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족왕
석존께서 사위국의 기원정사에 계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법하실 때의 일이다.
천라(天羅)라는 나라에 반족(班足)이라는 왕이 있었다. 그리고, 이 왕의 고문에 전세(前世)라는 외도(外道)가 있었다. 전세 외도는 어느 때에 천명의 왕의 목을 잘라 대흑천(大黑天)에게 올릴 것을 권하였다. 반족왕은 九백 九십명의 왕의 목을 손에 넣을 수가 있었으나 나머지 한명의 목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 뒤 무척 애를 써서 북쪽으로 만리나 가서 겨우 최후의 한 왕의 목을 얻었다. 그 왕은 불명(不命)이라고 불리었다.
그 때 불명왕은 반족왕에게 탄원하기를,
『단 하루라도 좋으니 마지막으로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스님에게 공양하기를 허락해 달라』
고 하였다.
불명왕의 소원이 다름 아닌 신앙상의 문제였으므로 반족왕도 쾌히 그것을 승낙하였다. 이어 불명왕은 과거의 여러 부처의 설에 따라 백개의 높은 자리를 마련하고 백명의 법사(法師)를 청하여 하루 두 번에 걸려 인왕경(仁王經)의 八천억의 게(偈)를 강설하게 하였다. 대개 인왕경의 백좌백강(百座百講)에 의하여 재난에서 구제된 것은 다음과 같은 실례가 있다.
전에 제석천이 정생왕(頂生王)의 공격을 받았을 때, 백의 높은 자리를 마련하고 백의 법사에게 청하여 인왕경을 강찬(講讚)했기 때문에 정생왕은 물러가고 제석천은 멸망으로부터 구원되었다.
이윽고 불명왕의 초대를 받은 백명의 법사 중의 맨 첫 사람은 우선 불명왕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게를 강설하였다.
『큰 불 한 번 일어날 때
대천(大千)의 세계 파멸하리라.
큰 바다도 수미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범천(梵天), 제석, 여러 천용(天龍),
그 밖의 일체의 생물까지
모두 사멸하고 멸망하리다.
어찌 이 몸 피할 길 있으리.
지금의 이 세상은 삶과 죽음과
늙음과 병듦과 고생과 번뇌,
원한과 친애가 서로 다투는
소원과 어긋나는 세상이니라.
애욕의 번뇌에 몸부림치며,
스스로 다치고 고민하면서
삼계(三界)는 언제나 불안에 떠니
그 어디에서 즐거움 찾으리.
모든 법은 인연의 화합
이것에 의하여 맺어지나니,
성쇠가 모두 번개와도 같은 것
내일은 헤아릴 수 없는 것,
살아 있는 일체의 중생은
업연(業緣)으로 말미암아 나타남이니,
그 존재 모두가 빈 것일 뿐
그림자냐 메아리냐, 또한 꿈이냐.
마음은 업에 따라 이루어진 것
덧없는 이 몸에 주인은 없다.
국토라는 것도 이름 뿐
저 꼭두서니와도 흡사하여라.』
법사의 게(偈)는 끝났다. 불명왕은 이 게에 의하여 공(空)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불명왕은 약속대로 천라국에 가서 전부터 갇혀 있는 여러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은 이제 죽어야 할 때가 왔다. 그러니 지난날 부처님이 설법해 남기신 인왕의 게를 불러 보리(菩提)의 양식으로 삼자.』
『그대들은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입 속에서 부르고 있는가?』
불명왕은 여러 왕을 대표하여 인왕의 게를 불러 반족왕에게 대답하였더니, 반족왕은 그 게를 듣고, 또한 공의 깨달음을 얻어 크게 기뻐하며 여러 왕에게,
『자기는 외도의 그릇된 스승 때문에 잘못되어 도리어 어긋난 일을 하려고 하였다. 원래 당신들에게 아무런 죄가 있으리 없다.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 법사를 불러다가 인왕경을 강설하여 더욱 진리 탐구에 힘써 다스리는 도리를 다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반족왕은 나라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출가하여 불도를 구하였다고 한다.
<仁王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