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 근대 이후의 불교
근대 이후의 불교 1. 개화기의 불교 개항 이후 불교계의 변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을 계기로 조선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후 사회 전반에 불어 닥친 변화의 물결에서 불교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산중에 머물러 있던 불교는 이제 급변하는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위상을 세워야만 했다.
개항과 함께 나타난 종교상의 새로운 변화는 서구 종교가 포교의 자유를 획득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펴면서 종교경쟁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일본의 신도(神道)와 불교가 국내 포교를 시작했다는 것도 큰 변화였다.
일본불교의 활동은 이 시기 조선의 불교계에 위협적인 것임에 분명했지만 한편으로는 큰 자극과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근대화된 일본불교의 포교와 교육활동은 이후 조선불교의 개혁을 위한 전범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동인(李東仁)과 탁몽성(卓夢聖) 같은 개화 승려들이 출현했다는 것도 지나칠 수 없다.
이들은 유대치, 오경석,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조선의 개화운동을 이끌었는데 이들은 신촌 봉원사를 근거로 자주 모여 불교공부도 하고 개화 서적을 돌려 보며 조선의 개혁을 도모하였다.
이를 세간에서는 개화당이라 하였는데 이 개화당에 참여한 청년 선비들은 대체로 젊은 관료들로 중인 신분의 유대치, 오경석 거사의 지도를 받아 유교가 조선의 쇠망 원인 중 하나라 보고 불교의 참선에 심취하여 수행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청년 거사들의 결사조직인 개화당은 갑신년에 우정총국 준공 기념일을 기해 정변을 일으켜 ‘삼일천하’를 이루나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결국 결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무렵 조선불교계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은 1895년 3월 29일에 고종의 명으로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것이다.
물론 1895년 이후로도 승려의 도성출입은 금지와 허가가 반복되기는 하였지만 이 때의 도성출입금지 해제조치가 상징하는 바는 매우 컸다.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는 조선시대 이래의 억불정책의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산중에 머물러 있던 불교가 그 활동 범위를 도성 내로 확대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신행결사와 선의 중흥 19세기 후반 불교계는 근대를 향한 일대 변혁의 시기를 맞고 있었지만 그 내부에서는 불교의 존립과 전통적 신앙수행의 유지, 발전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한 흐름으로 주목할 수 있는 것이 사찰계(寺刹契)와 신행결사, 선(禪)의 중흥 노력 등이다.
사찰계와 신행결사는 조선 초기부터 있었지만 이 시기에 특히 성행하였다.
이는 개별 사찰과 불교신앙을 유지, 보존하기 위한 경제활동이 활발해졌으며, 당시 불교조직과 신앙이 대중적 형태로 파고들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찰계와 신행결사는 어려운 사찰의 재정을 지원하여 가람을 중수하고 사찰 전답을 늘리는 데 힘을 보탰으며 공동체적 신앙활동을 유지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그 중에서도 염불계ㆍ미타계ㆍ관음계ㆍ지장계 등이 신앙활동과 결합하여 특히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결사활동으로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이다.
만일염불회는 만일, 즉 28년 동안 염불ㆍ독송하는 대중적 결사이다.
1940년대까지 염불회의 명맥을 유지했던 건봉사는 물론 신계사, 유점사, 화계사, 흥국사 등에서 만일염불회가 열렸다.
이러한 염불결사는 염불을 통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수행으로서 신분을 뛰어넘어 누구나 자유롭게 신앙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허(鏡虛)와 용성(龍城)과 같은 대선사가 등장하여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것도 이 시기였다.
경허는 1899년 해인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시작한 이래 1903년까지 통도사, 범어사, 화엄사, 송광사 등의 선원을 복원하고 선 수행을 이끌었다.
그는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어 많은 승려들이 서울 구경을 나설 때도 일평생 도성출입을 하지 않고 산중에서 선풍을 진작하겠다고 다짐하는 등 선사로서의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경허는 해인사에서 수선결사를 맺어 당시 침체된 수행 종풍을 재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근대 한국 선풍의 중흥자라 평가하기도 한다.
용성 역시 1886년 이후 전국 오지에 선원을 창설하여 이끌었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역시 의정부 망월사 선원에서 결사를 하여 선풍을 일으키려 노력하였다.
용성은 특히 수행과 동시에 교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역경 불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많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대중들에게 보급하였고, 찬불가도 지어 포교에 활용하였다.
아울러 만해와의 교분으로 3?운동에도 33인의 한 사람으로 동참하였다.
경허와 용성, 그리고 그 제자들은 조선의 선을 중흥시키고 식민지시대에 들어서도 우리 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원흥사의 창건과 원종ㆍ임제종의 대립 대한제국의 성립 이후 정부는 새로운 불교정책을 시행했다.
즉 불교를 총괄하는 관리서와 승정제도를 마련했던 것이다.
1902년 1월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가 창건되고, 총섭(總攝)이 파견되었으며, 도섭리(都攝理), 내산섭리(內山攝理) 등의 승직이 설치되었다.
같은 해 4월 궁내부의 칙령에 의해 사찰의 관리를 담당하는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설립되고, 이어 사사관리서의 시행 규칙인 ‘국내사찰시행규칙’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원흥사는 대법산(大法山)이 되었고, 전국의 주요 사찰은 중법산(中法山)으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불교정책의 일대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원흥사의 창건과 전국 주요 사찰의 중법산 지정, 승직제도의 부활 등은 정부가 불교를 새로운 틀로 재편하여 직접 관리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관리체제는 일본의 간섭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행정이 혼란에 빠지면서 오래가지 못하고 2년 만에 관리서가 폐지되었다.
일본불교의 활동에 자극받은 일부 승려들은 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1906년에 불교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원흥사에 본부를 두고 각 사찰에 지부를 설치한 불교연구회는 홍월초(洪月初), 이보담(李寶潭) 등이 중심이 되었지만, 그 활동은 일본불교 정토종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불교연구회의 활동 중 두드러진 것이 명진학교(明進學校)의 설립이다.
명진학교는 각 사찰에서 청년 승려를 모집하여 불교뿐만 아니라 신학문을 교육시켰다.
지금의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바로 명진학교인데, 한국불교 최초의 근대적인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명진학교가 중앙에 설치된 이후 전국 각 사찰에는 그 예비 학교인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자 60여 명이 원흥사에 모여 총회를 열어 원종(圓宗)을 창립하고 이회광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원종은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종단이 강제 폐지된 이래 처음으로 종단을 재건한 것이다.
원종은 조선불교계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자임하고 도성 안에 사찰건립을 추진하여 1910년 종로 전동(지금의 수송동)에 각황사를 창건하였다.
이것은 조선조 사찰 억불정책 이후 4대문 안 첫 사찰 창건이었다.
각황사는 조선불교도의 염원을 모아 전국 불자들의 모금으로 창건되었다.
1910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지자 이회광은 불교의 발전을 위해 일본불교 종파의 힘을 빌릴 의도로 일본에 건너가 조동종과 연합 맹약을 체결하였는데, 뜻있는 조선불교도들은 이를 매종(賣宗) 행위라 규탄하며 크게 반발하였다.
당시 이러한 원종-조동종 맹약을 비판하는 세력은 박한영, 진진응, 한용운 등으로 주로 영호남 선원과 강원을 기반으로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 규탄의 여론이 비등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선불교의 법맥은 임제종으로 조동종과는 종지가 다르다고 비판하며 원종과 별도로 임제종을 창립하였다.
이 임제종에 동참한 사찰은 송광사, 선암사, 범어사 등 영호남의 주요 사찰들로, 경허가 유력하며 선풍을 불러일으킨 사찰이 그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원종과 임제종은 동시에 서로 경쟁하며 발전하였는데, 원종은 주로 한수 이북, 즉 금강산 일대 건봉사, 유점사 등을 기반으로 하였고 한수이남, 즉 범어사, 통도사, 송광사 등은 임제종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12년에 원종과 임제종 대표를 불러 두 종단의 간판을 강압적으로 내리게 탄압하여 결국 원종과 임제종은 간판을 내려야 했다.
개화기에 도성출입금지 해제를 계기로 산중에서 도시로 다시 진출한 불교계는 근대에 다시 원종과 임제종이라는 종단을 자주적으로 재건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다시 해체당하고 말았다.
2. 일제 강점기의 조선불교계 사찰령과 본산제 1910년 일본 제국의 강점 이후 불교계를 비롯한 모든 종교계는 일본의 정책에 의해 극심한 제약을 받았다.
특히 일본이 불교에 대한 통제책으로 내세운 것은 1911년 반포된 사찰령과 그 시행규칙이다.
전문 7개조로 이루어진 사찰령과 전문 8조의 시행규칙은 한국불교의 체제를 철저히 일본의 지배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사찰령과 시행규칙에는 사찰을 병합, 이전하거나 폐지하고자 할 때에는 총독의 허가를 얻도록 명시하였고, 전국의 사찰을 30개의 본사(本寺)와 말사(末寺)로 재편하는 규정을 담고 있었다.
또한 본사와 말사의 경우에, 본사 주지는 총독, 말사 주지는 도장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규정과 각 본사는 사법(寺法)을 제정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등의 규정이 명시되었다.
그 결과, 법통(法統)의 전승이 중시되어야 할 본말사(本末寺)의 관계가 행정적인 조직이 되었고, 사찰의 주지는 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관료와 다를 바 없는 위치가 되었다.
또한 전국 사찰을 30개의 본산을 중심으로 나누어 통치함으로써 불교계 전체의 단합적 활동이나 협력을 억제하고 본사 주지에게 사찰운영의 권한을 집중시켰다.
이와 같은 본말사 제도는 1920년에 화엄사가 본산으로 추가되어 31본산 체제로서 확립되었고, 일본의 패망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불교정책은 한국불교의 행정체계를 총독부에 종속시키고 승려의 세속화를 권장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크게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불교개혁론의 제창 일본의 지배 아래 한국불교의 전통과 발전 방향이 크게 왜곡되어 가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불교계의 자각과 개혁을 부르짖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먼저, 백용성은 1910년 『귀원정종(歸源正宗)』을 통해 기독교의 활발한 포교활동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불교의 상황을 꼬집고 적극적으로 포교에 나설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 발표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사회 진화론적 인식에 기초를 두고 불교의 평등주의, 구세주의에 개혁의 이상을 설정하였다.
한용운은 구체적인 개혁방안도 제시했는데, 승려 교육의 진흥, 참선법의 개정, 염불당의 폐지, 의식의 간소화 등을 통해서 불교의 본질을 회복하자고 역설했다.
또한 사원을 도시로 옮기고, 승려의 취처를 허용하여 교세를 확장시키고, 승려의 단결을 촉구하면서 교단 통일기관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개혁안들은 일본불교의 영향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보여 주고 있지만, 침체에 빠진 조선불교를 개혁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개혁론은 불교청년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이론적 논거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불교계의 항일 운동 불교계의 항일 운동은 1919년 3ㆍ1 운동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지금까지 불교계의 항일은 3ㆍ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인인 한용운, 백용성을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불교계의 3ㆍ1 운동은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표충사, 석왕사, 봉선사, 건봉사 등 전국 주요 사찰이 광범하게 동참하였고, 청년 승려들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한용운이 3ㆍ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하고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만해 한용운은 불교계에 독립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중앙학림(오늘날의 동국대학교)의 학승들을 대대적으로 조직하여 전국 사찰로 독립 선언서의 배포와 만세운동의 확산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3ㆍ1 운동 당일 중앙학림의 학승들 거의 전원이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에 동참하였고 가두시위를 하였다.
이윽고 만해의 지시를 받은 학승들은 연고 사찰로 흩어져 전국 주요 사찰 승려들의 만세운동 동참을 이끌어 냈다.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건봉사, 봉선사 등 주요 사찰들은 강원 학승들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전국 방방곡곡이 민족적 자존심을 되새기는 데 기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승려들이 투옥되어 수형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시적인 만세운동의 동참에서 나아가 조직적으로 항일 운동에 동참한 승려들도 많았다.
상해 임시정부 이전에 13대 대표자 회의가 인천 월미도에 열려 한성 임시정부의 창립을 선언하였는데, 여기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박한영, 이종욱이 참여하였다.
특히 이종욱은 월정사 승려로 3ㆍ1 운동 당시 시위에 동참하였고, 곧이어 27구국 결사대에 행동대원으로 동참하였다.
이후 이종욱은 김법린, 김상호, 백성욱, 신상완, 김상헌, 송세호, 백초월, 정남용, 이석윤 등 많은 승려들과 협의하여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승려 신분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전국 지리에 밝아 주로 산중 사찰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의 조직과 재정후원사업에 동참하였다.
특히 이종욱의 활약은 주목할 만하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부 국내 특파원과 참사, 그리고 의정원(오늘날의 국회) 의원이 되었고, 임정의 국내 행정조직인 ‘연통제’의 국내 총책 소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종욱은 국내 특파원으로 들어와 청년 승려들을 독려하여 전국 사찰의 재정모금을 꾀하였고, 주요 사찰을 기반으로 연통제의 확산과 의승군 조직을 도모하였다.
의승군은 임진왜란 당시 의승들의 전통을 되살리는 시도였으나 중도에 탄로가 나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들은 1920년에 「승려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불교계 주요 고승 1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상해와 프랑스 파리까지 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교계의 이러한 항일 운동은 일제의 간교한 탄압으로 대부분 구속되어 와해되어 갔으며, 일부 청년 승려들은 청년회를 조직하여 사찰령 철폐운동을 벌여 나가기도 하였다.
3ㆍ1 운동 이후에 일본의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현실을 자각하고 비판을 가하던 청년 승려들은 대체로 전통적 강원이나 선방을 거치지 않고 중앙학림 등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근대적 학문을 익힌 경우가 많았으며, 전통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불교청년운동의 조직으로는 1920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 1921년에 창립된 불교유신회, 1922년에 창립된 조선여자불교청년회 등을 들 수 있다.
청년들은 정교 분리라든지, 사찰령의 철폐, 주지의 전횡 반대 등을 주장하며 교단의 자율적 운영과 발전을 꾀했다.
하지만 점차로 침체되어 가던 불교청년운동은 1928년에 조선불교청년회로 재기하였고, 1929년 1월에 개최되었던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중앙종회의 구성과 종헌의 제정을 이루어 내기도 했다.
선학원과 전통불교의 수호 일제의 강압적인 불교정책과 주지들의 세속화 경향, 근대적인 불교개혁이 교단의 풍토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전통불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선방 수좌들의 입지는 점차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선학원(禪學院)은 그러한 수좌들의 자구책으로서 전통 선의 보존과 중흥을 위해 설립되었다.
선학원은 1920년에 남전(南泉), 도봉(道峯), 석두(石頭) 등의 수좌들이 중앙에 대표적인 선원을 만들자고 결의하여, 용성, 만공(滿空), 성월(惺月) 등의 협의를 거쳐서 1921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선학원은 창설 목적으로서 전통 선을 발전시켜 불조의 정맥을 계승하고 교리연구와 정법포교를 통하여 불법을 널리 선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선학원은 1922년 3월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창설하여 전국 선원과 청정 비구들을 회원으로 설정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점차 세속화되어 가는 주지들에게 배척받는 수좌들의 상황은 어려워져만 갔다.
선학원은 1924년에 자금난으로 인해서 활동을 중단하고, 1926년 5월에는 범어사 포교소로 전환하는 등의 곡절을 겪다가, 1931년 1월에 침체에 빠진 선학원을 적음(寂音)이 인수하면서 중흥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적음은 침술로서 재정을 마련하여 선학원을 살려낸 뒤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수좌들을 모아서 참선에 전념케 하고 용운, 만공, 용성 등이 대중법회를 열기도 하였으며, 「선원(禪苑)」을 창간하여 선의 대중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이후 선학원은 1934년 12월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으로 개편하고 그 위상을 더욱 안정화시켰다.
1941년,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는 청정 비구승 40여 명이 모인 대규모 법회였다.
이 법회는 일제 말 점차 희미해져 가는 선종의 전통을 확인하고 승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행사였다.
선학원 이외에도 일본의 불교정책과 일본불교에 맞서서 전통불교를 수호하고 정체성을 지키려는 여러 움직임이 있었다.
1925년 용성이 망월사에서 주도한 ‘만일선회결사(萬日禪會結社)’라는 참선결사를 비롯하여, 1926년 용성이 주축이 되어 100여 명의 승려가 함께 ‘대처 식육’을 반대하는 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한 것도 전통적 수행풍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해방 이후 정화운동 과정에서 선승들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명분을 갖게 한 큰 밑거름이 되었다.
3. 불교계의 위상 정립과 총본산 건립 교육과 포교 활동 불교의 중흥을 위한 전제로서 중시되었던 것은 청년 인재의 양성이었다.
교계 지도급 인사들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불교계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일반 학문에 대한 연구와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수립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1906년에 설립된 명진학교는 1910년 통감부의 사립학교령에 의해 불교사범학교로 개편되었다.
그 후 불교사범학교는 1914년에 30본산의 주지들의 결의에 따라 불교고등강숙(佛敎高等講塾)으로, 1915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으로 개편되었고, 지방에는 중앙학림 바로 전 단계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지방학림(地方學林)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과정의 보통학교,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 전문학교 과정의 중앙학림으로 이어지는 근대 승가교육체계가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근대적 교육이 선호되고 있던 가운데 지방학림의 성장으로 전통 강원은 점차 세력을 잃어 가는 듯했으나,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통 강원을 부활시키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근대 학문을 익힌 자들이 보여 준 세속화 경향, 근대 학문의 실효성에 대한 의심 등으로 인해서 근대 교육제도에 대한 전반적 회의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5년에 대강백 진하(震河)의 입적을 계기로 대강백의 육성을 위해서는 전문 강원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크게 작용하여 해인사, 범어사, 개운사 등에 전문 강원이 복원되었고, 이후 건봉사, 유점사, 통도사 등 전국 각지의 강원이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학술 분야에서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불교에 대한 역사적 시각의 연구가 나타난 것이다.
1910년대 발표된 권상로의 『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 1917)』,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1918)』는 한국불교 종파의 기원과 법통 문제, 선의 본질 논쟁, 한국불교사의 시대 구분 등의 문제의식을 학계에 던져 주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각종 불교잡지가 발행되어 한국불교의 역사와 교리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현안과 교세 확장을 위한 각종 포교 방안을 제시하였다.
포교 문제는 개항 이후 기독교의 급속한 교세 확장에 충격을 받은 불교계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과제였다.
교계 인사들은 포교당의 확대, 도심 포교, 문서 포교 등 새로운 포교 전략을 수립하는 데 골몰했다.
그 결과 1910년대에는 각황사 1개소에 불과했던 포교당의 수는 1924년에 71개소, 1933년에 147개소, 해방 후인 1946년에는 335개소로 급속히 늘어났다.
본사급의 사찰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경쟁적으로 포교당을 설치했던 것이다.
교육과 포교활동의 중요한 축이었던 역경사업에서는 1920년대에 한용운과 백용성이 크게 활약하였다.
한용운은 사라져 가는 고승들의 학설과 행적을 보존하기 위해서 1922년에 법보회(法寶會)를 조직하고 팔만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백용성도 3ㆍ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직후인 1921년에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고 금강경, 신역대장경, 능엄경, 원각경, 범망경 등을 번역하였다.
그들의 역경 사업은 안진호, 허영호 등으로 이어졌으며, 그 당시 편찬된 강원 교재들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조선불교 총본산의 탄생 불교계 통일기관의 설립은 도성출입금지 해제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숙원 사업이었다.
통일기관의 설립은 일본이 획정한 31본산 체제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1본산 체제는 불교의 역량을 결집시키고 통일적 사업을 실현시키는 데 가장 큰 장애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1920년에 조선불교청년회에 의해 본사 주지들의 전횡에 맞서 정교 분립과 사찰령의 폐지를 주장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난 이래, 1921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유신회는 1922년 10개 본사와 함께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을 출범시켜서 불교계의 자주적 통합기구를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1922년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을 출범시켰고 총무원과 교무원 양 세력은 종단 운영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다가, 1924년 4월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 교무원은 종단 운영의 전반을 수행하는 기구라기보다는 일제에 종속된 채 불교계의 사업만을 담당하는 법인의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9년 1월에 열린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는 불교계 통일운동을 한 단계 진전시킨 사건이었다.
이 승려대회에서 조선불교도들은 자주적으로 종단 질서를 규정한 종헌을 제정하고 중앙종회를 결성하였으며, 교무와 제반사업을 통괄하는 ‘중앙교무원’을 두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것은 사찰령과 31본산이라는 식민지 불교체제를 어느 정도 벗어나 불교계의 자율적인 교정(敎政)을 실현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종헌의 실행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일제가 승인하지 않았고, 또한 일제의 승인 없는 자율적인 교정 운영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가 1930년대 중일전쟁을 거쳐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되면서 상황은 변하게 된다.
불교계의 숙원사업이었던 통일기관의 설립을 일본 측에서 전시 동원체제 확보를 위해 적극 나서게 된 것이다.
일제는 처음 장충동 부근의 박문사라는 일본사찰을 조선불교 총본산으로 정하여 한국불교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기밀이 사전에 누설되어 조선불교도의 자주적 지향을 담은 총본산 건설 운동이 김상호와 같은 뜻있는 청년 승려들과 월정사 이종욱과 같은 일부 본사 주지들의 암중모색으로 제창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불교계 통일기관 총본산 신축이 본사 주지들 사이에 공론화되어 월정사 주지 이종욱이 대표로 선출되어 불사에 착수하였다.
드디어 1937년 2월, 3월에 이르러 본사주지회의에서 통일기관의 설치안을 확인하고 총본산 대웅전 건축을 위한 실무회의를 여는 것으로 총본산 건설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총본산의 건설은 조선불교선교양종의 중심이 되는 총본산 대웅전을 신축하는 사업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 총본산의 위상에 걸맞은 조선 전통의 건물이 정읍에 있었는데, 보천교(普天敎)의 십일전(十一殿)이었다.
보천교는 일제의 민족종교 탄압으로 해산 조치를 당하여 그 건물은 경매 처분을 받았는데, 불교계 대표들은 이 건물의 규모가 크고 목재가 좋은바 경매에 응하여 목재를 인수하였다.
부족한 목재와 기와는 새로 구입하여 대웅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1938년 10월 25일에 낙성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조선불교 총본산 대웅전 건물은 동양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로 평가되었고, 서울에 일본식 사찰건물이 많았는데 4대문 안에 순조선식 전통 목조 대웅전이 웅장하게 들어서 전통문화도 계승하면서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 처한 조선불교도의 자부심을 세우는 데 큰 기여를 하였고 오늘날 한국불교 총본산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총본산 대웅전 낙성 직후 총본산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문제가 본사 주지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총본산의 이름은 태고사(太古寺)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태고 보우의 법맥을 계승한다는 법통의식을 내세우려 한 것이다.
이어 1940년 11월 열린 본사주지회의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는 종명 대신 ‘조선불교조계종’이라는 종명이 담긴 사법, 즉 태고사법을 확정하여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태고사법의 가장 큰 의의는 총본산를 태고사로 정한 사실과 종명을 조계종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 한국불교 고유의 종명이었던 ‘조계종(曹溪宗)’을 재건함으로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조선불교도들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 기여하였다.
이어 1941년 6월에 조선불교조계종 제1회 중앙종회에서는 선거를 통하여 조계종 종정에 방한암(方漢岩)을 선출하고, 9월에는 이종욱(李鍾郁)을 종무 총장에 임명하여 인가를 받게 된다.
이러한 총본산의 건립과 조계종의 탄생은, 비록 일제의 정책적 지원에 의해 이루어진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1920년대 이후 지속된 불교계 통일기관 설립운동의 결과이자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종단을 설립하였다는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후반 이후 조계종단은 그 출발의 한계에서도 예견되었듯이 일제의 전시 동원체제에 많은 협력을 해야 하는 비극도 겪어야 했다.
1942년에 일본군에 대한 감사 및 전몰장병조문결의안을 채택하고 일본군의 필승을 기원하는 법회 개최를 각 사암에 지시하였다.
또한 조계종 임시종회에서 국방 자재의 헌납을 결의하였고, 승려들도 참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불교계는 모두 5대의 군용기를 일본에 헌납하고, 1943년부터는 전국 각 사찰의 불상과 범종, 유기를 공출하기에 이르렀다.
4. 해방 이후의 불교 해방과 교단개혁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불교계는 식민지 불교체제의 해체와 교단 개혁을 위한 즉각적인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뒤를 이은 미국 군정은 기독교를 지원하고 불교를 차별하는 편향적 태도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귀속재산 처리법의 운영에서 불교 측의 재산권한을 배제한 것이었다.
더욱이 행정편의적 발상으로 식민지 불교체제의 상징인 사찰령을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교단의 개혁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8ㆍ15 직후 일제시대 조계종을 재건한 집행부가 새 시대를 열고자 스스로 물러나고 ‘재경 유지 승려’가 주축이 되어 교단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들은 교단의 인수, 인계를 추진하면서 과도적 임시집행부인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945년 9월에 서울 태고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식민지불교의 상징인 사찰령을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교단기구 구성과 본말사제를 대체할 도별 교무원제를 결의하였다.
또한 교정에 박한영(朴漢永), 총무원장에 김법린을 추대하고 종지, 종통, 교단기구 및 교단의 실무적 내용을 종합한 ‘조선불교 교헌(朝鮮佛敎 敎憲)’을 제정 반포하였다.
이 교헌에서 ‘조계종’이라는 종래의 종명이 ‘조선불교’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각종 혁신단체들이 등장하여 식민지불교의 청산과 새로운 불교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불교청년당, 혁명불교동맹, 조선불교혁신회, 불교여성총동맹 등이 그들인데 각 단체만의 특징도 있었지만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31본산 제도의 폐지, 교구제ㆍ교도제(敎徒制)ㆍ불교재산 통합의 실시, 사찰의 토지 소유 반대, 교단 및 민족 반역자 청산 등이었고 교단개혁뿐만 아니라 사회개혁까지 그 주장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교단 집행부와 혁신단체 간에는 점차 교단개혁의 추진 방향과 속도에 대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양측에서 교단개혁안의 핵심으로 내세운 교도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대처승이 대다수인 교단 집행부에서 주장한 교도제는 신도의 조직화로 이해한 반면에,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지향한 혁신단체는 교도제를 대처승의 교도화로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사찰의 토지 소유에 대한 문제도 양측의 주장이 대립한 부분이었다.
결국 혁신단체 측은 당시 교단 집행부로는 식민지 불교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집행부는 혁신단체의 노선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의구심을 표명하였다.
이와 같은 대립은 혁신단체들이 연합하여 1946년 12월에 선학원을 중심으로 불교혁신총연맹(佛敎革新總聯盟)을 발족하고, 1947년 5월에 조선불교총본원(朝鮮佛敎總本院)이라는 별도의 종단기구를 구성함으로써 극단으로 치달았다.
주목되는 것은 선학원 측의 비구승들이 이러한 혁신단체들의 움직임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교단운영 참여와 선원의 확장, 자치를 위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등에서 종권의 소외를 절감한 비구승들이 혁신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교단을 내분을 겪고 상호간의 이념적 공방도 끊이지 않은 가운데 총본원은 교단의 탄압 속에서 토지개혁과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내분을 맞았다.
교단 집행부도 교단운영의 노선을 둘러싸고 폭력 사태가 벌어지는 등 안정을 이루지 못한 채 6ㆍ25 전쟁을 맞았다.
교단 운영상의 내분과 이념갈등으로 중앙의 불교계가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에 비구승들은 수행가풍의 진작을 위한 움직임을 이어 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6년 해인사 가야총림(伽倻叢林)의 창설이다.
가야총림은 교단 차원의 모범총림 창설안으로 마련된 것으로 수행승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서 수행할 수 있는 선원, 강원, 율원 등을 갖춘 종합 수도도량을 만든 것이다.
성철, 청담, 향곡, 자운, 월산, 혜암, 성수, 법전 등 젊은 수좌들이 모여 공동수행을 행한 봉암사 결사도 이즈음인 1947년경에 시작되었다.
이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취지로 청정한 수행가풍을 되살리고 부처님께서 본래 뜻하신 계율, 교법의 준수 등 불교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수행결사였다.
한편, 1947년에 만암(蔓庵)이 백양사를 중심으로 결성한 고불총림(古佛叢林) 역시 승풍 정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고불총림의 청규 중에는 승려를 정법중(正法衆)과 호법중(護法衆)으로 구분하고 그에 맞는 직분을 설정하여 교단 내의 대처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승단 정화운동의 전개 일제 식민지 정책이 한국불교계에 남긴 가장 큰 폐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비구승 중심의 승단 전통을 파괴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급속히 진전된 승려의 대처와 세속화 경향은 한국불교의 전통과 비구승단의 존립을 크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본래 뜻하신 청정 비구ㆍ비구니 승가의 계율을 위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비구승들이 수행전통을 지키고 선풍을 진작시키려는 노력은 연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일제시대의 선학원 운동이 그러했고, 해방 후 혁신 계열의 일부 주장과 교단 일각에서 일어난 승풍 결사운동 역시 ‘부처님 법대로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살리자’라는 움직임이었다.
비구승은 자신들이 승단의 정통임을 자처하면서도 대처승들에 밀려 오랜 기간 종권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1952, 3년경 일부 수행사찰을 할애해 달라는 비구승들의 요구가 있었지만 대처승들이 주도한 교단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1954년 5월 불교정화를 촉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는 이른바 ‘정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유시의 내용은 교단과 사찰은 비구승이 담당하고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대처승과 비구승 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비구승측은 대처승을 몰아내고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건설한다는 명분의 활동을 ‘정화운동’으로 규정하고 결의를 다졌다.
그 활동의 중심은 일제시대 이래 비구승들이 결집하고 있던 선학원이었다.
1954년 9월 비구승들은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하여 종헌을 통과시키고 임시종회를 구성하였다.
이 때 대처승단과의 차별을 의식해 종조를 보조국사 지눌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비구승인 만암은 종조(宗祖)를 바꾼 ‘환부역조(換父易祖)’라 비난하고 비구승들의 정화의 취지에는 찬동하지만 그 이행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비구와 대처 양측의 갈등은 폭력을 행사하여 태고사5)를 뺏고 빼앗기는 악순환을 거듭하는 극한 대립을 보였다.
마침내 문교부가 분쟁개입을 선언하고 1955년 불교정화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양측을 중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구승 측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나아가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정부의 제한적 승인 속에 열린 이 승려대회에서는 기존의 종회의원과 중앙간부를 해임하고 새로운 종회와 교단 집행부를 선출했으며, 전국 사찰의 주지를 새롭게 임명하였다.
이러한 승려대회의 결과를 실행하기 위해 비구승들은 전국 사찰에 대한 접수에 나서게 되었다.
이로써 정화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사찰관리의 인수, 인계를 둘러싼 분쟁이 이어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대처승 측은 법정으로 분쟁을 끌고 갔다.
그런데 4?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위기감에 휩싸인 비구승측은 자신들이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는 법원 판결에 문제를 제기하고 1960년 11월 비구승 대법원 난입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서는 법원에 난입한 승려 중 여섯 명의 비구승이 법원에서 할복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1961년 5?6 군부 쿠데타는 불교정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쿠데타 세력이 조직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사회악 일소 차원에서 불교계 분규처리를 시도하여 분규해결을 위한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비구와 대처 양측이 합의한 불교재건비상종회가 열리고 새로운 종헌이 통과되기에 이르러, 1962년 4월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오랜 분쟁 끝에 대처ㆍ비구 측은 상호 합의하여 통합종단을 출범시켰고, 정화운동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비구승 중심의 종단운영은 통합종단에 들어온 대처 측의 반발을 샀고, 일부 대처 측은 결국 1970년에 독자적인 태고종을 창종하기에 이르렀다.
조계종의 내분과 발전 통합종단 출범 이후 곧바로 안정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승단정화와 한국불교의 전통 복원이라는 대의명분에서 교단을 인수하여 운영하게 된 비구승들은 행정경험의 부재와 운영관리 역량의 미비로 1990년대 말까지 크고 작은 내분이 적지 않았다.
특히 1980년 10ㆍ27 법난은 한국불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적 사건이었다.
당시 계엄군은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10월 27일 새벽 전국 사찰에 들이닥쳐 종정과 총무원장, 본사 주지 등 종단 지도부 다수를 연행하여 조사한 뒤 그 중 20명 가까이 구속하였다.
이 수사과정에서 일부 혹독한 고문이 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계엄군은 불교비리를 수사한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종권을 둘러싼 암투, 폭력 행위, 사찰 재산의 유용 등에 대하여 수사하여 그 결과를 조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군사독재가 지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법난에 대하여 진상규명을 한 바 혹독한 고문과 강압적 수사로 조작된 것이 많았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불교계에 대하여 정치권력이 왜 이처럼 치욕적인 탄압을 가한 것일까? 물론 불교계 안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70년대 종단은 종정과 총무원장 사이의 권한 갈등으로 인한 분규로 극한적인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계 내부의 문제로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교분리가 헌법에 보장된 사회에서 합당한 일일 것이다.
당시 군사정부가 불교계에 탄압을 가한 것은 자신들이 정변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사회정화’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내분이 있어 온 불교계를 표적으로 삼은 결과였다.
즉 군사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종교계 중 취약했던 불교계를 희생시킨 것이다.
한편, 10?7 법난으로 불교도들은 자주적 각성이 일어나게 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느닷없이 전국 사찰에 들이닥쳐 총부리로 위협받는 수모를 당해야 했던 승려들과 이러한 사실을 지켜본 재가 불자들은 군사정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갔고, 불교도들이 단결하여 자주적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에서도 통합종단은 불교 발전을 위한 3대 지표, 즉 역경ㆍ도제 양성ㆍ포교라는 종책과제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통합종단은 적지 않은 혼란이 거듭되었지만, 이 3대 지표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나아가 1964년에 종립 동국대와 협력하여 동국역경원을 설립하여 고려대장경의 한글화 불사에 착수하였다.
이 역경 불사는 2002년에 완수하게 되었다.
도제 양성은 승려교육을 말하는 것으로 정화 무렵에는 동국대와 주요 사찰의 강원 교육이 전부였으나 지금은 종립 동국대, 중앙승가대 이외에 전국 주요 본사와 사찰에 승가대학, 학림, 율원, 승가대학원, 기초선원 등이 설립되어 약 2천여 명의 승려를 교육하고 있다.
특히 1994년 개혁 불사를 통해 승가교육을 관장하는 교육원을 총무원과 대등한 별원으로 승격시켜 이 불사를 전담하게 하였다.
또한 당시 출가자는 4년 동안의 승려 기본교육 의무화를 제도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포교 방면에서도 중앙신도회(전국신도회)를 비롯한 많은 신도단체와 군법사, 교법사, 경승단, 대한불교청년회, 대학생불교연합회, 어린이지도자연합회 등 다양한 포교기관, 단체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특히 1994년 개혁 불사를 거치며 포교원도 별원으로 승격되어 신도교육과 포교사업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이후, 월간 『법회와 설법』의 발간, 파라미타청소년협회ㆍ상담개발원ㆍ여성개발원ㆍ포교사단 창립 등의 성과가 있었다.
특히 포교원은 종단 차원의 신도교육 체계를 정비하여 신도교육 기관의 확충을 꾀하고 신도 기본교육의 의무화와 신도 종단등록사업을 추진하여 사부대중 공동체의 기반을 다져 나가고 있다.
그 외 많은 신도교육 교재와 포교자료를 개발하여 보급해 나가고 있다.
아울러 국제포교 방면에도 몇몇 원력승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 방면에 가장 큰 공로자는 숭산이다.
그는 1966년 일본 홍법원을 개원한 이래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 선을 가르쳐 50여 명의 외국인 출가 승려와 50,000여 명의 외국인 신도들을 지도하고 있다.
숭산은 달라이라마, 틱낫한과 함께 세계 3대 고승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세계적인 활약을 하였다.
더 나아가 종단의 본래 면목인 수행방면에서도 괄목할 변화가 있었다.
1969년 안거 결제선원은 39개이고 동참 대중은 600여 명으로 추산되었으나, 2000년에 이르면 90여 개 선원에 2,000여 명을 넘는 대중이 동참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도심과 사찰에 시민선원이 있어 정진의 열기가 점점 높아가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불교계 종단의 현황 20세기 후반 한국불교계가 직면한 변화 중 하나는 다종단(多宗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물론 해방 전후부터 천태종 등의 법화계열과 진각종 등의 밀교계열이 창종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공식화된 것은 1962년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해서 18개 종단이 불교단체로 등록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987년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대체되면서 군소종단의 분종과 창종은 줄지어 일어나 현재는 한국불교의 전통 대표 종단인 조계종 이외에도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총지종 등 30여 개의 종단이 설립되어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조계종 총무원장은 종단협의회 당연직 의장을 맡고 있다). 종단이 다양화되는 상황에서 불교계의 통일성과 종단의 고유성을 조화시키는 일은 앞으로 불교계의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교육면에서 조계종립 동국대학교와 중앙승가대학교 이외에 1990년대 이후 진각종에서 위덕대학교, 천태종에서 금강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밖에도 다수의 초려芟고등학교가 신설되어 불교계 종립학교로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포교활동에 언론매체가 끼치는 역할도 크게 증대되었다.
1960년에 조계종의 기관지로 「대한불교」, 즉 지금의 「불교신문」이 창간된 이후로 특히 8, 90년대에는 다수의 불교계 신문과 잡지 등이 창간되었다.
또한 각 종단별로도 기관지를 창립하여 정기적으로 발간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세계 최초로 라디오 불교방송국(BBS)과 케이블 텔레비전 불교TV가 개국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지금은 정보화시대의 포교를 위해 ‘불교 종합 정보망 달마넷’을 개설하여 운영해 나가고 있다.
4) 결(結) : 조세 징수를 위해서 논밭의 면적을 재던 단위. 5) 비구승 측에서 그 명칭을 조계사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