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수능엄경(正本首楞嚴經) 04卷
그 때에 부루나미다라니자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여 공경히 부처님에게 아뢰기를 “위엄 있고 덕 높으신 세존께서 중생을 위하여 여래의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잘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세존께서 항상 추천하시기를 ‘설법하는 사람들 가운데 제가 제일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여래의 미묘한 법음을 듣자오니 마치 귀먹은 사람이 백 걸음 밖에서 모기 소리를 듣는 것과 같으니 본래 볼 수도 없거든 더구나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비록 분명하게 말씀해 주셔서 저로 하여금 의혹을 덜게 하였사오나 저는 아직도 그 뜻을 끝까지 추구하여 의혹이 없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나이다.
세존이시여! 아난 같은 무리들은 비록 깨달았다고는 하나 익혀온 습기와 번뇌가 아직 다 없어지지 못하였거니와 저희들은 모임 가운데 정기가 몸 밖으로 새는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른 자들이므로 비록 모든 새는 것을 다 끊어버렸다 하더라도 지금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음을 듣고서는 오히려 의혹과 회의에 얽혔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세간에 일체의 근(根), 진(塵), 음(陰), 처(處), 계(界)등이 다 여래장이어서 청정하고 본래 자연 그대로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홀연히 산과 강, 그리고 땅덩어리의 모든 물질들이 생겨나서 차례로 변천하여 끝마쳤다가는 다시 시작하곤 하는 것입니까?
또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흙과 물, 불과 바람은 본래 성품이 원융하여 법계에 두루 퍼져서 맑고 고요히 늘 머문다.’고 하셨나니 세존이시여! 만약 흙의 성품이 두루 퍼진다면 어떻게 물을 용납하며 물의 성품이 두루 퍼진다면 불은 생기지 못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물과 불의 두 성분이 허공에 가득하여 서로 능멸(凌滅)하지 아니하는지 그 이치를 밝힐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흙의 성질은 가로막는 것이고 허공의 성질은 텅텅 빈 것이거니 어찌하여 두 가지가 다같이 법계에 두루 퍼진다고 하십니까? 저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여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시어 저의 어두운 구름을 벗겨 주소서.”
모든 대중들과 이렇게 말하고서는 오체(五體)를 땅에 던지고 여래의 더없이 높은 자비로운 가르침을 흠모하여 목마르게 기다렸다. 그때에 세존께서 부루나와 모임 가운데에서 정기가 몸 밖으로 새는 것이 다 끊어진 무학(無學)인 모든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래가 오늘 널리 이 모임을 위해서 수승한 이치 속에서도 참되고 수승한 이치의 성품을 설명하여 너희 모임 중에서 소승인 성문들과 일체의 두 가지 빈 것을 얻지 못한 이들과 상승(上乘)으로 회향하는 아라한 등으로 하여금 모두 일승의 열반의 자리[寂滅場地]인 참된 아련야(阿練惹)의 올바르게 수행할 방법을 얻게 하고자 하노니 너는 지금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명하리라.”
부루나 등이 부처님의 법음을 흠모하여 잠자코 듣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루나야! 네가 말한 바와 같이 ‘청정한 본래 자연 그대로라면 어떻게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가 생기겠느냐?’고 하는데 너는 여래가 늘 말하는 ‘성각(性覺)은 오묘하고 밝으며 본각(本覺)은 밝고 오묘하다’고 한 말을 듣지 못했느냐?”
부루나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그러한 이치를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늘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말한 깨달음이니 밝음이니 하는 것은 성품이 밝은 것을 깨달음이라고 이름한 것이냐 아니면 깨달음이 밝지 못한 것을 밝은 깨달음이라고 이름한 것이냐?”
부루나가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밝지 못한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밝힐 것이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밝힐 것이 없다면 밝혀야 할 깨달음이 없으리라. 밝힐 것이 있으면 깨달음이 아니고 밝힐 것이 없으면 밝은 것이 아니며 밝음이 없으면 깨달음의 맑고 밝은 성품이 아니리라. 성품의 깨달음이 반드시 밝은 것이어서 허망하게 밝혀야 할 깨달음이라고 하나니라.
깨달음은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건만 밝힘으로 인하여 밝혀야 할 것이 이루어졌으니 그 밝혀야 할 것이 이미 망령되게 이루어지면 너의 허망한 작용의 능력을 생기게 해서 같고 다름이 없는 가운데서 불꽃처럼 성하게 다름을 이루었나니라. 저 다른 것을 다르다고 여겨서 그 다른 것으로 인해 같음이 성립되었고 같음과 다름을 분명히 구분하고 그로 인해 다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음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흔들리고 어지러운 것이 서로 작용하면 피로가 생기고 그 피로가 오래되면 번뇌가 생겨서 자연 서로 혼탁하게 되나니라.
이로 말미암아 오염과 번뇌[塵勞煩惱]가 일어나나니라.
움직여 일어나면 세계가 되고 고요하게 있는 것은 허공이 되나니 허공은 같으나 세계는 다르니 그 같고 다름이 없는 것이 참다운 현상계[有爲法]이니라.
깨달음의 밝음과 허공의 어두운 것이 서로 작용하여 동요하기 때문에 바람바퀴[風輪]가 있어 세계를 잡아 지탱[熱持]하는 것이다. 그리고 허공에 크게 소리쳐서 흔들림이 생겨나고 밝은 것을 굳혀서 막힘이 이루어지니 저 금은 보배는 밝은 깨달음이 굳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금륜(金輪)이 국토를 보전하여 지탱하는 것이며, 깨달음이 굳어져서 금은보배가 되고 밝음이 흔들려서 바람이 일어나니 바람과 금이 서로 마찰하므로 불빛이 생겨 변화하는 바퀴가 되었으며, 금보의 밝음이 윤택한 기운을 생기게 하고 불빛은 위로 치솟기 때문에 물바퀴[水輪]가 생겨 시방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불은 위로 오르고 물은 흘러내려서 서로 발하여 굳어져서 젖은 곳은 큰 바다가 되고 마른 곳은 육지와 섬이 되었으니 이러한 이치로써 저 바다 가운데서는 불빛이 늘 일어나고 육지와 섬 가운데서는 강물과 냇물이 늘 흐른다. 물의 힘은 불보다 열세이면 맺혀서 높은 산이 된다. 이면 돋아 나서 풀이나 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숲과 늪이 타버리면 흙이 되고 쥐어짜면 물이 된다. 서로 엉켜서 허망함이 발생하여 번갈아 서로 종자가 되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세계가 서로 계속 되나니라.
또다시 부루나야 밝은 것이 허망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깨달음의 밝은 것이 허물이 되니 허망한 것이 이미 성립되면 밝은 이치가 이를 앞지르지 못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듣는 것이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보는 것이 색깔을 벗어나지 못하여 빛과 향기, 맛과 촉감 등 여섯 가지 허망함이 이루어지나니 그로 말미암아서 보고 듣고 깨닫고 느끼는 것이 나뉘어져서 같은 업장끼리 서로 얽히고 어울리고 떠나는 것이 변화를 이루나니라.
보는 것이 밝아서 빛이 발하고 밝게 봄으로 해서 생각이 이루어지나니 다르게 보면 미움이 생기고 같은 생각은 사랑이 생겨서 그 사랑이 흘러 종자가 되고 생각을 받아들여 태(胎)가 되어서 서로 어우러짐이 발생하고 같은 업장끼리 끌어들인다. 그러므로 그 인연으로 해서 갈라람과 알포담등이 생기나니라.
태로 생하는 것과 알로 생하는 것, 습기에서 생하는 것과 화생으로 생하는 것이 제각기 응할 바를 따라서 알로 생하는 것은 오직 생각으로서만 생겨나고 태로 생하는 것은 (情)으로 인해 생겨나며, 습기로 생하는 것은 합하여 느낌으로서 생기고 화생은 떠나서 응함으로 생기니, 정, 생, 각, 합, 떠남으로 생기는 것들이 다시 서로 변하고 바뀌어서 업을 받는데 그 업장을 따라 혹은 날고 혹은 잠기고 하니 그러한 인연으로 중생이 서로 계속되나니라.
부루나야! 여러 가지 욕심으로 말미암아서 그것이 애욕의 성품이 생김을 돕는데 그 애욕을 여읠 수가 없어서 갖가지 업장을 짓게 되나니 그 때문에 나고 죽는 윤회가 계속하게 되나니라.
모든 세간의 부부가 혼인하여 교합해서 부모와 자식이 서로 낳아 끊이지 않나니 이러한 것들은 음욕을 탐냄으로 업장이 된 것이고, 또 모든 세간에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 힘이 강하고 약함에 따라서 번갈아가며 서로 잡아먹나니 이러한 것들은 살생을 탐하는 것으로 업장이 된 것이며, 또 다시 모든 세간에 다른 사람이 가진 재물과 돈을 크고 작은 요망한 도적들이 억지로 빼앗거나 몰래 가져가나니 이러한 것들은 도적질을 탐함으로 업장이 된 것이니 가령 세상에서 사람이 양을 잡아 먹었을 경우 그 양은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양이 되어 이러한 열 가지 생명을 지닌 무리들에 이르기까지 죽고 나고 나고 죽고 하여 번갈아 와서 서로 잡아먹으면서 악업이 함께 생겨 미래의 세계가 다하도록 계속되나니 나머지도 이와 같나니라.
네가 나의 목숨을 저버리면 나는 너의 빚을 갚고 내가 너의 목숨을 저버리면 네가 나의 빚을 갚아서, 이러한 인연으로 백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보응(報應)하게 되며, 너는 나의 마음을 사랑하거든 나는 너의 얼굴을 어여삐 여기고 내가 너의 마음을 사랑하면 너는 나의 얼굴을 어여삐 여겨 이러한 인연으로 백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얽매이게 되나니라.
오직 음욕과 살생 그리고 도적질, 이 세 가지가 모든 악의 근본이 된다. 그러한 인연으로 업장과 과보가 서로 연속되나니라.
부루나야! 이러한 세 가지의 뒤바뀜이 서로 계속되는 것은 모두 밝은 깨달음인 밝고 또렷한 의식이 분별하여 생기는 현상으로 인하여 허망함을 따라 보는 것이 생기나니 산과 강, 그리고 이 땅덩어리의 모든 작용이 있는 현상들이 차례로 변하여 흘러도 이 허망으로 인하여 끝나면 다시 시작하곤 하느니라.”
부루나가 말하기를 “만약 이 오묘한 깨달음과 본래 오묘한 각명(覺明)은 여래의 마음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것이거늘 까닭 없이 산과 강, 이 땅덩어리의 모든 작용이 있는 현상들이 생기는데 여래께서는 지금 오묘하고 빈 명각(明覺)을 얻었사온데 산과 강, 그리고 이 땅덩어리의 작용이 있는 익혀온 번뇌가 언제 다시 생기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부루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비유하면 마치 혼미한 사람이 어떤 취락(聚落)에서 남쪽을 북으로 의혹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 미혹은 미혹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냐 깨달음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냐?”
부루나가 말하기를 “이렇게 혼미한 사람은 미혹으로 인한 것도 아니며 또한 깨달음으로 인한 것도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오면 미혹은 본래 뿌리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미혹으로 인했다고 하겠으며 깨달음이 미혹으로 생긴 것이 아닌데 어떻게 깨달음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미혹한 사람이 정히 미혹하여 있을 때에 어떤 깨달은 사람이 옳게 지시하여 깨닫게 한다면 부루나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비록 미혹하였으나 그 마을 시장에서 다시 미혹이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루나야! 시방의 여래도 역시 그러하니라. 그 미혹은 근본이 없어서 성품이 필경에는 빈 것이니 옛날에는 본래 미혹함이 없었으나 미혹이 있는 듯 한데서 깨닫나니 미혹을 깨달아 미혹이 없어지면 깨달음이 있어 미혹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의 꽃을 보는 것과 같아서 눈병이 없어질 것 같으면 그 꽃은 허공에서 없어지나니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저 허공의 꽃이 없어진 빈 자리에서 그 꽃이 다시 생기기를 기다린다면 너는 그러한 사람을 볼 적에 어리석다고 하겠느냐 지혜롭다고 하겠느냐?”
부루나가 말하기를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거늘 허망으로 인하여 생기고 없어짐을 보는 것이니 그 꽃이 허공에서 없어짐을 보는 것도 이미 뒤바뀐 것이거늘 명령하여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게 한다면 이는 실로 미친 바보짓입니다. 어찌하여 이러한 미친 바보 짓하는 사람을 이름하여 어리석다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다면 어찌하여 모든 부처님의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허공에서 어느 때에 다시 산과 강, 그리고 이 땅덩어리가 나옵니까하고 묻느냐?”
또 마치 금광에 순금이 섞여 있다가 그 금이 완전하게 순금이 되고나면 다시는 섞이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마치 나무가 불에 타서 재가 되면 다시는 나무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모든 부처님의 보리와 열반도 역시 그와 같나니라.
부루나야! 또 네가 묻기를 “흙과 물, 불과 바람의 본래 성품이 원융하여 우주에 두루 하였다면 어째서 물의 성품과 불의 성품이 서로 능멸하지 않습니까?” 하였고, 또 묻기를 “허공과 땅 덩어리가 다 함께 우주에 두루 하였다면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입니다”고 하니
부루나야! 비유하면 허공의 본체가 여러 가지 모양이 아니지만 그러나 저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남을 막지 않는 것과 같나니라.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부루나야! 저 커다란 허공이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두우며,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개이면 맑으며, 기운이 엉키면 탁하고 흙먼지가 쌓이면 흙비가 되며, 물이 맑으면 밝게 비치나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러한 여러 방면에서 작용하는 모든 현상들이 저것들로 인하여 생기느냐 허공을 따라 있는 것이냐? 만약 저것들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라면 부루나야! 장차 해가 비칠 적에는 이미 그것은 해의 밝음이므로 시방세계가 다 같은 햇빛이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공중에서 다시 둥근 해를 보게 되느냐? 만약 허공을 따라서 생긴 밝음이라면 허공이 응당 스스로 비칠 것인데 어찌하여 밤중이나 구름이 끼었을 적에는 빛을 내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밝음은 해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며 허공이나 해와 다른 것도 아니니라. 그 현상을 살펴보건대 본래가 허망해서 가리켜서 말할 수가 없음이 마치 허공의 꽃에서 헛된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떻게 서로 능멸하는 이치를 따지겠느냐? 성품을 살펴보건대 본래 참된 것이라서 오직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일 뿐이다.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의 마음이 본래 물이나 불도 아니거늘 어찌하여 또다시 서로 용납하지 못하느냐고 묻느냐?
참되고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도 역시 그러하니라. 네가 허공으로서 밝히면 허공이 나타나고 흙과 물, 불과 바람으로 각각 밝히면 곧 그것들도 각각 나타나며 만약 다 함께 밝히면 곧 다 함께 나타나나니라.
어떤 것을 함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부루나야! 마치 물 속에 해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니, 두 사람이 함께 물 속의 해를 보다가 동쪽과 서쪽으로 제각기 가면 물 속의 해도 제각기 두 사람을 따라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가서 본래부터 표준한 곳이 없으니 따져 말하기를 “저 해는 하나인데 어찌하여 제각기 가느냐?”고 하며 “각자 가는 해가 이미 둘인데 어찌하여 하나로 나타나느냐?”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완연히 허망하여 의지할 수가 없나니라.
부루나야! 너는 물질과 허공으로서 여래장에서 서로 밀어내고 서로 빼앗으므로 여래장도 따라서 물질과 허공이 되어 우주에 두루 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바람은 움직이고 허공은 맑으며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두운 것인데 중생들은 어리석고 미련해서 깨달음을 저버리고 허망한 티끌과 어울리므로 번뇌가 일어나서 세간의 현상이 있게 되나니라.
나는 오묘하고 밝은 것이 생겨나거나 없어지지도 않는 것으로서 여래장과 합하였는데 여래장이 오직 오묘하고 밝은 깨달음이므로 우주에 원만하게 비춘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하나가 한량없는 것이 되고 한량없는 것이 하나가 되며, 적은 가운데 큰 것을 나타내고 큰 가운데 적은 것을 나타내며,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방의 세계에 두루 퍼지며, 몸으로 시방의 끝없는 허공을 머금으며, 한 털끝에서 보왕(寶王)의 세계를 나타내며, 작은 먼지 속에 앉아서 큰 법륜(法輪)을 굴리나니라.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에 합하므로 진여인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발하니 여래장의 본래 오묘하고 원만한 마음은 마음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며, 흙도 아니요 물도 아니며, 바람도 아니요 불도 아니며, 눈도 아니요 귀, 코, 혀, 몸, 생각도 아니며, 빛도 아니요 소리, 향기, 맛, 촉감, 법도 아니며, 안식계(眼識界)도 아니요 이렇게 의식계(意識界)도 아닌 데까지 이르며, 밝음도 밝음이 없음도 아니요 밝음과 밝음이 없는 것마저 다함도 아니며, 이와 같이 늙음도 아니요 죽음도 아니며, 늙음과 죽음이 다함도 아닌 데까지 이르며, 괴로움도 아니요 괴로움의 원인도 아니며, 괴로움을 없는 자리도 아니요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요 증득함도 아니며, 보시도 아니요 계율도 아니며, 인욕도 아니요 정진도 아니며, 선정도 아니요 반야도 아니며, 바라밀다도 아니니라.
이와 같아서 여래도 아니요 응공도 아니며, 정변지도 아니요 대열반도 아니며, 항상함도 아니요 즐거움도 아니며, 주체도 아니요 청정함도 아닌 데까지 이르나니 이렇게 세간과 출세간도 모두 아니기 때문이요.
곧 여래장의 원래 밝은 마음인 오묘함은 곧 마음이요 허공이며, 흙, 물, 바람, 불이요 곧 눈, 코, 혀, 몸, 생각이며, 곧 빛, 소리, 향기, 맛, 촉감, 법(法)이요 곧 눈으로 보아 의식하는 경계이며, 이렇게 뜻으로 생각하여 의식하는 경계에까지 이르며, 곧 밝음과 밝음이 없음이요 밝음과 밝음이 없는 것까지 다 끊음이며 이렇게 곧 늙음이요 죽음이며, 곧 늙음과 죽음이 다 함이요 곧 괴로움(苦), 괴로움의 원인[集], 괴로움을 없애는 자리[滅], 괴로움을 없애는 길[道], 지혜, 증득함이며, 곧 보시, 계율,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바라밀다이고 이렇게 곧 여래, 응공, 정변지이며, 곧 대열반이요, 곧 항상함(常), 즐거움(樂), 주체(我), 청정(淨)이니
이것이 모두가 곧 세간법과 출세간법이므로 곧 여래장인 오묘하고 밝은 마음의 근본은 그런 것도 아니요 그렇지 아니함도 아니며,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이니라.
어찌하여 세간의 삼유(三有)의 중생들과 출세간의 성문 연각들이 알고 있는 마음으로 여래의 위없는 보리를 추측하여 헤아려서 세간의 언어로써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비유하면 마치 거문고, 비파. 공후가 비록 묘한 소리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손가락이 없으면 끝끝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너와 중생들도 역시 이와 같아서 보배로운 깨달음의 참 마음이 각각 원만하건만 만일 내가 손가락을 놀리면 해인(海印)이 빛을 발하거늘 너는 잠시만 마음을 움직이면 번뇌가 먼저 일어나나니 이는 위없는 깨달음의 길을 부지런히 구하지 않고 소승을 좋아하여 적은 것을 얻고 만족하게 여기는 탓이니라.”
부루나가 말하기를 “저와 여래는 보배의 깨달음이 원만하게 밝아서 진실하고 오묘하고 청정한 마음이 다를 것이 없이 원만한 것입니다만 저는 옛날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허망한 생각을 내어서 오랫동안 윤회 속에 있었으므로 지금 성인의 과업을 이루었으나 아직도 완전하지 못하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모든 허망함이 모두 다 없어져서 홀로 오묘하게 참되고 항상 하시니 감히 여래께 묻습니다만 일체 중생들은 무슨 원인으로 허망한 생각이 있어서 스스로 오묘하게 밝은 것을 가리우고 이렇게 윤회에 빠져 허덕이나이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비록 의심은 없앴으나 나머지 의혹이 다 없어지지 못하였으니 내가 세상에서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지고 지금 다시 네게 묻겠다.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시라벌성 안에 연야달다(演若達多)가 홀연히 이른 새벽에 거울로 얼굴을 비추어 보다가 거울 속의 머리에 있는 눈썹과 눈은 볼만하다고 좋아하고 자기 머리의 얼굴과 눈은 보지 못한다고 짜증을 내면서 그것을 도깨비라고 여겨 까닭 없이 미쳐 달아났다하니 너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무슨 원인으로 까닭 없이 미쳐 달아났겠냐?”
부루나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마음이 미친 것일 뿐 다른 까닭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은 본래 원만하고 밝고 오묘한 것이니 이미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였던들 어떻게 원인이 있다고 하겠으며 만약 원인이 있으면 어떻게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겠느냐? 스스로 일으킨 모든 망상들이 전전하며 서로 원인이 되어 미혹을 좇아서 미혹이 쌓여서 끝없는 세월을 지내왔으므로 비록 부처님께서 발명해주었어도 오히려 돌이키지 못하나니라.
이와 같이 미혹한 원인은 미혹으로 인하여 저절로 생긴 것이니 미혹함이 원인이 없다는 것을 알면 허망한 생각이 의지할 데가 없나니 오히려 생기는 것도 없는데 무엇을 없애려느냐? 보리를 얻은 자는 잠을 깬 사람이 꿈 속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는 비록 꿈 속의 일이 분명하지만 무슨 수로 꿈 속에 물건들을 취할 수 있겠느냐? 더구나 원인이 없어서 본래 있지도 않은 것이랴.
저 시라벌성의 연야달다와 같은 경우는 어찌 인연이 있어서 자기의 머리를 무서워하면서 달아났겠느냐? 홀연히 미친 증세가 없어지면 그 머리는 밖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며 비록 미친 증세가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들 어찌 잃어버린 것이겠느냐? 부루나야! 허망한 성품이 이러하니 원인이 어찌 있다고 하겠느냐?
너는 다만 세간의 업장과 과보 그리고 중생, 이 세 종류가 서로 연속되는 것을 따라 분별하지 아니하면 세 가지 인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이 생기지 아니하면 곧 너의 마음 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성품은 자연 없어질 것이다.
무명이 없어지면 곧 보리의 뛰어나게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우주에 두루 퍼져서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진 것이니 어찌하여 애써가며 수고롭게 닦아서 증득하겠느냐?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옷 속에 여의주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알지 못해서 타향에서 곤궁하게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것과 같아서 비록 실제는 빈궁하지만 여의주는 잃은 것이 아니니 홀연히 지혜 있는 사람이 그 여의주를 가르쳐주면 원하던 것이 마음을 따라서 큰 부자가 되리니 그때에야 바야흐로 그 신비로운 여의주가 밖에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으리라.”
그때에 아난이 대중 가운데에 있다가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를 올리고 일어나서 부처님에게 아뢰기를 “세존께서 지금 말씀하시기를 음욕, 살생, 도적질의 세 가지 업연이 끊어지므로 해서 세 가지 원인이 생기지 아니하면 마음 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성품이 자연 없어지리니 미친 성품이 없어지면 이는 곧 보리인지라 사람에게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인(因)과 연(緣)이 분명한 것이거늘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인연을 완전히 버렸습니까? 저도 인연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열리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이치는 어찌 나이 어린 저희들 유학인 성문들 뿐이겠습니까! 지금 이 모임 가운데 있는 대목견련과 사리불과 수보리 등도 늙은 범지(梵志)를 추종하다가 부처님의 인연법을 듣고서 발심하여 깨달아 정기가 몸 밖으로 새는 것이 끊어지는 도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보리가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니 그렇다면 왕사성의 구사리 등이 말하는 자연이라야 제일의(第一義)가 되리니 바라옵건대 큰 자비를 베푸시어 혼미하고 답답한 것을 열어 밝혀 주시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치 성 가운데 있는 연야달다가 만약 미친 성품의 인연을 제거하여 없앨 수만 있다면 미친 성품이 아닌 것이 자연히 나오는 것과 같아서 인연과 자연의 이치가 여기에서 끝나나니라.
아난아! 연야달다의 머리가 본래 자연 그대로인진데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자연 아닌 것이 없거늘 무슨 인연 때문에 머리를 두려워하여 미쳐서 달아나느냐?
만약 자연의 머리가 인연 때문에 미쳤다면 어찌하여 자연이 인연 때문에 잃어지지 않느냐? 본래의 머리는 잃은 것이 아니거늘, 미쳐 두려워함이 허망하게 생겼다면 이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인연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느냐?
본래 미친 것이 자연이라면 미친 두려움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겠지만 미치지 않았을 적에는 미친 증상이 어디에 숨었었으며 미치지 않은 것이 자연이라면 머리는 본래 미쳐 날뜀이 없을 것이거늘 어찌하여 미쳐서 달아나느냐?
만일 본래의 머리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미쳐서 달아났던 것을 알면 인연과 자연이 모두 장난 같은 논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세 가지 연(緣)이 끊어지므로 곧 보리심이다’고 한 것이다.
보리의 마음이 생기고 나서 없어지는 마음이 없어진다면 이것도 나고 없어지는 것이니라. 나고 없어짐이 모두 다하여 공부의 작용이 없는 길에 만약 자연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것은 자연의 마음이 생기며 나고 없어지고 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분명하니 이것도 나고 없어지는 것이니라. 나고 없어짐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이름한다면 이는 마치 세간의 모든 현상이 섞여서 한 몸이 되는 것을 화합의 성품이라 하고 화합하지 않은 것을 본연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본래 자연과 본래 자연이 아닌 것, 화합과 화합이 아닌 것, 자연과 합해진 것을 모두 여의며 따라서 벗어나고 화합함이 모두 아니라야 이 구절이 바야흐로 장난 같은 논란이 없는 진리라고 할 수 있나니라.
보리와 열반이 아직도 아득하고 멀어서 네가 여러 겁 동안 애써서 닦는 것으로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비록 다시 시방여래의 십이부경(十二部經)에 청정하고 오묘한 이치를 기억해 가짐이 항하의 모래와 같더라도 장난 같은 논리만 더할 뿐이다.
네가 비록 인연과 자연의 이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결정코 분명하고 또렷하므로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많이들은 것으로는 제일이라고 하겠지만 이렇게 여러 겁을 많이 들음을 쌓아 익혔건만 마등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거늘 어찌하여 나의 불정신주(佛頂神呪)를 기다려서 마등가의 마음에 음욕의 불꽃이 다 없어지게 하고 아나함을 증득하여 나의 법 가운데에 정진의 숲을 이루고 애욕의 강을 말려서 너로 하여금 해탈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아난아! 네가 비록 여러 겁을 여래의 비밀스럽고 오묘하고 장엄한 것을 기억해 가졌다고 하더라도 단 하루를 정기가 몸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 도를 닦아서 세간에서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가지 고통을 멀리 여의는 것만 같지 못하나니라.
마등가와 같은 경우는 전세에 음란한 여자였으나 신주(神呪)의 힘으로 인하여 그 애욕을 소멸하고 지금은 나의 법 가운데 들어와서 성비구니(性比丘尼)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나후라의 어미인 야수다라와 함께 과거세의 인연을 깨달아 많은 세상을 지내오면서 맺어온 인연이 탐욕과 애욕으로 괴로움이 된 것임을 깨닫고서 일념으로 정기가 몸 밖으로 새어나감이 없는 선행을 닦았으므로 혹은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혹은 수기(授記)를 받기도 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속아서 아직도 보고 듣는데 머물러 있느냐?”
아난과 대중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의혹이 사라져 없어지고 마음의 참 모습을 깨달아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져서 일찌기 있기 않았던 것을 얻고는 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를 올리고 꿇어앉아 합장하고서 부처님에게 아뢰기를 “위없이 크고 자비하신 청정한 보배의 왕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잘 열어주셔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인연을 방편으로 이끌어주시고 권장해주시는 한편 캄캄한데 빠진 자를 인도하여 괴로움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비록 이러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서 여래장인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퍼져서 여래께서 시방국토의 청정한 보엄묘각왕찰(寶嚴竗覺王刹)을 함유(含有)하였음을 알았습니다만 여래께서 다시 꾸짖으시기를 ‘많이 듣기만 하는 것은 공이 없어 닦아 익히는 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시니
저는 지금 마치 나그네 생활을 하던 사람이 홀연히 천왕(天王)이 주신 호화로운 집을 받은 것과 같아서 비록 큰 집을 얻었으나 문을 찾아 들어감이 요긴한 것과 같사오니 원컨대 여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시와 저희 이 모임에 있는 여러 몽매(夢昧)한 자들을 깨우쳐 주시어 소승을 버리고 마침내 여래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본디 발심했던 길을 얻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배울 것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해야 지난날 반연하던 마음을 항복받고 다라니(陀羅尼)를 얻어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어갈 수 있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는 오체(五體)를 땅에 던지고서 모임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자비하신 가르침을 기다렸다.
그때에 세존께서 모임 가운데 있는 연각과 성문들이 보리의 마음에 자재하지 못한 자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앞으로 닥칠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 말법의 중생들이 보리의 마음을 발할 자들을 위하여 무상승(無上乘)의 오묘한 수행의 길을 열어주려고 하시어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이 결정코 보리의 마음을 내어 여래의 오묘한 삼마지에 피로하고 게으름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응당 먼저 깨달음을 발하려는 첫 마음을 일으킨 때에 두 가지 결정의 의미를 밝혀야 하나니라.
무엇을 ‘처음 발심한 때에 두 가지 결정의 뜻’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첫 번째 뜻은 너희들이 만약 성문을 버리고 보살승(菩薩乘)을 닦아서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어가고자 할진댄 응당 인지(因地)의 발심이 과지(果地)의 깨달음과 같은가 다른가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아난아! 만약 인지에서 나고 없어지는 마음으로 본래 수행할 원인으로 삼아서 불승(佛乘)의 나고 없어짐이 없는 것을 구할진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나니라.
그러한 뜻으로 너는 마땅히 모든 기세간(器世間)의 만들 수 있는 법을 비추어 밝혀 보아라. 다 변하여 없어지나니라. 아난아! 너는 세상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법을 보아라. 어느 것이 무너지지 않더냐? 그러나 끝끝내 허공이 허물어졌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을 터이니 무엇 때문인가? 허공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허물어져 없어지지 않나니라.
너의 몸 속에서 굳은 모양은 흙이 되고 축축한 것은 물이 되며, 따뜻한 촉감은 불이 되고 움직이고 흔들리는 것은 바람이 되나니 이 네 가지 원소가 얽혀서 너의 맑고 원만하고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이 나뉘어져서 보고 듣고 깨닫고 살피는 것이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섯 겹의 혼탁함이 생기나니라.
어떤 것을 혼탁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맑은 물은 청결함이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고 저 흙과 뿌연 모래의 종류는 본 바탕이 엉키는 것이니 두 가지의 본체는 자연의 법칙이라서 그 성품이 서로 따르지 못하는 것이거늘 세상 사람들이 그 흙과 모래를 가져다가 맑은 물에 넣으면 흙은 엉키는 것을 잃어버리고 물은 맑음을 잃어버려서 형태가 흐릿하게 되는 것을 혼탁[濁]이라고 이름하나니 너의 다섯 겹으로 쌓인 혼탁한 것도 역시 이와 같나니라.
아난아! 네가 허공이 시방에 두루한 것을 볼 적에 허공과 보는 놈이 구분되지 아니하여 허공은 있고 실체는 없으며 보는 놈은 있고 깨달음은 없어서 이것이 서로 짜여 허망함을 이루나니 이는 첫 번째 둘러싼 것으로 그 이름이’겁탁’이니라.
네 몸이 현재 네 가지 원소가 뭉쳐서 몸이 되었으므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 막혀서 장애가 되며 물과 불, 바람과 흙이 돌아가며 깨달아 알게 하여 서로 짜여 허망함을 이루니 이는 두 번째로 둘러싼 것이니 그 이름이’견탁’이니라.
또 너의 마음속에 기억하고 의식하고 외우고 익히고 하여 성품에서 깨닫고 보고 하는 것을 발하고 모양은 여섯 가지 대상인 물질을 나타내니 대상인 물질을 여의면 현상이 없고 깨달음을 여의면 성품이 없어서 이것이 서로 짜여 허망함을 이루나니 이는 세 번째로 둘러싼 것이니 그 이름이 ‘번뇌탁’이니라.
또 네가 아침 저녁으로 생기고 없어짐이 멈추지 아니하여 느끼고 보는 놈은 늘 세간에 머물고자 하며 업장을 지어 움직이는 힘은 언제나 항상 국토에 옮겨져서 이것이 서로 짜여 허망함을 이루나니 이는 네 번째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이’중생탁’이니라.
너희들의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원래 다른 성품이 아니거늘 모든 대상 물질이 가로 막아서 형상도 없이 다른 것이 생기나니라. 성품 가운데 서로 알고 작용 가운데 서로 배반하여 같고 다름이 기준을 잃어 서로 짜여 허망함을 이루나니 이것은 다섯번째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이’명탁’이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네가 지금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하는 것으로 하여금 멀리 여래의 상(常), 낙(樂),아(我), 정(淨)과 계합하기를 바라거든 먼저 마땅히 나고 죽는 근본부터 골라 버리고, 나고 죽지 않는 맑고 원만한 성품에 의해서 이룩해야 하리니 맑음으로써 허망하게 났다 죽었다 하는 것을 돌이켜서 이를 항복받아 본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서 본래의 명각(命覺)인 나고 죽음이 없는 성품을 얻어 인지(因地)의 마음을 삼은 다음에야 과지(果地)를 닦아 증득함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이 마치 흐린 물을 맑게 할 적에 고요한 그릇에 담아서 흔들리지 않게 오래 두면 모래와 흙은 저절로 가라앉고 맑은 물만이 앞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은 처음으로 객진번뇌(客塵煩惱)를 항복 받았다고 이름할 것이요, 앙금을 버리고 순수한 물만 남게 한 것과 같은 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을 영원히 끊었다고 이름할 수 있으니 밝은 모양이 정밀하고 순수하면 일체가 변하여 나타나도 번뇌가 되지 않아서 모두가 열반의 청정하고 오묘한 덕과 부합하나니라.
또 다시 아난아! 너는 지금 알고 있느냐? 아미타불이 저기 멀지 않은 곳에 계시니 너는 일어나 합장하고서 서쪽을 향해 이마로 예를 올려라. 아난이 공경히 이마로 예를 올리는 동안에 아미타불이 큰 광명을 발하여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두루 비추시니 수없이 많은 천지와 수없이 많은 해와 달이 모두 다 빛을 잃어버리고 오직 한줄기 부처님의 광명만이 힘차고 환하게 빛나거늘 이 모임의 사부대중 가운데 모든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은 저 아미타불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의 장엄함을 통해 보고 공경히 이마로 예를 올리고서 곧 차등이 있을 수 없는 아뇩다라삼보리의 마음을 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