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05장. 문수사리 문질품
이 때에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이르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병을 위문하여라.”
문수사리는 이렇게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말을 건네기가 매우 어렵나이다. 실상의 이치를 깊이 통달하여 법문을 잘 연설하며, 변재가 막힘이 없고 지혜가 걸림이 없으며, 온갖 보살들의 법식을 모두 알고 여러 부처님의 비밀한 법문에 들어가지 못한 데가 없으며, 뭇 마군이를 항복받고 신통에 자재하게 노닐며 지혜와 방편에 끝까지 이르렀나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명령을 받잡고 한번 가서 병을 위문하겠나이다.”
이에 대중 가운데 있던 보살과 큰 제자들과 제석천왕.범천왕.사천왕들이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제 문수사리와 유마힐 두 보살이 만나 이야기 하면 반드시 묘한 법문 을 말하리라.’ 하고 팔천 보살과 오백 성문과 백천 천인들이 모두 따라가려 하였다.
이에 유마힐은 ‘문수사리가 여러 보살과 큰 제자들과 여러 천인들이 오는구나’ 하고 신통력으로 방을 비워 놓고 방안에 있던 기구와 시자들을 치우고 평상 하나만 놓고, 병을 앓으며 누워 있었다.
문수보살이 그 집에 들어가니 방은 비어 아무 것도 없고, 혼자서 평상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잘 오셨나이다, 문수사리여, 문수사리여. 오지 않는 것으로 오시며 보지 않는 것으로 보시나이까? 그러하오이다, 거사여. 왔다 하여도 온 것이 아니며 갔다 하여도 가는 것이 아니니 왜 그런가 하면 왔다는 것은 온 데가 없고, 갔다 해도 간 데가 없으며, 본다는 것도 실상은 보지 못하는 것이 없는 탓이며, 마음과도 합한 것이 아니니 마음은 요술과 같은 탓이니다. 지대.수대.화대.풍대에서 어느 대의 병이니까?
이 병은 지대의 병도 아니요. 지대를 여읜 것도 아니며, 수대.화대.풍대도 또한 이와 같나이다. 그러나 중생의 병은 사대를 아 일어나는데 그 병이 있으므로 나도 병이 났나이다.”
문수사리는 다시 유마힐에게 물었다.
“보살이 어떻게 병난 보살에게 위문하여야 하나이까? 몸이 무상하다고 말할지언정 몸을 여의라고 말하지 말 것이며, 몸이 괴로운 것이라고 말할지언정 열반을 좋아하라고 말하지 말것이며, 몸이 나라고 할것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중생 교화할 것을 말하며, 몸이 공하다고 말할지언정 필경에 적멸하다고 말하지 말 것이며, 먼저 죄를 참회하라고 말할 지언정 과거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말 것이며,
자기의 병으로써 남의 병을 불쌍히 여겨야 하며, 지나간 세상에 한량없이 고통받던 줄을 알아서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할 것을 생각하며, 근심을 내지 말고 항상 정진할 것이며, 유명한 의사가 되어서 여러 사람의 병을 치료할 것이니 보살이 이와 같이 병있는 보살을 위문하여 기쁘게 할지니다.
몸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며 공하고 내가 없는 이치를 알고 그 몸을 싫어하여 공적한 열반에 들기를 도모하고 중생 교화하기를 단념하는 것은 소승네의 소행이므로 여기에서는 그와 반대로 몸이 고통거리인 줄 알면서 그 몸을 싫어하지 않고 중생교화에 헌신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거사님, 병 있는 보살이 어떻게 그 마음을 조복하나이까? 병 있는 보살은 이런 생각을 하여야 하나니, 나의 이 병은 지난 세상의 허망한 생각과 꺼꾸로 된 마음과 번뇌로부터 생긴 것이요, 진실한 법이 아니거늘 누가 이 병을 받으리요 할지니다.
왜냐하면, 사대가 화합한 것을 몸이라 이름 하거니와, 사대가 주인이 없기에 내 이 몸도 나라고 할 것이 없으며, 또 이 병은 나라는 데 고집하므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므로 나라는 고집을 내지 말 것이외다. 이미 병난 근본을 알았을진댄 곧 나라는 생각과 중생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법이란 생각을 일으킬지니다.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할지니, 여러 법이 모이어서 이 몸이 되었으므로, 생기는 것도 법이 생기는 것이요, 없어지는 것도 법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할지니다. 또 이 법은 서로 아는 것이 아니어서, 생길 적에도 내가 생기노라 말하지 아니하고 없어질 적에도 내가 없어지노라 말하지 아니 하나니다.
저 병 있는 보살이 법이란 생각을 없애기 위하여서는 마땅히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니, 이 법이란 생각도 뒤바뀐 것은 큰 걱정이니 반드시 여의어야 하리다.
어떻게 여읠 것인가? 나와 내 것이란 생각을 여의어야 하리다. 어떻게 나와 내 것이란 생각을 여읠 것인가? 두 가지 법을 여의어야 하리다. 어떤 것이 두가지 법을 여의는 것일까? 안의 법과 밖의 법을 생각하지 말고 평등한 행을 할 것이니다. 어떤 것이 평등인가? 나라는 것도 평등하고 열반도 평등하니다. 어찌하여 그러하냐? 나와 열반이 둘다 공한 때문이니다. 어찌하여 공하다 하는가? 이름만 있으므로 공한 것이며, 그리하여 이 두가지 법이 확정한 성품이 없나니다.
병 있는 보살이 일체 법에 다 공한 이치를 통달하여 주관도 객관도 다 공한 경지에 이르러서 평등한 행을 한다. 평등이란 나와 열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 두가지가 다 공하다. 왜 공하다고 하는가? 모두 법의 실상에 이르면 생사를 여의고 열반을 취한다는 내가 공이니 취할 바 열반에 있는 것도 아니다. 나와 열반이란 다만 이름으로 있을 뿐, 그 실상은 취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등함을 얻게 되면 다른 병은 아무 것도 없고 공하다는 병만 있나니, 공하다는 병도 역시 공한 것이니다. 이 병 있는 보살이 받을 것이 없는 것으로 모든 받을 것을 받으며, 불법을 갖추지 못하였거든 받는 것을 없애고 증득을 취하지 않느니다. 설사 몸에 괴로움이 있더라도 나쁜 곳에 있는 중생들을 생각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며, 내가 이미 조복되었거든 마땅히 일체 중생도 조복하되, 그 병만 제할지언정 법은 제하지 말 것이며, 병의 근본을 끊기 위 하여 교화하고 지도할 것이니다.
어떤 것을 병의 근본이라 하느냐? 반연함이 있는 것이니, 반연함이 있으면 병의 근본이 되나니다. 무엇이 반연할 것이냐? 삼계가 그것이며, 어떻게 반연을 끊느냐? 얻을 것이 없어야 하나니, 얻을 것이 없으면 반연이 없어지나이다. 어떤 것이 얻을 것이 없다고 하느냐? 두가지 소견을 여의는 것이며 무엇이 두가지 소견이냐? 안으로 보는 것과 밖으로 보는 것이니, 이것을 여의면 얻을 것이 없어지나이다.
문수사리님, 이것이 병 있는 보살이 마음을 조복하는 것이외다.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끊는 것이 보살의 도리니,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아무리 행을 닦고 번뇌를 다스린다 하여도 지혜의 칼날이 날카롭지 못하나이다. 마치 원수를 이겨야 용맹하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이, 늘고 병들고 죽는 것을 함께 끊는 이라야 보살이라 할 것이외다.
저 병 있는 보살이 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나의 이 병은 참된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중생의 병도 참된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라 할 것이며, 이렇게 관찰할 적에 중생들에게 대하여 애견대비(愛見大悲)를 일으키게 되면 곧 버려야 하나니, 왜냐 하면 보살은 객진(客塵)번뇌를 끊고서 대비심을 일으키는 것이니다.
애견대비는 나고 죽는데 염증이 있는 것이므로, 만일 애견대비를 여의면 고달픈 생각이 없으며, 나는 곳마다 애견대비의 얽힘이 되지 아니하며 나는 곳마다 얽힘이 없어야 중생에게 법문 을 말하여 얽힌 것을 풀어줄 수 있으니, 마치 부처님 말씀에 ‘스스로 얽힘이 있고는 남의 얽힌 것을 풀 수 없거니와 자기에게 얽힌 것이 없고서야 남의 얽힌 것을 풀어줄 수 있다.’하신 것과 같나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얽힘을 일으키지 말지어다.
어떤 것이 얽힘이며, 어떤 것이 풀림인가. 선의 맛에 집착하는 것은 보살의 얽힘이요, 방편으로 나는 것은 보살의 풀림이며, 또 방편이 없는 지혜는 얽힘이요, 방편이 있는 지혜는 풀림이며, 지혜가 없는 방편은 얽힘이요, 지혜가 있는 방편은 풀림이니다.
어찌하여 방편이 없는 지혜를 얽힘이라 하느냐? 보살이 애견하는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면서 공하고 모양이 없고 지음이 없는 법에서 스스로 극복하면, 이것이 방편이 없는 지혜를 얽힘이라는 것이니다.
어찌하여 방편이 있는 지혜를 풀림이라 하느냐? 애견의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거나 중생을 성취시키지 아니하고, 공하고 모양이 없고, 지음이 없는 법에서 스스로 조복하여 싫어하지 아니하면,이것이 방편이 있는 지혜의 풀림이라는 것이니다.
어찌하여 지혜가 없는 방편을 얽힘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탐욕, 성내는 것, 삐뚤은 소견 따위 모든 번뇌에 머물러서, 여러가지 공덕의 씨앗을 심으면, 이것이 지혜없는 방편의 얽힘이라는 것이니다.
어찌하여 지혜가 있는 방편을 풀림이라 하는가? 탐욕, 성내는 것, 삐뚤은 소견 따위 모든 번뇌를 여의고, 여러가지 공덕의 근본씨앗을 심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면 이것이 곧 지혜 있는 방편의 풀림이라는 것이니다.
문수사리여, 저 병 있는 보살이 이렇게 모든 법을 관할 것이니다. 또 이 몸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은 지혜요, 몸은 비록 병이 났으나 항상 생사 중에 있어서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면서 게으른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은 방편이며,
또 이 몸이 병을 여의지 못하고, 병은 몸을 여의지 못하여, 병과 몸이 새 것도 아니고 낡은 것도 아닌 줄을 관하는 것은 지혜요, 설사 이 몸에 병이 있더라도 영원히 열반에 들려 하지 않는 것은 방편이니
문수사리여, 병 있는 보살이 이렇게 마음을 조복할 것이니라. 마음을 조복하는 데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조복하지 않는 데도 머물지 말지니, 어찌하여 그러한가? 마음을 조복하지 않는데 머물면 어리석은 이의 법이요, 마음을 조복하는데 머물면 성문의 법이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조복하는 데도 조복하지 않는 데도 머물지 않아야 하나니, 이 두 가지 법 을 여의는 것이 보살행이니다.
생사에 있으면서도 나쁜 행을 하지 않고, 열반에 머물면서도 멸도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범부의 행도 아니요 성현의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며, 더러운 행도 아니요 깨끗한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며, 비록 마군보다 지나치는 행을 하면서도 마군을 항복받는 것이 보살행이며, 일체 지혜를 구하면서도 때 아닌 적에 구함이 없는 것이 보살행이며,
모든 법이 나지 않는 줄을 관하면서도 정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십이인연을 관하면서도 삿된 소견에 들어가는 것이 보살행이며, 일체 중생을 포섭하면서도 애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멀리 여의기를 좋아하면서도 몸과 마음이 다함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삼계에 다니면서도 법의 성품을 망가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니다.
공한 것을 행하면서도 공덕의 씨앗을 심는 것이 보살행이며, 모양없는 것을 행하면서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하염이 없는 것을 행하면서도 몸을 받는 것이 보살행이며, 일어남이 없는 것을 행하면서도 일체의 착한 행을 일으키는 것이 보살행이며, 육발라밀을 행하면서도 중생의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두루 아는 것이 보살행이며,
육신통을 행하면서도 번뇌를 다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사무량심을 행하면서도 범천에 나는 것을 탐내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행하면서도 선정을 따라서 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사념처를 행하면서도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끝까지 여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사정근을 행하면서도 몸과 마음으로 정진함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사여의족을 행하면서도 자재한 신통을 얻는 것이 보살행이며,
오근을 행하면서도 중생의 여러 근기가 영리하고 노둔함을 분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오력을 행하면서도 부처님의 십력을 구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칠각지를 행하면서도 부처님의 지혜를 분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팔정도를 행하면서도 부처님의 한량없는 부처님 도를 좋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지(止)와 관으로 도를 돕는 법을 행하면서도 끝끝내 적멸한 데 떨어지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모든 법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은 것을 행하면서도 삼십이상과 팔십 종호로 몸을 장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성문과 벽지불의 위의를 나타내면서도 부처님 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온갖 법이 끝내 깨끗한 것을 따르면서도 마땅한 대로 몸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며, 부처님네 국토가 고요하기 허공과 같음을 관하면서도 여러가지 청정한 세계를 나타 내는 것이 보살행이며, 부처님 도를 성취하여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들어 가면서도 보살의 도를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의 행이니다. ”
이런 말을 연설할 때 문수보살이 데리고 온 대중 가운데서 팔천 천인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