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정 (休靜)

<휴정 영정> (1520~1604) 조선 스님. 호는 청허, 자는 현응(玄應), 속성은 최(崔)씨. 안주(安州) 사람. 묘향산에 오래 있었으므로 서산 대사(西山大師)라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아주 목사(牧使)를 따라 서울에 가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같이 배우던 벗 몇 사람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뒤적거리다가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을 얻고, 숭인(崇仁)에게 출가하다. 21세에 영관(靈觀)에게 인가(印可)를 받고, 마을을 지나다가 낮에 닭우는 소리를 듣고는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털은 희었으나 마음은 희어지지 않는 것, 옛날 사람들이 이미 말하였네. 오늘날 닭우는 저소리를 들으니 장부의 할 일이 끝났는가 싶네(髮白心非白 古人曾漏洩 今聞一聲鷄 丈夫能事畢)” 하다. 30세에 선과(禪科)에 급제하여 대선(大選)으로부터 양종 판사(兩宗判事)가 됨. 금강산에 들어가 삼몽사(三夢詞)를 지으니 “주인의 꿈 이야기 손에게 말하고, 손의 꿈이야기 주인에 말하네. 지금 꿈 이야기 하는 그 두 사람도 역시 꿈속의 사람인 줄 누가 아느냐?(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라 하였다. 또 향로봉시(香爐峰詩)에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 집이요, 고금의 호걸들도 하루살이라. 창에 비친 밝은 달 손의 베개에 끝없는 솔바람이 그대로 풍류(萬國都城如蛭蟻 千家豪傑等醯鷄 一窓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齊)”라고 노래하였는데 무업(無業)이란 승려가 이 시를 가지고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와 관련하여 무고하자 체포되었으나, 선조가 그 억울함을 알고 석방하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옮겼을 때에 나아가 뵈오니, 선조 “나라의 난리가 이러하니 그대가 능히 구제하겠는가?” 휴정 “나라 안 승려로서 늙고 약한 이는 절을 지키며 아침 저녁으로 부처님께 기원하고, 젊은 장정들은 신(臣)이 통솔하고 적을 물리치겠나이다”라고 답하다. 그리하여 팔도 십륙종 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제자들로 하여금 각지에서 의승병(義僧兵) 5천명을 모집케 하여, 공을 이루고, 임금을 모셔 서울에 돌아온 뒤 늙음을 핑계로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군중 일을 맡기고 산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 호하다. 금강산 · 두류산 · 묘향산 등지에 왕래하다. 제자 1천여 인, 세상에 알려져 이름 난 제자만 70여 인이 되다. 조선 선조 37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하고, 자기의 영(影)에 “팔십년전거시아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 쓰고 나이 85세, 법랍 67년으로 입적. 저서로는 『선교석(禪敎釋)』 · 『선교결(禪敎訣)』 · 『운수단(雲水壇)』 · 『삼가귀감(三家龜鑑)』 ·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 『선가귀감(禪家龜鑑)』 · 『심법요(心法要)』 · 『제산단의문(諸山壇儀文)』 등이 있다. 묘향산의 석가세존 금골사리 부도 비의 글을 짓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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