)이고 법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추증된 시호는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다.

8살의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종휘선사(宗暉禪師)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25세 되던해(1182) 승과에 합격하여 소위 속세에서 말하는 승려로서의 기반을 닦았으나, 그의 마음은 오직 진리를 탐구하는데 있으므로 모든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흘러가는 물처럼 푸른 하늘에 떠도는 구름처럼 구도 행각을 하다가 맨 처음 당도한 곳이 남도땅 창평(昌平)의 청원사(淸源寺)이다.

그곳에서 그는 육조 혜능의 법보단경을 읽고, 다시 발길을 옮겨 명종 15년(1185년)에는 예천의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읽고, 3년 후 1198년에는 다시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들어가 참선에 몰두, 마침내 대각을 하고 1200년에는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 11년 동안 주석하니 전국에서 스님과 속인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길상사는 그야말로 울창한 학문의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희종)이 칙령을 내려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길상사를 수사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1210년 3월27일, 그날도 스님은 평시와 마찬가지로 설법을 하고 앉은 자세 그대로 열반에 드니 우려 온 나이 53세, 이레만에 다비를 했는데 그때가지도 얼굴빛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고 큰 것 33과와 그 외 작은 것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희종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시며 시호를 내리시고 감로(甘露)하는 탑호를 추증했다고 한다.

스님의 행장을 새긴 비석과 탑이 송광사와 화순 만연사에 있는데 그것은 김부식의 손자 김군수가 지었다고 한다.

송광사 매산에 능견난사(能見難思, 쇠로 만든 그릇)을 원나라에서 지눌에게 내렸다고 하고 흥국사와 만연사에 스님의 영정이 있다고 한다.

수선사는 다시 송광사로 바뀌고 스님의 학풍을 이어받아 무려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니 자랑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승보사찰이 된다.

스님이 입적하신지 올해가 꼭 790년. 서두에서 밝혔듯이 팔공산과 연을 맺은 몇 분의 스님 중에서 심지를 제외한 원효나 지눌 스님은 고려의 건국 이념인 호국불교가 건국 초기와는 달리 나날이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개탄한 나머지 불교 개혁의 혁명선언에 해당하는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하였는데, 뜻깊은 그 저술의 산실이 팔공산 동록의 은해사 거조암이라는 사실이다.

팔공산 영천시 청통면 신월리 622번지에는 일명 오백나한절이라는 작은 절 거조암이 있다. 이 절은 국보 제 14호로 지정된 영산전이 있어 문화적으로는 매우 가치 있는 절이긴 하나, 규모는 참으로 볼품없다.

그런데 이 절이 외양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지눌 스님이 권수저예결사문을 발표하였는데, 뜻 깊은 그 저술의 산실이 팔공산 동록의 은해사 거조암이라는 사실이다.

이 절이 외양의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지눌 스님이 권수정혜결사문을 저술한 바로 그 장소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러 사료들을 보면 스님은 나이 33세, 즉 1190년 이곳 거조암에서 문제의 책 권수정혜결사문을 쓰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절은 당시는 암(庵)보다 격이 높은 사(寺)로 오늘날보다 규모가 훨씬 컸으면 738년 신라 34대 효성왕 2년에 원참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다음 대인 경덕왕의 명으로 개창되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809년 제41대 헌덕왕 원년에 혜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은해사보다 오히려 창건 연대가 빨라 어쩌면 은해사가 오히려 속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동화사와 염불암에는 지눌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왜냐하면 스님은 권수정혜결사문을 쓰던 그해 동화사 사창에 관여하셨고, 또한 염불암에도 머무르셨기 때문이다.

염불암 뒤에는 서너 명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여느 바위와는 달리, 바위 암자가 아니고 말더듬을 눌(訥)자와 암자 암(庵)가 음각되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는 지눌스님이 수도한 곳으로 법명 지눌에서 눌(訥) 자를 떼어 기념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 참으로 그럴 듯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속인으로서 이해가 쉽지 않은 점은 권수정혜결사문을 쓰던 거조암과 사창 했다는 동화사, 은거하였다는 눌암은 팔공산 정상을 중심으로 각기 북과 남에 위치하고 있어 지금도 통행이 불가능한 곳이고 더구나 육로를 이용 하양∼신령으로 접근하기도 당시로서는 결코 수월하지 않았을텐데, 정반대쪽인 두 곳을 어떻게 내왕하면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는지 그 신기에 놀랄 따름이다.

스님은 구도자로서 스스로 수행을 통해 대각을 하셨을 뿐 아니라 진심직설, 시초심학입문, 수심결, 원돈 성불론, 화엄론 절요등 많은 저술을 남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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