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17.문답식

17. 문답식.

“소나여, 어찌 생각하느냐? 색(물질)은 불변하는 것이겠느냐, 변화 하는 것이겠느냐?”

“대덕이시여, 변화하는 것입니다.”

“만약 변화하는 것이라면, 괴로움이겠느냐, 즐거움이겠느냐?”

“대덕이시여, 괴로움입니다.”

“만약 변화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관찰하여 ‘이는 내 것이다. 이는 나다, 이는 나의 본질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덕이시여, 그럴 수는 없습니다.” ([相應部經典] 22:49 輪屢那. 漢譯同本, [雜阿含經] 1:30 輪屢那)

붓다는 매우 자주 문답으로 제자들을 이끌어 갔다. 그런 몇 가지 보기를 앞에서도 든 바가 있거니와, 나는 이 문제와 관련시켜 붓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볼까 생각한다. 왜냐 하면 이런 문답에는 지혜의 스승으로 붓다의 면목이 참으로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 점에서 붓다와 예수 그리스도는 재미있는 대조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예수는 별로 문답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신념으로서 지니고 있는 것을 그대로 상대에게 쏟아 놓아 “저것이냐 이것이냐.”의 선택을 사람들에게 바리새인과의 문답 같은 것도 전하고는 있으나, 그런 때에도 예수는 역시 의연한 자세로 자기의 소신 그대로를 가지고 대답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에 비하여 붓다는 매우 자주 문답을 설법 방식으로 썼을 뿐 아니라, 그 문답도 대개의 경우는 꽤 긴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런 문답을 통해 붓다는 차차 상대를 인도하여 스스로 어떤 결론에 이르게 하곤 하였다. 앞에 나왔던 문답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가령 바차라는 외도가 열반에 관해 빗나간 질문을 했을 때, 붓다는 불을 비유로 들어 문답을 거듭하는 중에 어느 덧 열반의 개념에까지 이끌어 들였던 것이다. 또 어떤 비구가 맹렬한 수도 생활을 계속하는데도 목적을 실현하지 못해서 비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붓다는 그를 찾아가서 거문고를 비유로 들어 문답을 시작했다. 재가 시절 거문고를 잘 뜯었다는 그 비구는 거문고와 관계되는 일에 대해 붓다가 묻는 것에 대답해 가다

가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중도(中道)의 이념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문답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왜 그런지 소크라테스 생각이 들곤 한다. 하기야 붓다와 소크라테스를 나란히 세워 놓고 볼 때,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유사한 점이 발견되는 것 같다. 두 사람 다 믿는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생각하는 사람이었음이 확실하다. 유럽의 사상가들은 흔히 소크라테스를 ‘인류의 스승’이라고 하지만, 그런 칭호는 그대로 붓다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도 또한 가르치고 이해시키고 신념을 생기게 하고, 또 실천을 하게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스승이었던 까닭에 소크라테스처럼 붓다도 그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자주 문답 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런 문답에 대해 우리는 몇 가지 실례를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약간 특수한 문답을 보기로 들어 놓았다. 이 장(章)의 첫머리에 소개한 것이 그것이다.

이 문답의 상대는 앞서 거문고의 비유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소나 이거니와, 붓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은 그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상응부 경전]이나 한역의 [잡아함경]을 조사해 보면, 몇 십 회에 걸쳐 같은 양식의 문답이 붓다와 제자들 사이에서 되풀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붓다는 같은 문답 양식을 자주 제자들에게 적용시켰는데, 그럼으로써 일종의 ‘교리 문답’이 성립되었던 것 같다.

그 문답식은 얼른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무상 – 고 – 무아로 연결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붓다는 어떤 때에는 설법에 곁들여 그 자리에 있는 비구에게 그것을 시험해 본 적도 있다. 또 어떤 때에는 이제부터 좌선하기 위해 산중으로 들어가려는 비구에게 그런 질문을 하여 대답을 하게 한 일도 있다. 그 제재(題材)는 때로 오온(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이기도 했다. 즉 색(물질, 육체). 수(감각), 상(표상), 행(의지), 식(의식)에 관한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육처(감각 기관)를 다루기도 했다.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과 그 대상에 관한 문제였다. 이런 것을 소재로 하여 이를테면 네 눈은 영원한 것이냐 무상한 것이냐고 물었으며, 또 네 눈의 대상은 영원한 것이냐 무상한 것이냐고 따졌던 것이다. 또 앞에 인용한 문답같이 네 색(육체)은 영원이냐 무상이냐라고 묻기도 했다. 그런 붓다의 질문에 대해 경이 전하는 한에서는 어느 비구나 다 거기에 알맞은 대답을 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물음에는 누구라도 그렇게밖에는 대답할 수 없기도 했겠지만, 이 무상 – 고 – 무아로 연결되는 사고방식은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인 성격이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것을 고쳐 생각해 보면 붓다는 그 제자들이 이런 기본적인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문답을 통해 끊임없이 시험해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후세의 불교인들이 주장한 ‘삼법인(三法印)’또는 ‘사법인’이다. 법인(dharma-uddana)이란 바른 법의 표라는 정도의 뜻이어서, 불교가 그 밖의 종교나 사상과는 다른 중요한 특징을 섭송(攝頌), 즉 짧은 운문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제 그것을 한역에 의해 표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

2) 제법무아(諸法無我)

3) 열반적정(涅槃寂靜)

이것이 이른바 삼법인이다. 여기에 다시

4) 일체개고(一切皆苦)

를 추가해서 사법인이라고 일컫는 수도 있다. 후세에서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불교의 사상적 성격을 설명하는 경우, 흔히 이 삼법인이나 사법인을 들었다. 따라서 오늘날 불교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이에 대해 들은바가 있을 터이며, 그렇게 유명해진 만큼 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으로 나타난 불교 파악은 아주 요령 있는 것이라고 할만하다.

먼저 제행무상이란 불교가 내세우는 존재론이다. 물론 그 밑받침이 된 것은 앞에서 설명한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일체의 존재는 서로 어떤 의존 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조건의 결부에 의해 생겨났고, 그 조건이 없어지는 데 따라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설인바,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 제행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제법 무아란 불교가 주장하는 인간론으로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제 1 명제인 무상관이다. 일체가 무상하다면 영원불변하는 자아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제행무상’의 존재론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 또한 무상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 이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셋째 명제인 열반적정은 불교가 이상적인 경지라고 여기는 열반을 가리킨다. 이것을 목적론 또는 행복론이라고 하여도 되리라.

그런데 이 삼법인에는 붓다가 그처럼 역설했던 고(苦)에 대한 주장이 빠져 있다. 즉 이 인생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하는 소견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 개고의 명제를 세워, 이것을 삼법인에 추가하면 사법인이 되는 것이다.

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개념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후대의 불교인들에 의해 다른 종교에 대한 불교의 특징을 해명하고자 해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붓다 자신은 불교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추측하건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앞의 문답에서 사용되었던 무상 – 고 – 무아의 계열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이제까지 별로 지적하는 학자가 없었던 듯하지만, 나는 목소리를 높여 이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이 무상 – 고 – 무아의 계열과 앞에서 설명한 사제의 체계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제의 체계란 붓다가 그 가르침의 뼈대가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자주 제자들에게 역설한 바 있는 가르침이다. 사실이 또 그러해서 이것을 알고 이것만 실천한다면, 붓다의 제자로서 뜻한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그 밖의 것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번거롭게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제법은 어디까지나 실천의 체계이므로, 적어도 그 표면에는 붓다의 존재론이나 인간론은 나타나 있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것들은 그 체계의 밑바닥에 깔려있을 뿐이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 체계로서가 아니라 사상의 체계로 나타낸다면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되는바, 그것이 무상 – 고 – 무아의 사상 계열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 제 1 항목은 존재에 대한 해석이요, 제 2 항목은 인생을 해석한 결론이다. 그리고 셋째 것은 인간 해석에 대한 붓다의 주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후세 불교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주장은 이런 붓다의 사상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붓다가 제자들을 상대로 문답한 이 내용은 불교의 기본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붓다의 문답에 또 하나 재미있게 생각되는 것은 붓다가 이런 문답식을 자주 응용문제의 형태로 비구들에게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어느 경([상응부 경전] 22:151 아)은 이런 문답을 전해주고 있다.

“비구들아,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무엇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내가 있다는 생각)은 일어나겠느냐?”

현명한 독자는 곧 이해하실 줄 믿거니와, 이 질문은 무상 – 고 – 무아의 문답식을 거꾸로 하여 대답해야 될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저 문답식에서는 거침없이 대답하던 비구들도 이 응용문제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못했던 것 같다. 이 밖에도 비슷한 질문의 보기가 몇 가지 나와 있으나, 거기서도 그들은 대답이 막혀 붓다의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였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우리 법의 근본이시며, 우리 법의 안목이십니다. 원컨대 우리를 위하여 그를 설하시옵소서.”

이것이 답변에 막힌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청할 때에 말하는 유형화된 표현이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그 청에 따라 해답을 설해 주었다.

“비구들아, 색(물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색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색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은 일어나느니라. 또 수(감각)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상(표상)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행(의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식(의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에 집착하고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은 일어난다고 알아야 되느니라.”

이렇게 설한 붓다는 다시 한 번 그 문답식으로 돌아가서 비구들에게 묻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색은 영원하겠느냐, 무상 하겠느냐?”

“대덕이시여, 무상하나이다.”

이리해서 앞에 인용한 것과 같은 문답식이 반복되어 갔다. 이 문답식이 되면 제자들은 막히는 일이 없이 아주 잘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 이 문답식을 평소에 배워 익히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런 문답식 교육은 이 문제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사제’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잘 외고 있어서, 붓다가 물을 때에는 언제나 “이는 고(苦)이다.”, “이는 고의 발생이다.”, “이는 고의 멸진이다.”,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런 문답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한 학자가 없는 듯하다. 주의해서 잘 읽어 보면 지혜의 스승으로서의 붓다의 진면목은 이런 곳에 도리어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듯하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