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불방일(不放逸).
“비구들이여, 밤하늘에서 온갖 별들은 빛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달빛의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기에 달빛은 밤하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진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건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기에 온갖 착한 법 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또 가을 하늘에 한 점의 구름도 없을 때, 해는 하늘에 떠올라 일체의 어둠을 쓸어버리고 눈부시게 시방(十方 ; 동서남북과 동북, 동남, 서북, 서남, 상, 하)에 빛을 던지지 않느냐? 그러기에 가을 하늘에서 해는 가장 위대하다고 일컬어진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여러 가지 길이 있건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온갖 착한 법 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相應部經典] 45:146 月. 147 日)
불방일(appamada)이라는 말은 아직 우리말로서는 익숙해져 있지 못하다. 정진(viriya)이라고 하면 다 알지만, 그것과는 얼마쯤 뉘앙스가 다르다. 오래 된 경전의 말씀에도 “방일하게 놀았거늘”이라는 표현이 있거니와, 자기를 잊고 자제함이 없이 온갖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 그것이 방일이다. 그러므로 불방일이란 그런 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는 자제와 집중과 지속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가 설하신 대로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이미 내심의 어지러움이 없는 자유롭고 편안한 경지에 이르는 것, 그것이 붓다의 가르침이요, 또 붓다가 수범하신 길이려니와, 그것을 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곧은 길 설하심을 듣자온 바엔
그 길 가고 물러섬이 없어야 하리.
제가 저를 나날이 채찍질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를지로다.
제자들의 게(운문)를 모은 [장로게경]에도 이런 노래가 보인다. 앞에도 나온 바 있는 ‘소나’라는 비구가 읊은 것이 이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수행을 감행하여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실현되지 않아서 걱정과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 때 붓다가 거문고 줄의 비유로 그를 타일렀기에, 그는 그 가르침에 의해 차츰 도를 즐길 수 있게 되어 마침내는 열반의 경계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더 비참한 이야기는 [상응부 경전](4:23 구저가. 한역 동본, [잡아함경] 39:11 구저가)에 실려 있는 고티카(瞿低迦)의 경우리라. 그는 라자가하 근처에 있는 어느 바위굴에 있으면서 열심히 수행한 결과 몇 번인가 해탈의 심경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런 경지는 지속되지 못하고 그때마다 원상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런 일을 되풀이하기 여섯 번에 이르러 그는 마침내 칼을 들어 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경의 서술은 참으로 비통한 기분에 넘쳐 있어서, 오늘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족하다. 그러면 대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퇴전(退轉)해야 하는 것일까?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뿌리만 안 상하여 든든하다면
나무는 베어져도 다시 생기며,
애욕을 뿌리째 끊지 않으면
또 다시 되풀이해 고(苦)는 생기리.
나는 이제 고디카의 보기를 들었거니와, 그런 극단적인 경우를 들어서 이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리 적당한 일은 아닐 터이다. 극단으로 달려서는 사태를 도리어 그르친다는 것이 원래 불교의 입장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문제를 더 정상적인 경우로 되돌려 놓고 생각할 때, 후세의 불교인들이 ‘아비발치(avaivartika, avinivartanlya)’라고 이른 것이 그것이며, 또 ‘돈(頓)’이니 ‘점(漸)’이니 논한 것이 그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아비발치’라고 하면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하실 분도 많이 있으려니와, 이를테면 신란(親鸞)이 한번 믿음을 일으켜서 염불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 사람은 열반이 약속된 이로서 불퇴(不退)의 자리에 드는 것이라고 한 그것이 바로 ‘아비발치’이다. 이것은 물론 범어의 음사요, 의역하면 ‘불퇴’ 또는 ‘불퇴전’이 된다. 불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기까지 오면 절대로 타락할 염려가 없다는 경지, 그것이 아비발치요, 불퇴의 자리요, 불퇴전지(地)이다.
대체 그러면 사람은 어디까지 가야 다시는 전락의 가능성으로부터 모면되는 것일까? 후세의 불교인들은 이것을 놓고 저마다 논한 바 있었지만, 각설이 분분해서 하나의 정론이 나오지는 못했다. 이런 사실을 뒤집어 놓고 보면 불교인마다 얼마나 불퇴전의 경지를 열망하였던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보아도 그런 경지란 발견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 오르든 간에 고디카처럼 누구나 전락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그 대답은 일단 “그렇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 전락을 막는 오직 하나의 보장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불방일이다. 그러기에 붓다는 자주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불방일한 비구라면 팔정도를 배워 익히고, 팔정도를 잘 닦아 갈 것임에 틀림없다.”
불방일하기만 하면 그 비구는 반드시 팔정도를 익히고, 그것을 반복하여 닦는 중에 마침내는 열반에 도달하리라는 것이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비구들이여, 온갖 착한 법은 모두 불방일을 근본으로 하고, 다 불방일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불방일을 모든 착한 법 중에서 최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팔정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선이 모두 이 불방일로 근본을 삼고 불방일에 의해 성립되고 있는 것이니까, 나는 온갖 선중에서 불방일만이 최상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겠다. 그리하여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말씀은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밤하늘의 달과 가을 하늘의 해에 비유하여 힘을
주어 설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불방일을 중시하는 붓다의 입장을 이해한 이 마당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후대의 불교인들이 즐겨 쓴 말이거니와, 그들은 불교의 여러 가르침을 개괄하여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로 구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서 돈기(頓機)와 점기(漸機)의 설을 세우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근기(根機, 소질)는 갖가지이니까 가르침을 듣고 대번에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일에 걸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다음에야 겨우 깨닫는 사람도 있다. 그 전자를 돈기라 하고 후자를 점기라 하는데, 어느 쪽이 좋으냐 하면 물론 돈기가 뛰어나고 점기는 그만 못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또 가르침 자체에도 그런 구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같은 붓다의 가르침에도 속히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점차적으로 궁극의 경지를 향해 끌어올리는 것도 있다. 이 중에서 전자가 돈교, 후자가 점교인바, 여기서도 돈교가 뛰어난 가르침이고, 점교는 그만 못한 것이라는 것이 후세 불교인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물론 이런 구분은 대승 불교의 경전까지도 다 붓다가 친히 설한 것이라고 본 데서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경전을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들어가는 우리로서는 진실한 붓다의 가르침이란 [아함경] 이외에는 없다고 보기에 이런 주장에 선뜻 동조하고 나서기가 어렵다. 그러면 붓다는 이중에서 어느 범주에 속했을까 하고 생각할 때, 아무래도 점교의 부류에 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불방일로 근본을 삼은 바에야 그것을 돈교속에 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경 ([중부 경전] 107 산수가목건련경. 한역 동본, [중아함경] 144산수목건련경)에 의하면, 붓다는 일찍이 사바티(舍衛城)의 교외인 이른바 동원 정사(東園精舍)에 있을 때, 한 수학자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이름은 못가라나(目健連)라고 하였다.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마하 못가라나(大目健連)와 구별키 위해 이 경에서는 ‘산수가 못가라나’라고 불렀다.
이 수학자가 붓다를 찾아와서 먼저 물은 것은 불교에도 순서를 좇아 배워야 할 길이 있느냐는 문제였다.
“대덕이시여, 제가 이 정사까지 오는데도 거쳐야 할 길이 있으며, 또 저의 전문인 수학도 차례를 좇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존의 가르치심에도 또한 밟아야 하는 순서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학자다운 질문이라고 할 것이다. 붓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붓다가 설명한 것은 꽤 길거니와,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먼저 계(戒)를 지킬 것, 그리고 오근(눈, 귀, 코, 혀, 피부)을 제어 할 것, 다음에 또 정념(正念), 정지(正知)를 성취하여 지혜로써 번뇌를 누리고 온갖 집착과 불선을 떠나 점차 무상 안온의 경지인 열반에 들어갈 것. 그것은 명백히 점진적으로 도를 성취해 가라는 가르침이었다.
곁들여 말한다면 그 수학자가 이어서 물은 것은 그런 가르침에 의해 지도되는 제자들은 누구나 열반에 이르게 되느냐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붓다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또 어째서입니까? 엄연히 열반이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으며, 또 세존께서 스승이 되어 계신데, 어떠한 이유로 이르는 사람이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붓다가 잘하는 반문이 시작되었다.
“그러면 벗이여, 그대에게 라자가하에 이르는 길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하자. 그대는 아마도 그들을 위해 자세히 길을 일러주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사히 라자가하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헤매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 그렇겠는가?”
“대덕이시여, 저는 길을 가르쳐 줄 따름입니다. 그것을 제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벗이여, 그대의 말대로 열반은 엄연히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내가 스승 노릇을 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제자 중에는 열반에 이르는 사람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 것을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이에 불과한 것이다.”
아마도 이 마지막 말씀 같은 것은 좀 차갑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놓고 보면, 여기에는 붓다의 진면목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서 불교 자체의 본질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겠다.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이”라는 말씀을 뒤집어 놓고 볼 때, 붓다는 결코 전지전능의 구제자가 아님이 명백하다. 또 신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중개자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을 고백하고 이 사람(붓다)만 예배하면 그것으로 구원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붓다의 진면목은 스스로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고 정도를 실천하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너희도 이렇게 인식하고 이렇게 실천하여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라고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붓다의 진면목은 도사(導師)인 점에 즉 지혜와 실천의 선구자요 안내자인 데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결국 그 지혜와 실천에 대한 책임은 붓다가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눈을 떠서 존재의 진상을 보는 것은 그들 자신이어야 하며, 마음을 다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도 그들 자신이어야 한다. 일찍이 붓다는 성구(聖句)를 외는 사람을 비판하여 “남의 소를 세는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자기 자신이 지혜의 눈을 뜨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 만년의 붓다는 자주 다음과 같이 설하여 제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너희는 이에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며, 또 법(진리)을 섬으로 삼고법을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
여기서 섬(dlpa)이라고 한 것은 강의 한가운데 또는 바다의 섬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모든 것이 유전(流轉)하는 한가운데에서 의지할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요지는 확고한 의지처란 자기 자신과 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법에 의해 제어되는 자기, 그것밖에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것에 대해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뿐이니
저 밖에 또 무엇을 의지하리오.
자기가 잘 조어되는 때
얻기 힘든 의지처를 얻으리로다.
불교란 본래가 이런 가르침이다. 이것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나타낸다면 붓다가 설하신 것은 결국 자기 형성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형성의 길에는 이것이면 그만이라는 따위의 한계는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자제와 집중과 지속을 가지고 일생 동안 걸어가야 하는 것뿐이다. 저 사라쌍수 밑에 누워 장차 크나큰 죽음(대반열반)에 들려던 붓다가 그 제자들에게 남기신 최후의 말씀은 [대반열반경] 속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그러면 비구들아, 나는 너희에게 이르리라. 모든 것은 변화하느니라. 불방일하여 정진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