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신앙의 사상적 배경
서양 사람들은 종교를 「신과 인간과의 관계」라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 인생 근본인 자아를 밝혀 세상을 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는 의타적인 종교라기 보다는 자아적인 종교인 면이 크다.
그러나 사람이 종교를 신앙하다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교리 교주나 지도자들을 때로는 초인적인 모습으로 부각하연 존경하고숭배 하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원래는 평범한 한 인간이었으나 그가 살아온 배경과 역사적 발자취가 너무도 초인적이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그분만은 세상에 가장 영원한 존재이고 사랑이라고 믿어왔던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80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자 희망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이때 생각해낸 것이 곧 미륵신앙이요.
타방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부처님과 보살님에 대한 신앙이었다.
일단 돌아가신 분은 한번 돌아가시면 영원히 적멸의 세계에 가서 다시는 자비와 원력의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므로 새로운 교주를 찾아야 한다고 믿고 찾은 것이 곧 미륵이다.
그러나 그 신앙은 맹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시작하게 된 것이다.
현우경 바바리품에 이런 말이 있다.
「바라나주 바라마달왕의 제상이 한 아들을 남았는데 32상 80종호를 갖춘 대인이었다.
이름을 미륵이라 불렀는데 어려서부터 기이한 모습과 영특한 재질이 널리 알려지자 왕은 이 소문을 듣고 이 애가 장차 자라면 왕위를 찬탈할 염려가 있다하고 그 아이를 없애 버리고저 한번 보기 원하자 그의 아버지가 그 음모를 먼저 알고 파리부따라국 왕사로 있는 그의 외삼촌 비바리에게 보내 기르게 하였다.
과연 아이는 천재라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달아 15세 전에 이미 세상의 학문을 다 통달하였다.
때마침 바바리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셨다는 말을 듣고 미륵이 16세 되었을 때 왕사성 영축산에 계신 부처님께 보여 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
(현우경 12)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미륵상생경과 하생경 성불경 등을 설하시게 된다.
미륵상생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미륵 보살은 지금으로부터 12년 뒤 2월15일에 명을 마치면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때 그곳에서는 5백만억 천자들이 각기 전단마니보배의 하늘관을 벗어 공양하고 원을 밝히므로서 보배궁전과 보배연꽃 천녀와 천악, 보배나무가 나타나며 그 가운데서 갖가지 광명이 나타나 여러 가지 음악과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모두 그 노래와 춤은 열 가지 착한 일과 여러 가지 큰 서원을 노래하게 된다.
그래서 이 춤과 노래를 보고 듣는 이는 모두 무상도의 마음을 발하게 된다. 」
이것이 미륵보살이 죽어 도솔천에 태어나는 과정이며 그 도솔천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인연 있는 사람들이 태어나 함께 복락을 받다가 미륵보살이 사바세계에 탄생하게 되면 그때 함께 내려와 불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 미륵 하생경에 나타난다.
「만일 비구와 모든 중생들이 저 하늘에 나기를 원하는 자이거나 최상의 도를 사랑하는 자이거나 미륵의 제자가 되고저 하는 이는 5계 및 8관재계와 10선법을 닦으면서 도솔타천의 미묘한 쾌락을 꽃으로 공양하고 여러 가지 3매를 닦으며 경전을 읽고 외우고 쓰며 미륵의 명호를 부르면 모두 그곳에 가서 태어나리라. 그리고 미륵이 장차인간에 태어나게 되면 함께 태어나 그의 일을 돕고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렇게 하여 미륵은 도솔왕생의 표본이 될 뿐 아니라 당래하생 교주가 될 것이다.
그러면 미륵부처님은 장차 사바세계에 와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살펴보자.
미륵불이 탄생하는 세상은 석가여래보다는 훨씬 복된 사회가 된다고 예언하였다.
왜냐하면 석가여래는 5탁악세에 태어나서 타락한 중생들을 구제하기 원하였으나 미륵부처님은 인간들이 10선을 완성하여 정복광명(淨福光明)이 가득할 때 용화세계를 형성하겠다 원했기 예문이다.
중부아함경(中部阿含經) 13, 설본경(說本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래세에 이 세계가 매우 풍부하고 인민이 복락하여 닭이 한번 날아 이웃 마을에까지 닿을 정도가 되면 소라왕(螺王)이 온천하를 다스려 천하가 태평하게 되는데 그때 미륵여래가 출현하리라.」
또 증일아함경 44권에도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장차 계두성(鷄頭城)에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태어나 계두성 얼지 않은곳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불도를 성취 하리라. 미륵이 성불한 뒤에는 미묘한 법을 연설하여 제 1회 설법에서는 92억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와 같이 미륵은 현재 우리 인생으로 태어났다가 도솔천에 왕생하여 온갖 본업을 누리시다가 마침내 내려와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으로 예언되어 있다.
미륵부처님은 잠깐 동안 생각만 하여도 부사의한 위신력과 자비 복덕의 위력 때문에 한량없는 생사업죄가 소멸되고 큰 공덕을 성취한다고 그 공덕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찬탄하였다.
「다만 미륵의 이름만 듣는 자라도 목숨이 마친 뒤에는 어두운 곳이나 변두리에 태어나지 않고 삿된 견해를 가지는 집이나 악업의 처소에 태어나지 않고 항상 바른 정견가(正見家)에 태어나서 3보를 신앙하게 된다. 」
하고, 또,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모든 계법을 범하고 온갖 악업을 지었더라도 보살의 이름을 듣고 성심으로 참회하면 모든 악업이 빨리 소멸된다. 」
하였으며, 또 그런 사람은,
「1천 2백겁의 죄장이 소멸된다. 」
하였다.
이름을 듣고 합장하고 공경만 하여도 50겁의 죄가 소멸되고 예경만 하여도 백겁의 죄가 없어진다 하였다.
「설사 천상에 태어날 복이 못된다 하더라도 사람의 몸을 잃지 않고 장차 용화세계에 태어난 미륵님을 뵙고 최상의 도심을 발하게 될 것이다. 」
하였다.
왜냐하면 미륵님은 미래세계 커다란 귀의처가 되어 불퇴전의도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면 미륵님은 전생에 무슨 인연을 지었기에 그런 공덕이 있는 것인가. 불본 행경에 옛날 선의(善意)부처님이 계실 때 그곳에서 최초 발심을 하였다.
그러니까 석가부처님보다는 40여겁을 앞서 발심한 것이 된다.
석가부처님은 그 뒤 해당(海幢)여래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전륜성왕으로 있다가 발심하였기 예문이다.
또 미륵부처님은 염광왕(炎光王)부처님 당시에는 현행(賢行) 도인으로서 불기법인(不起法忍)하였고 석가부처님은 그 위 42겁 있다가 도심을 발했다는 것이다.
다만 석가부처님은 현겁에서 크게 용맹 정진하는 까닭에 9겁을 뛰어넘어 미륵불 보다 먼저 성불하게 되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때 오직 일념의 정진상태를 아난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아난아 나는 보살행을 닦을 적에 일체를 아끼지 않았다. 처자와 눈·손 · 발·국토·보물·강산·신명까지도 아낀 일이 없다. 그래서 미륵보다 빨리 부처가 된 것이다. 」
또 증일아함경에도 대인념(大人念)을 칭찬하는 가운데,
「대인념은 정진인의 행할 일이요 게으른 자의 소행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륵은 나보다 30겁을 앞서 부처가 될 수 있었지만 정진력이 부족하여 나보다 뒤지게 된 것이다. 」
하였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대집경(大集經) 불본행경 등 여러 군데 나오며 법화경에서는 미륵보살이 구명(求名)보살로 나오는데 명예와 이익을 위해 중생들의 일을 살피다 보니 성불이 한 발짝 늦게 됐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석가여래는 성질이 급했고 미륵보살은 지장보살처럼 원력이 크고. 넓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 그에게는 성불의 시기가 문제 아니고 어떻게 사바세계를 정토화 하느냐 하는 것을 문제로 삼았다 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씨」(慈氏)이다.
「사랑스러운 어머니」그와 같은 자비 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그렇게 지었지만 「석가」는「잘했다」「능히 어질다」「말없이 정진하는 사람」이란 뜻이니 그 이름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옛날 미륵이 승화부(勝花敷)라는 세계에 일계지광명(一切智光明)이란 바라문으로 태어난 일이 있는데 깊은 산에 들어가 고생하는 가운데 홍수가 져서 굶어죽게 된 일이 있었다.
그때 어미토끼와 새끼토끼가 그에게 공양코저 불속에 뛰어 들었으나 도인은 그들을 어여삐 여겨 먹지 않으므로 그 인연으로 금생에 금색광명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의 두 토끼는 석가와 라후라의 전신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현우경(賢愚經) 12에는「옛날 옛적에 담마유지라는 전륜성왕이 있었다.
주위 작은 나라 가운데 「바새기」라는 나라가 있어 조공하였는데 한동안 문안도 오지 않고 조공도 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거느리고 갔다가 바새기 왕이 부처님을 찾아보고 발심하여 그 부처님께서 닦고 있는「자심삼매」를 닦고 익히므로서 몸에서 항상 금빛 광명이 나게 되었고 그래서 이름을 「미륵」 「자씨」라 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염불삼애불공견본사품에는 석가여래의 전신연 무량력왕(無量力王)이 사자(師子)와 사자의(師予意) 두 아들을 거느리고 보견불(寶肩佛)을 섬겼는데 그때 저 사자는 불공견보살이고 사자는 미륵이라 하였다.
이것은 석가부처님과 전생에 부자의 인연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또 대집월장경(大集月藏經)에는
「과거 비바시불때에 여덟 아우를 가진 도인이 있었는데 그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그 도인은 1천년 동안 고행을 닦았다고 한다. 그때의 여덟 아우는 아수라왕과 파순 데바달다 미륵 유마힐이라고 하니 이것은 석가부처님과 형제의 인연이다. 」
또 대장경과 보적경에는 부부와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나온다.
대집경 왕고품(往古品)에 보면,
「과거 먼 세상에 향공덕여래가 있었는데 그때 화목(華目)이란 전륜성왕이 선견(善見) ·부인을 데리고 지성으로 부처님을 섬기다가 선견이 보살다라니를 읽고 출가하게 날자가되자 화목도 출가하여 수도하였다. 이때 대신 선행(善行)이 반경을 일으켰다. 그때의 화목은 오늘의 석가요. 선견은 미륵이며 선행대신은 파순이다. 」
하였다.
보적경 47에는,
「옛날 이구광명불(離垢光明佛)」때 묘정진보살이 인욕으로서 부처님을 받들어 업수(業首) 태자를 교화하였는데 그때의 묘정진은 석가여래이고 업수는 미륵이다. 」
하였다.
이와 같이 미륵님은 과거에 석가부처님과 부모 ·형제 사제 ·스승의 인연을 맺으면서로 탁마하고 격려하여 내생에는 석가부처님께서 다하지 못한 중생을 제도하기로 서원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그 서원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석가여래는 5탁 악세에 태어나 업구중생을 제도하고저 희망하였고 미륵보살은 이 석가여래의 교화력으로 10선 공덕이 이루어진 세계에 태어나 성불의 인을 지어 주겠다 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미륵신앙을 오인하여 사도(邪徒)의 출현이 나타남 때도 있고 또 미륵부처님을 사모하여 10선을 닦아 대도를 행한자도 있으니 도는 같은 도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따라 이렇게 양도(陽道)와 음도(陰道)가 갈라진 것이다. 하여간 미륵신앙의 영향은 크다.
기독교에서 늘 이 미륵님 사상을 도입하여 메시아사상이 싹트게 되었고 불교인들도 현실에서 만족이 없을 때는 언제나 이 미륵불을 향해 소망을 걸고 살아왔다.
또 미륵불 운동은 10선 운동이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이라도 미륵부처님을 바라보며 선심을 일으켜 사회도덕 운동에 정신적으로 기여한바 크다.
그러나 메시아사상을 중심으로 종교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는 경향이 있어서 항상 혁명적인 기질과 현실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이 과거를 긍정하고 현실을 개선해 나가기 보다는 파쇼 정당의 사람들처럼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싹쓸어 버리고 완전한 새 세계를 건설하여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민 석가불교와 신흥적인 미륵사상과는 항상 보이지 않게 마찰을 가져왔으며 앞으로도 이의 충돌을 막는다고 꼭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전의 내용을 보면 미륵과 석가는 전생의 부자요. 형제이며 사제이고 또 부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마음의 자세로 오직 불법의 선행만을 넓혀가는 기수가 되어 화합해야 할 것 이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그렇다.
불교를 믿는 사람과 미륵신앙을 하는 사람은 같은 불교를 믿으면서도 그러한 간격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나라의 미륵 신앙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은 3천리 금수강산 어느 곳을 가도 절 없고 부처님 안 계신 곳이 없는데 길거리 노천에 서계시는 부처님은 거의 모두가 미륵부처님 이다.
백제불교를 살펴보면 미륵신앙의 자국을 곳곳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백제 제36대 성왕은 도읍을 부여로 옮긴 뒤에 불교를 크게 일으키었는데 특히 그 당시에는 미륵신앙이 많이 유행 되었든 모양이다.
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 사적에 백제 성왕 14년(526)에 사문 겸익(謙益)을 천축에 보내어 중인도 상가나 대사(常伽那大寺)에 가서 율문을 공부하고 율장을 가지고 백제에 돌아와서 72권을 번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 말한 「미륵불광사」는 지금 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국립 대찰로서 백제의 율종(律宗)의 조사되는 겸익 법사가 있든 절인데 미륵불을 모시고 절 이름을 미륵불광사라 하였든 것을 보아 미륵신앙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성왕 20년 8552)에는 왕이 비로서 일본에 불교를 전도 하고저 불상과 불경 등을 보냈는데 그 불상은 석가상 하나와 미륵성상(彌勒石像)을 전했다.
일본의 대신 소아마자(蘇我馬予)는 그 불상을 받들어서 절을 짓고 비로소 불법을 신봉하게 되었다.
제 29대 법왕은 더욱 불교를 독신하였으므로 시호를 법왕이라고 하였는데 그는 당시의 백제 서울이든 사비성(泗毘城)앞 백마강 건너에 큰 절을 경영하다가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승하하자 아들 무왕(武王)이이어서 전 · 후 36년 만에 이 절이 완성되었는데 이 절을 왕흥사라 하고 또는 미륵사라고 하였다.
이 절은 굉장히 장엄하고 화려하여 왕의궁성 이상으로 사치하게 꾸몄다 한다.
그런데 그 절에는 미륵불을 모셨다. 이 미륵불의 연기에 있어서는 삼국유사에는 무왕의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薯童)인데 묘한 꾀로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를 꾀어내어 장가들었다는 전설을 지닌 분이다. 그는 왕이 된 뒤에 용화산 사자사(師子寺)로 참배하러 가다가 그 산 아래 큰못 가에서 미륵님 3존상을 발견하였다.
왕과 부인은 크게 감응하여 그 못을 메우고 크게 절을 이룩하고 그 미륵 3존을 모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왕이 처음 시작하다가 승하한 뒤에 무왕이 계속하여 이절을 이룩하고 용화산 아래서 발견한 미륵 3존상을 모시고용화세계의 미륵불의 3회설법을 표시하여 불전 ·석탑 ·낭(廊) ·무(無) ·누 ·각 등을 다 3개소(所)로 배포하였다.
최근에 이절(왕흥사) 옛 터에서 불상 ·석탑 등을 발굴하였다 하니 다 백제 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리고 무왕이 용화산 ·사자사로 참배하러 가다가 미륵 3존을 발굴 하였다니 그렇다면 그 이전에 벌써 용화산이라 하고 미륵불상이 못 속에 매몰되었다면 적어도 성왕이 이곳에 도읍한 뒤에 이미 이곳에 미륵불을 모신 절이 있든 것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전북 익산에 있는 백제시대미륵사의 석탑등 유물을 보아 당시에 대규모의 절로서 백제의 「미륵신앙」을 변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 통일시대라고 하지만 백제의 옛 땅이든 지금 전북금제군 금산사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한 것으로서 백제시대 미륵신앙의 결정체로 그것은 단순한 신앙만이 아니라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민족적이고 대중적인 새로운 불교가 일어난 것으로 보아우리나라 미륵신앙의 결과를 맺은 곳으로 보겠다. 다음 신라불교와 미륵신앙의 관계를 보면 신라도 백제에 못지않게 15년(서기 528)에 비로서 불교를 공적으로 신봉하고 맨 처음 건립하였다는 흥륜사(興輪寺))는 미륵존상을 봉안하였고 그 뒤 진지왕 대에는 흥륜사승 진자(眞慈)법사가 「미륵상」 전에 나아가서 미륵대성께서 화현으로 세상에 출현하기를 기도하여 미륵님이 화량으로 출현하였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바있다.
원효(元嶢)대사는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를 지어서 도솔 왕생 사상을 밝히였고 대현(大賢)법사는 미륵경소(彌勒經疏)를 지어서 미륵교지를 천명했으며 생의(生義)법사는 미륵님의 현몽에 의하여 남산 동곡(南山洞谷)에서 석미륵상을 발굴하여 절을 짓고 봉안하니 이것이 생의사의 연기다. 남산 용장사(茸長寺)의 미륵석장은 대현법사를 따라 얼굴을 돌리고 충담(忠談)법사는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茶) 공양을 드리는 이야기이며 월명법사가 도솔가를 부르자 미묘한 동자가 차(茶)와 구슬을 법상에게 드리고 내원탑 미륵상 앞으로 사라졌다는 영험설은 다 미륵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위에서 백제·신라불교와 미륵신앙를 대략소개 했는데 신라불교의 미륵신앙은 특히 두 가지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는 미륵님이 화랑으로 나타났다는 것이요 하나는 노힐부득과 같이 미륵신앙에 의하여 현신성불(現身成佛)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 두 가지의 결과는 어떤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신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서 또는 현실로서 미륵님이 곧, 화할으로 현인신(現人身)으로 구현됐다는 매우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신라불교의 존재성과 가치성을 여실히 들어 낸 것으로서 인도와 중국에서 믿어온 미륵신앙보다 매우 실질적이며 개척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륵님은 우리 인간계의 이상에 응하여 현실화 한다는 신앙 태도이다.
그리고 백제시대의 미륵신앙은 더한층 구체적이며 적극적이어서 이 땅위에 곧, 미륵불의 용화세계를 실현하려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왕흥사 곧, 미륵사는 그때의 국력을 기울여서 36년에 완성한 우리나라 건축사상에 유례가 없는 대공사로서 이룩된 것인데 그 내용은(용화산) 아래에 미륵3존을 모시고 용화세계의 3회설법을 그대로 구현시켜 본 것이다.
그것은 미륵3존이 이미 성불하여서 이 땅위에 3회설법을 한다는 표현이니 그 얼마나 구체적이며 현실적인가.
그 점으로 보아서 신라의 미륵신앙은 인격적인 구현을 그 이상으로 하였는데 백제의 미륵신앙은 국토적인 구현을 그 이상으로 하였든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신라의 미륵신앙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는 인격적 구현을, 하나는 국토적인 구현을 그 이상으로 하였는데, 그러나 그것 또한 다만 하나의 신앙의 방향일 뿐이요 그 신앙을 중심으로 미륵불국을 이 지상에 구현할 특수한 종교운동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신라 · 백제의 미륵신앙을 토대로 하여 특수한 종교운동을 일으키므로 인격적 ·또는 국토적인 구현을 책진(策進)한 분은 바로 진표율사의 미륵신앙을 중심한 새로운 불교운동이라는 사실이다. 진표율사는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미륵님을 친견하고 계를 받고 또한 본각(本覺) ·시각(始覺)의 진리에 의한 「8·9」의 표찰을 받아 점찰법회의 근본진리를 밝히고, 그리고 점찰선악업보의 가장 간이하고 미묘한 방법으로 권선 ·징악의 교화운동을 일으키었다.
그 가운데는 가장 철저하고 진실한 종교의 수행법인 참회법이며 또는 적어도 10악을 여의고 10선을 닦아 가게 함은 인류의기본적인 도덕운동이며 그리고 권선 징악하는 교화운동 등이 가장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대중 불교운동이며 또한 민속 ·풍토에 알맞은 교화운동이었든 것이다.
그러므로 진표율사의 미륵신앙은 백제 ·신라의 미륵신앙이 매우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지만은 아직 그것이 하나의 구체적인 종교운동 ·도덕운동 ·교화운동으로 그 원리 ·원칙이 뚜렷한 실천운동은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진표율사는 그 신앙을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자신이 미륵님을 친견하고 그 계를 받고 법을 전하여 그것으로 새로운 교화운동을 일으킨 분이었다.
그리고 율사가 금산사를 제1도장으로, 다음 금강산 발연사를 제2도장으로 속리산법주사를 제3도장으로 창건한 것은 바로용화, 3회 설법도장을 표시한 것이다. 율사는 우리 국토가 특히 미륵님과 인연이 있다는 백제 ·신라의 신앙전통을 받아서 그 결론을 지은 분이다.
그러므로 진표율사는 미륵님의 교법을 받아서 10악을 참회하고 10선을 실천시키는 교화운동으로서 이 국토에 미륵불이 출현하실 용화세계를 구현 시킬 교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선 · 악 업보를 점쳐서 알고 그리고 10악을 참회하고 10선을 닦아 행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이 가장 잘사는 길이며 지상불국인 용화세계를 실현하는 법이며(미륵불)을 빠른 장래에 우리 국토에 강림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표율사의 뜻이요, 근본정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미륵신앙이 이처럼 성행하였고 민속화 하였으며 따라서 그만치 매력적이고 신비적이므로 때로는 가장 음흉하고 간사한 협잡배가 이(미륵님>을 악용하여 저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검은 마음에서 미륵을 빙자한 무슨 「00도」니 「00교」니 또는 자기가 미륵인체 가장하고 요언 ·사설(妖言 ·邪說)을 희롱하여 혹세무민(惑世誣民)하므로 국가 ·민족에게 큰 해독을 끼치고 그 자신이 길이 헤어나지 못할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업을 짓게 되는 것을 보게 됨은 놀랍고도 슬픈 일이었다.
특히 전한(前韓) 말년에 정감록(鄭鑑錄)의 비결과 샤마니즘적인 민속신앙들을 등에 업고 일어난 여러 가지 사교 ·유사종교가 우후죽순 모양 솟아났다.
어리석은 백성을 농락한일이 허다 한데 그 가운데 미륵님을 빙자하고 이름을 판 사교단체 만도 무려 수십 종류였다. 계룡산을 둘러싼 사교 ·유사교, 속에도 이런 족속이 많이 끼여 있지만 특히 전북 금산사는 옛적부터 미륵도장으로 이름났으므로 근래에 이(미륵님)을 빙자하고 악용하는 사기 · 협잡군들이 함부로 날뛰었다.
그리고 최근 경북 ·영일 ·포항 등지와 부산 등지를 근거로 이른바 정심교(正心敎)니 태극도(太極道)니 하는 잡교등이 다 그러한 종류들이다.
그들은 혹은 제가 미륵인체하는 가미륵(假彌勒)이 있는가 하면 미륵을 빙자하고 어느 때에 미륵님이 어느 곳에 강림한다거나 하는 요언·망설을 조작 유포 하므로서 금품을 강요하고 어리석은 부녀를 유혹하는 등의 협잡술을 하였다.
예컨대 최근에 사회의 물의를 일으킨 용화교주 서백일(徐白日)같은 자가 그의 표본이다.
이 서씨도 제가미륵으로 자처하였다. 그밖에 제가 미륵으로 자처한 자가 허다 하였다.
이에 그 이름을 표명치 않겠지만 그들은 대개가 자신이 벌을 받고 죽는다.
그것은 최근에도 있는 일이다. 그런 범죄자가 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제가 미륵으로 자처하는 협잡술의 연원을 찾아보면 저 신라 말년에 출현한 이른바 미륵왕자를 듣게 된다.
신라 제 47대 헌안왕자(憲安王子)로 태어난 궁예(弓裔)는 일찌기 부모의 버림을 받고 절에 들어가 중이 되어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뒤에 국가가 혼란한 틈을 타서 민란(民亂)을 일으켜 그 괴수가 되었고 차츰 국토를 노략하여 세력을 얻은 뒤에 송악(松嶽=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다시 철원(鐵圓=鐵原)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그때에 궁예는 미륵불이라 자칭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가사를 입고 그 맏아들은 청광(靑光)보살이요 끝에 아들은 신광(神光)보살이라 하며 스스로 불경 20여권을 지어냈다.
다 허무맹랑하고 요사스러운 말이었다. 과는 이렇게 말했다.
『지나간 세상에 미륵이 석가와 같이 도를 닦을 적에 누가 먼저 도를 이루는 자가 이 세상에 나아가 교를 펴서 세상을 다스리기로 내기했다. 한방에 누어 자면서
「누구의 무릎에 먼저 모란꽃이 피든지 먼저 핀 이가 나가 이 세상을 다스리기로 하자 ! 」
고, 그런데 석가가 거짓 잠든체하고 미륵을 바라보니 그 무릎에 꽃이 먼저 피어났다.
석가가 도둑의 마음으로 그 꽃을 꺾어 자기 무릎에 꽂았다가 세상을 다스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석가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도둑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나의 시대이다…』
등등의 황당무계한 요설을 지어내어 세상을 농락하고 백성을 속이려 하였다.
그런 요설을 듣는 석총(釋聰)이라는 비구는
「그것이 다 요망스러운 말이라」고 비평하자 궁예는 그를 철퇴로 쳐 죽이었다.
궁예는 단순히 협잡·기만술로 이런 요망스러운 짓을 한 것이 아니라 1종의 변태심리적인 발광증이었다. 그는 무엄하게도 감히 석가와 미륵을 모독한 죄로 호법신(護法神)의 벌을 맞아 하루 아침에 궁성에서 쫓겨나서 여러 백성에게 四지가 찢기어 죽고 그 자손이 멸종되었든 것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였다.
「도를 얻지 못하고 얻었다고 하거나 거짓 성현이나 신명을 빙자하여 세상을 농락하고 사람을 속이는 죄는 길이 용서를 받을 수 없고 영원히 무간옥에 떨어진다. 」
고 궁예가 감히 미륵불이라고 자칭하고 요망한 짓을 한 죄는 길이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궁예가 지어낸 요망한 말은 뒤에 유전되어 무식하고 요사스러운 무당의 입을 빌려서 이른바 창세가(創世歌)라는 무당의 노래가 되었는데
그 내용은,
「천지가 개벽할 적에 미륵님이 탄생하여 이 세상을 맡아 다스리더니 뒤에 석가는 도둑의 마음으로 미륵님의 무릎위에 솟아나는 꽃을 꺾어 자기 무릎에 꽂았다. 」
는 등의 해괴한 말로 엮어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이 인지가 발달 되었음에도 이런 상식이하의 허무맹랑한 말에 어리석은 백성이 놀아나는 자가 많으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다.
그리고 고려 말년에 요승 신돈(辛頓)은 권리를 악이용하고 세상을 농락하여 제 이욕을 채우기 위하여 땅을 깊이 파고 마른 콩을 수10석 묻고 그 위에 돌미륵을 묻어 놓은 뒤에 땅에서 미륵님이 솟아나리라고 선언하였다.
그 뒤에 콩이 불어 오르며 돌미륵이 따라서 땅 밖으로 솟아나게 되므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신돈에게 더욱 유혹되고 농락되었다.
신돈은 그 뒤에 신명의 노여움을 받아 사지를 찢기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오늘에도 계룡산 주변과 금산사 주변과 경남 ·북 여러 곳을 둘러 싼 궁예와 신돈의 무리가 얼마나 되는가? 생각하면 끔찍스럽다.
세상에 나서 무엇을 할 것이 없어서 어쩌면 무엄하게도 천상·천하의 대도사이신 미륵님을 빙자하고 제가 미륵이라 하여 그 악마의 죄업을 지으며 마침내 신벌을 받고 길이 헤어나지 못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가?
미륵님은 오직 석가세존의 「후계불(後繼佛)」로서 그 본각(本覺)의 불성은 석가나 미륵이나 모든 중생이 둘이 아니지만 다만 무량겁으로 닦아 얻은 자비 ·지혜 ·복덕은 천상 ·인간의 어느 성자도 따를 수 없는 「등각위(等覺位) 」의 대성이시다.
그런데 예로부터 미륵이라 자처하고 미륵을 파는 무리를 보면 탐 ·진 ·치의 3독 번뇌가 남보다 치열하고 「살 ·도 ·음 ·망」을 자처하니 그는 다시 미륵불의 「본각성」의 씨앗을 찾기 어려우며 영원한 지옥의 종자일 뿐이니 이것이 가련치 않으랴.
그리고 제 혼자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불구덩으로 들어가는 것을 제가 지은 업이라 하는 수 없거니와 여러 어리석은 백성, 천진난만한 남녀들을 같이 불구덩이로 끌고 감은 너무나 악착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쓰는 뜻은 오늘날, 이러한 간악하고 음흉한사기 협잡배가 대성님을 함부로 악용하고 모독하고 팔아서 국가·사회에 큰 해독을 끼칠 뿐 아니라 순진한 양민들이 3악도로 들어가는 것을 참아볼 수 없어서 이에 이 미륵신앙의 바른길을 천명하는 동시에 이 올바른 「미륵신앙」을 백일하에 들어내어 온 국민이 이 바르고 밝은 미륵대성의 길을 밟게 하므로 이 지상에 영원한 이상세계인 용화불국이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지난날의 사기배에 속아 잘못 마신 독약을 얼른 뱉고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백번 당부한다.
위에서 미륵님에 대체로 어떤 분인가? 미륵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미륵신앙의 내용과 역사적 유래도 대강 밝혀왔다. 그것을 잘 이해하면 미륵신앙의 바른 길을 잘 알 것이다.
미륵신앙에 있어서는 그 내용으로 도솔왕생 신앙과 당래 용화교주 신앙과 또 미륵공덕 신앙 등이 있고 역사적인 유래는 또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런데 요는 미륵신앙의 가장 기본 되는 길이 10선도의 실천이다.
왜냐하면 다음에 밝히는 바와 같이 미륵님이 현재 계신다는「도솔타천」은 10선공덕으로 이룩되었고 「도솔천」에 태어나려 하거나 미륵님의 제자가 되려면 10선도를 닦고 생각한 인연 공덕으로서만 이룩된다 하였고 미래, 이 지상에 실현될 용화세계는 10선도로 성취되고 10선업을 성취한 중생이 나게되며 미륵님은 일찌기 10선이 성취된 중생세계에 출현하기를 발원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미륵님을 바로 믿는 길은 10선도를 실현하는 길이다.
이 바른 신앙의 길을 우리나라 <진표율사>께서 바로 찾아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표율사의 뜻을 받아 미륵님을 믿는 것이 그 바른길이라고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