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 고려시대의 불교
고려시대의 불교 1. 고려 전기의 숭불정책 숭불의례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통일왕조인 고려를 개창한 왕건은 건국 초부터 적극적인 숭불정책을 시행하였다.
건국 이후 수도 개경에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을 뿐 아니라 만년에 자손들에게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도 불법을 숭상하고 사찰을 보호할 것과 불교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준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왕건이 불교를 존중하는 정책을 취한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전란을 겪어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불교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의 통일을 달성한 직후에는 이를 기념하여 논산 지역에 개태사를 창건하고서 왕건 스스로 발원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통일전쟁에 승리한 것은 부처와 신령의 은덕이며 앞으로도 불교의 음조를 받아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기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의미에 앞서서 왕건은 개인적으로도 불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선종과 교종의 여러 승려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 아니라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고승들의 비문을 직접 짓거나 비문의 제액을 써 주는 등 승려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건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숭불정책은 역대의 국왕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불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 왕실의 불교에 대한 귀의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역대 국왕들의 원찰과 진전(眞殿)사원들이다.
태조 이후 역대 국왕들은 자신들의 원찰로서 대규모의 사찰들을 창건하였다.
고려 전기만 하여도 광종이 건립한 불일사와 귀법사, 현종대의 현화사, 문종대의 흥왕사, 선종대의 홍원사, 숙종대의 국청사와 천수사 등 머무르는 승려의 규모가 천 명 내지 2천여 명이 넘는 대규모의 원찰들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고려에는 역대 국왕들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진전사원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국왕들의 제사를 지내주는 종묘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들의 진전사원을 따로 설치했던 것은 종묘 등에서 거행하는 유교적 의례와는 별도로 생전에 신앙했던 불교적인 제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진전사원은 각 국왕들의 원찰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원찰을 건립하지 않은 국왕의 경우에는 일정한 규모의 사찰이 진전사원으로 지정되었다.
왕실에서는 또한 승려들을 초청하여 재(齋)를 여는 반승(飯僧)행사도 자주 거행하였는데, 이 때 초청된 승려들의 수는 만 명 단위가 일반적이었다.
왕실의 지나친 숭불에 대하여 때로는 관료들이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때에도 불교의 정당성 자체가 문제되지는 않았다.
단지 불교는 개인의 신앙의 문제이므로 백성을 다스리는 국왕은 현실의 민생의 문제를 보다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지나친 사찰건립과 과도한 불교행사에서 초래되는 재정적 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을 하는 관료들의 경우도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불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관료들의 경우 사후에 장례식을 사찰에서 거행하는 것은 널리 퍼진 관행이었고, 은퇴한 관료들이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관료의 자제들 중 일부는 승려로 출가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일부 가문에서는 삼촌에서 조카로 대를 이어 출가하고 있었다.
지방사회의 일반민중에게도 불교신앙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전국의 각 지역마다 사찰이 건립되어 지역사람들의 신앙의 구심점이 되었고, 지역 단위로 불교신앙공동체인 향도(香徒)를 만들어 사찰의 건립과 보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고려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불교신앙에 입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가 불교적 의례인 연등회와 팔관회였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연등회는 본래 석가탄신일에 연등을 켜는 행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라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는 이를 국가적인 행사로 정비하여 매년 2월 보름에 각 지역 단위로 거행하였다.
수도 개경에서는 왕실의 주도 아래 태조 왕건에 대한 충성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행사로 거행되었고, 지방에서는 지역 대표자들의 주도 아래 지역의 발전과 지역민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거행되었다.
팔관회는 신라에서 전몰장병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거행했던 행사였지만, 고려에서는 매년 11월 보름에 중앙과 지방의 대표자들이 왕궁에 모여 단합을 확인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거행되었다.
매년 봄과 겨울에 지냈던 이 행사들은 본래 각 지역공동체마다 거행하던 농경의례와 추수감사의식을 불교적으로 재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불교적으로 체계화된 연례행사들이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에서 동질적으로 거행됨으로써 고려는 불교의 신앙과 문화에 기반을 둔 사회적 통합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승정제도 고려 정부는 불교를 숭상하고 승려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불교교단의 자유 방임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가 불교교단과 승려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들을 만들어서 국가의 운영체제 안으로 포함시켰다.
요컨대 보호와 통제라는 두 가지 원리가 고려 불교정책의 핵심을 이룬다.
불교계를 보호하면서 통제할 수 있는 정책으로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승과의 운영이다.
고려는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광종 9년(958)에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 때에 고위 승려들을 선발하는 승과도 동시에 실시하였다.
승려의 과거제도는 한국에만 있었던 특별한 제도로서 고려 과거제도의 모델이 된 중국에도 승과는 없었다.
과거에 합격한 승려들에게는 관료들의 관계와 비슷한 성격의 승계를 주어 우대하였고, 승진과 인사이동에서도 관료와 유사한 원칙이 적용되었다.
승과는 종파별로 시행되었는데, 초기에는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 등 세 종파의 승과가 시행되었고, 숙종 4년(1099)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개창된 이후에는 천태종을 포함하여 네 종파가 되었다.
승과의 시행과 함께 승계체계도 정비되었다.
승려들의 위계를 나타내는 승계(僧階)는 신라의 경우 대덕(大德), 태대덕(太大德) 등으로 단순하였고, 명망 있는 승려들에게 특별히 지급하는 명예직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승과에 합격한 사람들에 한하여 승계를 주고 그 체계도 훨씬 복잡해졌다.
초기에는 하위승계만 있다가 점차로 고위승계가 추가되었는데, 완성된 고려시대의 승계 체계는 다음과 같다.
교종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 師) – 수좌(首座) – 승통(僧統) 선종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 師) – 선사(禪師) – 대선사(大禪師) 처음 승과에 합격하면 대덕이 되고 이후 수행기간과 능력에 따라서 상위의 승계로 승진하였다.
교학불교인 화엄종과 법상종의 승려들은 교종의 승계를 받았고, 선종과 천태종의 승려들은 선종의 승계를 받았다.
원칙적으로는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만이 승계를 받고 사찰의 주지를 맡을 수 있었으며, 승계에 따라 주지로 임명될 수 있는 사찰의 규모에도 차이가 있었다.
승계를 가지고 있는 승려들은 관료와 같이 대우받았으며, 최고위 승계인 수좌와 승통, 선사와 대선사는 임명 절차나 대우 등에서 재상들과 동등하였다.
승계를 가진 승려들이 중요한 계율을 어길 때에는 승계는 물론 승려로서의 신분을 박탈하는 처벌을 받았다.
간통이나 위법행위로 적발되면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개경에 거주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처벌 내용은 뇌물 수수나 횡령 등으로 적발된 관료들에게 부과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일반 승계 외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국왕의 자문역할을 하는 왕사(王師)와 국사(國師)제도가 있었다.
왕사나 국사는 명망이 있는 고승을 국왕이 스승으로 모시는 것으로써 이들을 임명할 때에는 국왕이 직접 제자의 예를 표하였다.
왕사나 국사는 명예직의 성격이 강하였지만 때로는 직접 불교정책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국사가 왕사보다 높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왕사를 거친 후에 국사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와 관련된 업무를 주관하는 관청으로 승록사(僧錄司)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승려들의 승적을 관리하고 승계 및 주지 인사 등을 집행할 뿐만 아니라 왕사런뭘瑛?임명, 입적한 고승의 장례 및 탑렉?등의 건립과 승려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처리하였다.
이상과 같이 고려에서는 승려들 특히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에게 관료와 비슷한 신분을 부여하고 관료체계와 같은 원리에 의해 운영하였다.
이를 통해 승려들의 위상은 높아졌으며 신분도 안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승려들이 국가체제에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승려에 대한 평가가 불교 내부의 기준이 아닌 국가가 정해 준 과거시험 및 승계제도에 따라서 결정되었으며, 승계의 상승 및 주지 임명을 둘러싸고 정치세력과 영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 종파체제의 정비 고려의 건국 이후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불교계도 점차 교단체제를 정비하였다.
고려 전기의 주요한 종파는 화엄종, 법상종, 선종 등 신라시대 이래의 종파들이었고, 12세기 초에 이르러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면서 4대 종파체제로 바뀌었다.
시기에 따라 각 종파의 성쇠에 차이가 있지만 이들은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고려불교계를 주도해 나갔다.
주요 종파 이외에 밀교 계통의 신인종을 비롯한 소규모의 종파들도 있었지만 그 실제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기가 어렵다.
구산선문의 성립과 조계종 신라 후기에 급속히 전파되었던 선종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계속하여 발전하였다.
특히 신라 말 사회적 혼란기에 주로 지방세력들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던 선승들은 고려의 건국 이후에는 새로이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보다 안정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통하여 지방 세력과 왕실을 연결하여 사회적 통합을 촉진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선법이 수용된 지 100여 년이 지나면서 명망 있는 선사들이 대대로 배출되고 이에 따라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유력한 산문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후대에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불리게 된 것처럼 유력한 산문은 모두 아홉 개로 구성되었는데, 이처럼 안정된 기반을 확립하게 된 것은 광종대를 전후한 시기로 생각되고 있다.
구산선문은 처음으로 남종을 도입한 도의를 계승하는 가지산문(보림사), 도헌을 개조로 하는 희양산문(봉암사), 홍척을 개조로 하는 실상산문(실상사), 혜철을 개조로 하는 동리산문(대안사), 현욱의 문도들로 구성된 봉림산문(봉림사), 무염을 계승하는 성주산문(성주사), 범일을 계승하는 사굴산문(굴산사), 도윤을 계승하는 사자산문(흥령선원), 이엄에 의해 개창된 수미산문(광조사) 등이었다.
이와 같이 신라 후기에 활약한 주요 선승들이 각각의 개창자로 인정되었지만 후계자들이 번성하지 못한 혜소, 순지 등의 산문은 아홉 산문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가지산문이나 봉림산문, 사자산문 등은 실제로는 체징, 심희, 절중 등 개조의 제자들에 의하여 개창되었지만 이들이 산문의 개조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이는 사자상승(師資相承)2)을 중시하는 선종의 특성상 처음 법을 전수한 사람을 중시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선풍의 차이에 의해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구분된 중국의 선종과 달리 고려의 구산선문은 사상적 차이보다도 인적인 계승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었다.
같은 산문에 속한 선승들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이 중국에서 수학한 선풍은 각기 다른 경우가 많았고 중국에서 같은 선승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귀국한 후에는 각기 다른 선문의 구성원이 되었다.
도헌을 개조로 하는 희양산문은 계보의 측면에서는 도헌을 중시하면서도 사상 면에서는 도헌이 수학한 북종선보다는 후대의 제자들이 수학한 남종선을 더 중시하였다.
이에 따라 도헌의 손제자인 긍양의 비문에는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도헌이 남종선을 수학한 스승의 밑에서 수학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신라 후기, 고려 초기에 정립된 구산을 중심으로 한 문파는 선사상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한 종파였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와서 구산선문은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선종으로 자연스럽게 결집되어 갔다.
조계란 육조 혜능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혜능이 주석하였던 중국 광동성 조계산(曹溪山)의 이름을 따서 흔히 육조 혜능을 조계라 불렀던 것인데, 이를 종명으로 채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육조 혜능의 선사상을 종지로 한 종파를 말한다.
이후 구산선문은 조계종으로 결집되었으며, 크게 보아 한국 선종을 말하는 것이다.
조계종은 고려 후기에 보조 지눌의 정혜결사운동과 태고 보우, 나옹 혜근 등의 고승들이 간화선을 제창하면서 더욱 융성하여 명실상부한 한국불교의 중심 종파가 되었다.
숭유억불정책의 조선 왕조에 조계종은 선종이라 불리기도 하다가 억불책으로 선런?양종으로 통폐합된 이후 연산군 때에 강제 폐지되었다.
이후 300여 년이 지난 일제 강점기인 1941년 조선불교총본산건설운동 당시 불교도의 염원으로 조계종이 재건되었던 것이다.
이 때 재건된 조계종이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이어진다.
화엄종의 발전 신라 후기에 대두된 의상계를 중심으로 하는 화엄종은 신라 말 선종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화엄종은 내부적으로 정리된 교학체계를 제시하지 못했고 외부적으로는 선종의 교학 비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교단 내부적으로는 또한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즉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에 해인사에는 화엄종의 종장인 희랑(希朗)과 관혜(觀惠)가 주석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왕건과 견훤의 후원을 받으면서 대립하고 있었고, 그 문도대에 이르러서는 각기 북악파와 남악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고려 초에 활약한 대표적인 화엄종 승려로는 탄문(坦文)과 균여(均如)가 있다.
탄문(坦文, 900~975년)은 고양의 지방세력 출신으로 어려서 북한산 지역에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명성을 날려 왕건의 주목을 받았고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왕실의 배려로 신라 화엄학의 대가인 신랑(神朗)을 계승하여 화엄종의 중심 인물로 대두하였다.
광종대에는 왕사와 국사를 역임하였고 보원사(普願寺)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균여(均如, 923~973년)는 황주의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개경 근처의 화엄종 사찰에서 수학하였다.
신라 이래의 화엄학을 깊이 연구하여 당대 최고의 화엄학자로 명성을 날렸고 승과가 개설되었을 때에는 그의 이론이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북악과 남악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여 양자의 차이를 해소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문종의 넷째 아들인 의천(義天)은 11살에 출가하였고, 13살에 승과를 거치지 않은 채 승통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화엄종을 주도해 갔던 의천의 계보를 왕실 출신의 승려들이 계속 이어 나갔다.
그리고 문종의 원찰이었던 흥왕사와 선종의 원찰인 흥원사를 비롯하여, 귀법사, 영통사, 부석사, 해인사, 화엄사 등 수많은 사찰들이 화엄종의 구심점이 되어 발전을 거듭했다.
법상종의 발전 고려의 법상종은 유식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면서 동시에 신라 후기에 성행했던 진표계의 점찰신앙을 계승한 종파였다.
후삼국이 통일된 이후 진표의 흐름을 계승한 석충은 진표가 미륵에게서 받았다는 점찰간자를 왕건에게 바치고 후원을 받았다.
이로 인해 법상종은 개경의 불교계에 들어왔지만 고려 초에는 그 활동 양상이 미약했다.
법상종이 중앙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목종이 자신의 원찰로서 법상종 사찰인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하면서부터였다.
특히 이 숭교사에서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했던 현종이 국왕이 되어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법상종은 주요 종단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왕실 출신의 현종은 일찍이 고아가 되었는데 외삼촌인 국왕 성종의 배려로 궁궐에서 양육되었지만 성종이 죽고 나자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에 의해 승려로 출가하게 되었다.
현종은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암살 음모에 시달렸지만 삼각산 등의 사찰에서 승려들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지내다 천추태후가 실각한 이후에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현종은 즉위 후에 자신의 부모를 위하여 개경 근교에 대규모의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후대 법상종의 중심 사찰이 된 현화사였다.
현종은 정성을 다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대장경을 수입하여 봉안하고 각지에서 바친 사리 등을 안치하였으며, 전국에서 2천여 명의 승려를 모아 이 곳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처럼 현종의 각별한 지원을 토대로 하여 법상종은 중심적인 종파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법상종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법상종으로 출가하는 승려들의 출신도 점차 높아졌다.
당대 최고 가문 출신이었던 소현(韶顯)이 법상종으로 출가하였고, 문종의 다섯째 아들 규(竅)가 소현 문하로 출가하여 법상종을 주도하였다.
고려 전기 법상종의 주요 사찰로는 현화사, 숭교사, 해안사, 왕륜사, 금산사, 속리산사(현재의 법주사), 동화사, 법천사 등이 꼽힌다.
천태종의 개창 고려 전기에 확립된 종파체제가 발전되는 가운데 숙종대의 천태종 개창은 기존의 종파체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른 종파들이 신라시대 이래 오랜 기간에 걸쳐 종파체제를 형성해 온 것과 달리 천태종은 짧은 기간에 왕실의 후원을 얻어 종파의 틀을 갖추었다.
숙종 2년(1097)에 천태종의 근본 사찰인 국청사(國淸寺)가 완공되었고, 숙종 6년(1101)에 천태종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승과가 실시되었는데, 이로써 천태종은 명실공히 고려불교의 주요한 종파 중 하나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천태종의 수용은 본래 광종대에 시도된 적이 있었다.
광종은 중국 오월지방의 요구에 따라서 고려에 전하는 천태종의 전적을 보내 주면서 제관(諦觀)3)과 의통(義通)을 파견하여 천태학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이들은 오월지방에 들어가서 천태학을 수학한 후 그 교리를 더욱 발전시켜 천태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제관은 천태종의 교판론을 설명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하였고,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16대 조사로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중국에서 활동하고 입적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이 고려에 전해지지 못하였고, 천태종이 종파로서 등장할 수도 없었다.
고려에서 천태종의 개창을 주도한 사람은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의천은 송나라에 유학하여 천태학의 요체를 배웠고, 귀국하는 길에는 천태종의 출발지인 천태산에 올라 천태 지자대사의 탑을 참배하면서 고려에 천태종의 가르침을 널리 펼 것을 맹세하였다.
귀국한 이후에는 맹세한대로 천태학을 강의하고 승려들을 모아 천태종을 독자적인 종파로 성립시켰다.
국청사의 개창을 주도하고, 처음 실시된 천태종 승과를 주재한 사람도 의천이었다.
그런데 천태종이 종파로 독립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의천의 노력 못지않게 왕실의 후원이 절대적이었다.
의천의 어머니, 즉 문종의 왕비인 인예(仁睿)태후는 국청사의 개창을 발원하고 시주하였으며, 국청사가 완공되기 전인 선종 9년(1092)에는 견불사(見佛寺)에서 천태예참법을 거행하였다.
또한 의천의 바로 맏형인 숙종은 천태종의 승과를 거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자신의 원찰인 천수사(天壽寺)를 창건하면서 이를 천태종 사찰로 정하였다.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가장 큰 이유는 교학과 관행을 아울러 닦도록 한 천태종의 가르침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의천이 당시의 불교계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사상적 불만은 교학불교는 이론적인 탐구만을 주로 하고 관행을 등한시하며, 반대로 선종은 참선만을 중시하고 이론적 탐구를 외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화엄종의 승려들이 교학만을 위주로 하면서 관행을 닦지 않는 것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당시의 선종 승려들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워 경전의 내용을 무시하는 태도도 비판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징관(澄觀)의 사상을 받아들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한 것과 천태종을 유포하고자 노력한 것은 사상적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관겸수의 주장은 교학만을 위주로 하는 화엄종 내부의 개혁을 위한 것이었고, 천태종의 가르침은 교학을 등한시하는 선종의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 점은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에 소속된 승려들이 모두 선종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3. 고려대장경과 교학의 발전 고려대장경의 조조(雕造) 승정제도 및 교단체제의 정비와 함께 불교계의 사상레???역량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들도 추진되었다.
그러한 노력 중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기본 문헌인 경(經)렝?律)럼?論)을 집대성한 대장경의 제작이었다.
고려의 대장경 제작은 현종 2년(1011)에 거란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이 남쪽지방으로 피난해야 하는 상황에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한 발원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의 대장경은 송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개보장(開寶藏)을 모범으로 삼았다.
개보장은 한역(漢譯)된 불경을 집대성한 최초의 한문 대장경으로서, 송나라 태조의 개보 4년(971)에 관리들을 촉(蜀)지방에 파견하여 목판본으로 제작한 것이다.
개보장에는 모두 1,078종 5,048권의 경전들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당나라 때 제작한 불경 목록인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의거한 것이었다.
고려는 개보장이 완성된 직후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대장경의 인쇄본을 구해 왔고 현종이 현화사를 창건했을 때에도 중국에서 대장경 1질을 하사받아 봉안했다.
현종대의 대장경 제작은 현종 20년(1029)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장경을 완성한 직후 국왕은 왕궁 안의 회경전에서 대장경 완성을 기념하는 대규모의 장경도량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대장경 제작은 이것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경전들을 대장경에 추가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송나라에서는 개보장을 제작한 이후에 후대에 번역된 경전들을 대장경에 추가하였고, 거란에서도 개보장보다 훨씬 많은 분량으로 거란대장경을 제작하였다.
거란의 대장경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개보장을 모델로 하면서 여기에 독자적으로 파악한 다수의 경전들을 추가했다.
이처럼 송나라와 거란에서 기존의 개보장에 새로운 경전들을 추가한 대장경을 제작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에서도 현종대에 제작한 대장경에 새로운 경전들을 추가하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추가로 대장경을 판각하는 사업은 거란의 대장경이 수입된 문종 17년(1063)에 시작되어 선종 4년(1087)에 완료되었는데, 이 때에는 송나라와 거란에서 추가한 경전들과 고려에서 발견된 경전들을 검토하여 추가하였다.
현종대부터 선종 4년까지 제작된 대장경은 총 6,000여 권의 분량(570질)으로서 당시 동아시아에서 제작한 대장경 중 가장 잘 갖춰진 것이었다.
완성된 대장경 판목은 흥왕사의 대장전에 봉안하고 있다가 나중에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서 봉안하였다.
외침을 물리치기 위한 신심에서 대장경을 제작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대장경의 제작은 그러한 정치적 목적 이외에도 불교국가로서의 문화적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송나라는 처음 대장경을 제작한 이후 주변 국가에 인쇄본을 하사함으로써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였는데, 이제 고려도 독자적인 대장경을 갖게 됨으로써 더 이상 중국의 대장경에 의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스스로의 문화적 역량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로 승려들의 중국 유학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가 경전의 구입이었는데, 불경을 집대성한 대장경판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이제 그러한 필요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교학의 발전 대장경의 조조와 함께 불교학에 대한 연구도 활성화되었다.
특히 교학 불교인 법상종과 화엄종에서는 교단체제가 정비되면서 자기 종파의 교학적 기반에 대한 연구가 한층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기 종파의 기초 문헌들을 정리하여 간행하고, 나아가 종파의 사상적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게 되었다.
법상종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사람은 문종의 처남으로서 승통에 오른 소현이었다.
11살에 출가한 소현은 문종 23년(1069)에 승과에 합격하고서 이후 해안사와 금산사, 현화사 등 법상종의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면서 법상종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금산사에 있을 때에 금산사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학의 문헌들을 수집려ㅈ?構?간행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가 현화사에 주석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그가 노년까지 수집하고 교정하여 간행한 유식학 문헌은 규기의 『법화현찬』과 『유식술기』 등을 비롯하여 32종 353권에 달한다.
또한 소현은 법상종의 역대 조사들의 현창에도 노력하였다.
금산사 광교원 내부에 법당을 마련하고서 노사나 불상과 함께 중국 법상종의 시조인 현장과 규기의 상을 봉안하였으며, 현화사의 주지로 있을 때에도 법당 내부에 석가여래와 법장, 규기 및 해동의 법상종 조사 6인의 모습을 모시고 승려들로 하여금 공경하게 하였다.
이 때 모신 해동 6조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소현의 비문에 특별히 신라의 법상종 조사로 원효와 태현을 언급하고 있어서 두 사람이 6조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균여 이후 화엄종에서 교학의 발전을 주도한 사람은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왕자로서는 처음으로 승려가 된 그는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서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불교이론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보다 더 깊은 공부를 하고자 송나라로 유학 갈 것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송과 경쟁하는 거란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상황을 고려한 왕실과 관료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자 의천은 선종 2년(1085)에 비밀리에 송으로 건너가 14개월 동안 화엄학을 비롯하여 천태학, 유식학, 선 등 주요 불교이론들을 배우고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후 의천은 종래의 고려 화엄학과는 다른 교관겸수(敎觀兼修)의 수행법을 강조하였다.
교관겸수를 중시한 의천의 입장은 중국 화엄종의 제4조로 불리던 징관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심성의 체득을 중시했던 자신의 입장도 반영한 것이다.
의천은 기성 불교계를 비판하는 것과 동시에 새롭게 천태종을 개창하여 고려불교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교장(敎藏)의 제작 의천은 화엄학뿐만 아니라 불교학 전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여러 불교연구서들을 총괄한 교장(敎藏)을 편집, 간행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교장이란 불경에 대한 각종 연구서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인데, 불경을 모은 대장경에 대한 해설서들이라는 의미에서 ‘속장경(續藏經)’이라고도 한다.
의천은 중국에 유학하기 전부터 대장경이 거의 완성되는 것을 보고서 불경의 주석서들을 모아 교장을 편집할 것을 발원하였고,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그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중국에 있을 때에 여러 종파의 연구서 3,000여 권을 수집하였고, 귀국한 이후에도 국내의 사찰을 뒤져 옛 문헌들을 찾고 또 송나라, 거란, 일본 등에 사람을 파견하여 문헌을 수집하였다.
그 성과로서 선종 7년(1090)에 확인된 불경에 대한 주석서들을 경전별로 분류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완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총 1,010종 4,857권의 문헌이 수록되었다.
곧이어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 문헌들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교장의 간행에는 다른 종파의 승려들도 참여하였는데, 특히 법상종 승려들의 참여가 많았다.
법상종의 소현이 간행한 유식학 문헌들도 교장의 일부로 수록되었다.
교장 간행작업은 의천이 입적한 다음 해인 숙종 7년(1102)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때 간행된 책들은 송과 거란, 일본에 전해져 각 나라의 불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의천은 교장 이외에도 화엄종의 주요 문헌들을 발췌하여 편집한 『원종문류(圓宗文類)』 22권과 승려들의 비문 등을 모은 『석원사림(釋苑詞林)』 250권을 편집하는 등 불교문헌의 수집과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는 『원종문류』 3권과 『석원사림』 5권 등이 남아 전한다.
4. 무인시대의 불교 무인정권과 불교계 의종 24년(1170)의 무력반정으로 무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고려사회는 크게 변화되었다.
기존의 지배층인 왕실과 문인관료들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이를 대신하여 무인들이 새로운 사회 주도층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지배층의 교체는 불교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기존의 왕실 및 문인관료들과 연결되었던 수도 중심의 불교는 쇠퇴하고 그 대신에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운영하고자 했던 지방의 결사불교가 등장하였다.
무인정권은 결사불교를 지원함으로써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권의 정당성을 얻고자 하였다.
무인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기존의 불교계는 한동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실 및 문인관료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이들은 수차례에 걸쳐서 무인정권의 타도를 위한 움직임을 보였고 그 때마다 무인집정자들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다.
명종 4년(1174)에 개경의 승려 2천여 명이 무인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나섰다가 무인들에게 토벌되었고, 신종 5년(1202)과 6년(1203)에는 경상도 지역의 승려들이 지방 민중과 연합하여 무인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
고종 4년(1217)에는 침입해 온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동원되었던 개경의 승려들이 도리어 집권자 최충헌을 죽이려 하다가 최충헌의 병사들에게 진압되어 수백 명이 죽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 불교계의 중심 세력들은 거의 대부분 도태되었다.
왕실 및 문벌 출신들이 교단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화엄종과 법상종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선종과 천태종에서도 중앙에서 활동하던 기존의 중심 세력이 밀려나고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새롭게 종단을 주도하게 되었다.
무인정권기의 불교계의 새로운 흐름은 지방에서 일어난 결사(結社)불교였다.
개경을 떠나 지방의 조용한 곳에 함께 모여 오로지 수행에만 정진하는 결사불교는 무인정권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불교계 전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불교계가 쇠퇴한 상황에서 결사불교는 이제 불교계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불교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결사로는 화엄종의 반룡사(盤龍社)와 수암사(水暖社), 법상종의 수정사(水精社), 선종의 수선사(修禪社), 천태종의 백련사(白蓮社) 등이 있는데, 특히 수선결사와 백련결사는 종래 불교계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과 신앙을 제시하면서 불교계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지눌과 수선사 수선결사 즉 수선사(修禪社)는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년)국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급 관료 집안 출신인 지눌은 어려서 사굴산문으로 출가하였고, 명종 12년(1182)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지눌이 결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명종 20년(1190)이었다.
이 때 지눌은 평소 세속의 명리를 떠나서 수행에 매진하자고 약속했던 동료 득재(得才)의 초청으로 팔공산 거조암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곳에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짓고 선종과 교종의 승려는 물론 유교, 도교의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수행결사를 조직하였다.
결사의 이름인 정혜(定慧)는 정과 혜를 함께 닦으라고 말한 『육조단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지눌은 명종 27년(1197)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수도하던 중 대혜 종고(大慧宗豈)의 『보각선사어록(普覺禪師語錄)』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보고서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
선(禪)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으며 또한 소란한 곳에 있지도 않다.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생각으로 분별하는 데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먼저 고요한 곳, 소란한 곳, 일상의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선해야 홀연히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집안의 일임을 알게 되리라. 이후 지눌은 이러한 깨달음의 입장에서 자신의 선사상을 체계화하고 교화를 펴나갔다.
신종 3년(1200)에는 보다 넓은 곳을 찾아 송광산 길상사(현재의 송광사)로 옮겨서 입적할 때까지 이 곳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폈다.
그리고 희종 원년(1205)에는 산과 결사의 이름을 조계산과 수선사로 바꾸었다.
수선사는 지눌의 제자인 혜심(慧諶)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혜심(1178~1234년)은 본래 국자감에서 유학을 공부하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신종 5년(1202)에 지눌의 문하로 출가하였다.
이후 지눌의 가르침을 이어 계승자로 인정받았으며, 지눌이 입적한 이후에는 수선사의 제2대 사주가 되어 스승의 가르침을 선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가 사주로 있는 동안에 수선사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으며 후원자들도 확대되었다.
지눌대에 수선사의 주된 후원층은 지방의 향리층들이었지만 혜심대에는 왕실과 고위 관료들이 주된 후원자가 되었다.
특히 당시 무인집정자 최우는 혜심을 신뢰하여 수선사에 많은 후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그 문하에 출가시키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왕실과 고위 관료들의 후원을 얻었던 혜심은 승과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고종 3년(1216)에 대선사라는 최고위의 승계를 받기도 하였다.
혜심대 이후 수선사는 최씨 무인정권의 비호 아래 불교계 최고의 위상을 계속하여 유지해 갔다.
특히 몽고의 침입을 맞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강화도에 자신의 원찰로서 선원사(禪源社)를 세우고 그 사주로 수선사 출신의 사람을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수선사 사주의 제자가 선원사 사주를 맡은 다음에 수선사 사주가 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수선사의 사상적 전통은 지눌의 가르침에 입각하였는데, 그 내용은 지눌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았다.
스님은 늘 사람들에게는 금강경을 읽으라고 권하였고, 가르침은 늘 육조단경에 의거하면서,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 종고의 어록으로 보충하였다.
수행법으로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이다.
요컨대 지눌은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던 혜능과 이통현, 대혜 종고의 사상에 의거하여 가르침을 폈으며, 이것이 수선사의 사상적 전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3문(門) 중에서 성적등지문은 혜능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정혜쌍수, 즉 정과 혜를 함께 닦을 것을 말한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중생들이 본래 성불한 존재라고 하는 이통현의 사상에 의거한 것으로서 자신이 부처인 것을 깨닫자는 가르침이다.
또한 간화경절문은 대혜 종고의 간화선으로서 화두를 참구하여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을 말한다.
요세와 백련사 천태종의 백련결사(白蓮結社), 즉 백련사는 요세(了世, 1163~1245년)에 의해 시작되었다.
요세는 신번현(현재의 합천지역)의 호장 집안 출신으로 12세에 고향의 천태종 사찰에서 출가한 후 23세 되던 명종 4년(1174)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그 후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천태학을 수학하던 중 신종 원년(1198)에 개경의 고봉사(高峯寺)에서 개최된 법회에 참석했다가 실망하고서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신앙결사를 만들 생각을 하였다.
이 때 팔공산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던 지눌이 요세에게 글을 보내어 참여를 권유하였으므로 동료들과 함께 정혜결사에 참여하여 참선수행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참선수행으로 만족하지 못했기에 지눌이 송광산으로 옮길 때에 동행하지 않았으며, 희종 4년(1208) 월출산에 머물 때에 문득 ‘천태의 묘해(妙解)에 의지하지 않으면 수행의 120병(病)을 어찌할 수 없다’라고 했던 영명 연수의 말을 생각하고서 천태의 법화신앙에 의한 수행을 결심하였다.
이후 만덕산(萬德山)으로 옮긴 그는 고종 3년(1216)에 백련결사를 결성하고 고종 19년(1232)에는 보현도량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천태신앙에 기초한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백련결사는 천태종의 법화신앙과 정토신앙에 기초한 신앙결사였다.
백련결사의 중심이 된 보현도량은 법화 삼매를 닦아 정토왕생을 희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구체적인 수행법은 천태 지자의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의 내용에 의거하였다.
요세 스스로 이에 의거하여 매일 선관(禪觀)을 닦는 여가에 법화경 전체를 독송하고, 준제(準提)다라니 천 번과 아미타불 만 번을 염송하며, 53체불(體佛)을 열두 번씩 돌며 전생의 업장을 참회하는 수행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실천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에 ‘서참회(徐懺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요세의 백련결사는 천태교학에 기초하면서 정토염불신앙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정토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북송대 천태종의 신앙경향과 통하는 것이었다.
또한 요세는 지눌이 주재한 정혜결사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선에도 이해가 깊었지만 경전과 계율을 무시하고 참선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는 의천의 선종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통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요세는 자신의 사상적 계보를 이야기할 때에 의천 이래 고려 천태종의 흐름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요세 이후 백련사는 제자인 천인(天因)과 천책(天址) 등으로 계승되었다.
천인과 천책은 모두 성균관에서 공부한 유학자 출신이었는데, 고종 15년(1228)에 함께 요세의 문하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중앙관료와 유학자들도 백련사에 관심을 갖고 참여했는데, 그 배경에는 유학자였던 천인과 천책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천인과 천책 이후 백련사는 그 제자들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면서 수선사와 함께 무인집권기의 불교계를 대표하는 수행결사로서 그 위상을 확립해 갔다.
재조(再雕)대장경 무인집권기인 고종 18년(1231)에 몽골의 군대가 고려에 침략해 들어왔다.
최씨 무인정권은 일단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강화조약을 맺은 뒤 다음 해에 곧바로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결사항전을 선언하였다.
이후 몽골은 고종 46년(1259) 고려 정부가 최종적으로 항복할 때까지 계속 군대를 보내서 전국을 유린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가 겪은 피해는 막심한 것이었는데, 불교계로서는 특히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판이 몽골군의 방화로 불타 없어짐으로써 현종대 이래 장기간에 걸쳐 행해졌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대장경이 의미하는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을 고려할 때 이러한 사태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곧바로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불사가 시작되었다.
고종 24년(1237)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이규보가 국왕을 대신하여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는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고려인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런 큰 보배가 없어졌는데 어찌 일이 힘들다고 하여 다시 만드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이제 국왕과 관료들은 함께 큰 서원을 발하여 담당 관청을 두고 일을 시작하려 합니다.
(중략) 원하옵건대 부처님과 여러 천신들은 이 간곡한 정성을 굽어 살펴주십시오. 신통한 힘을 빌려 주어 오랑캐들을 멀리 쫓아내어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해 주시고, 전쟁이 그치어 나라가 편안하며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 주십시오. 대장경의 재조(再雕) 작업은 담당 관청인 대장도감(大藏都監)의 관리 아래 이루어졌다.
대장도감은 강화도의 본사(本司)와 함께 남해섬에 분사(分司)를 두었다.
본사에서는 대장경 제작을 위한 계획수립과 경비의 조달 등을 담당하였고, 대장경의 실제 판각작업은 주로 남해의 분사에서 이루어졌다.
남해섬은 대장경판의 재료가 되는 목재를 조달하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되는 몽골의 침략으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대장경 제작비용의 대부분을 담당하였던 무인집정자 최우와 그의 처남 정안(鄭晏)의 경제적 기반이 있는 곳으로 필요한 경비의 조달에도 유리하였다.
최씨 정권은 최충헌 이래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식읍(食邑)을 하사받아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고,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 정안 역시 남해섬에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대장경의 재조작업은 고종 38년(1251)에 최종적으로 완료되었다.
이 재조 대장경에는 모두 1,496종 6,568권(639함)의 불경이 포함되었는데, 고려 전기의 대장경에 비하여 500여 권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
완성된 대장경판은 총 81,137개이며 하나의 경판 양쪽에 경전을 새겼으므로 인쇄된 대장경의 분량은 총 16만 면을 넘는다.
대장경을 새로 제작할 때에는 단순히 종래의 대장경을 그대로 판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 대장경에 포함될 경전의 목록을 작성하고, 여러 판본을 모아 가장 완전한 내용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목록 작성과 교감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화엄종 승려인 수기(守其)였다.
승통이던 수기는 불타버린 대장경의 인쇄본을 저본으로 하고 거기에 송나라 및 거란의 대장경, 그리고 그 밖에 구할 수 있는 여러 판본들을 대조하여 최선본을 작성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판본의 교정 내용은 그가 편집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완성된 대장경판들은 추가로 판각된 것과 함께 강화도로 운반되어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에도 계속 강화도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판은 조선 개국 직후인 태조 7년(1498)에 해인사로 옮겨 봉안되었다.
해인사에는 본래 고려의 실록 등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있었는데, 조선 개창 이후 『고려사』의 편찬을 위해 고려왕조실록을 서울로 옮긴 후 비어 있는 사고에 대장경을 봉안한 것이다.
원래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던 강화도의 대장경 판전은 이후 조선 왕조의 사고로 사용되었다.
고려의 재조대장경은 근대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제작한 대장경 중 유일하게 판본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대장경이며, 또한 다양한 판본을 대조한 꼼꼼한 교정으로 가장 완전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전해지지 않는 불경들도 여러 종 수록하고 있다.
고려 대장경은 당시 사회에서 불교의 위상과 역할을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고려 말 청주의 흥덕사에서 백운 경한이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란 책을 금속활자본으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인쇄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운은 역대 부처님과 조사들의 법어와 게송 등에서 선의 요체가 되는 것을 가려 뽑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금속활자를 통해 불서를 간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통일신라시대 목판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매우 노력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우리 선조들이 문화적으로 세계를 선도해 나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5. 원나라 간섭기의 불교계 불교계의 친원화(親元化) 무인정권이 몽골과의 결사 항전을 주장하고 부처님의 가호를 빌기 위하여 대장경 제작에 열의를 기울였지만, 고려는 결국 몽골에 굴복하고 말았다.
고려가 항복한 직후 몽골은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고 새로운 복속국이 된 고려를 자신들의 뜻대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몽골과의 항전을 주도했던 무인정권은 원의 압력으로 붕괴되었고 국왕 중심으로 복귀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원에서 파견된 관료 및 원의 지배층과 결탁한 세력들이 정치를 주도하였고, 왕실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원나라 권력자들의 의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에 의하여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었고 고려 왕실 내부에서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원나라 지배층의 후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계 또한 원의 통치에 순응하는 형태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의 간섭 아래 고려 정부가 독자적인 정치운영을 하지 못하고 부용국 체제에 맞춰 운영되었던 것처럼 불교계도 원나라에 복속된 모습을 보였다.
모든 법회 의식에서는 국왕과 왕실의 안녕을 축원하기에 앞서 원나라 황제와 황실의 안녕이 축원되었고, 주요 사찰들은 기존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원나라 황실과 귀족들의 원찰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원나라는 불교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원 황실과 귀족들의 원찰로 지정되면 정치적 보호와 함께 경제적 후원을 얻을 수 있었다.
고려불교의 오랜 전통인 담선(談禪)법회도 원의 압력에 의해 중단되었다.
태조 때에 시작된 담선법회는 선사상의 홍포와 함께 외침을 당하였을 때 이를 극복하는 의미를 담아 국가적 규모로 행해져 왔다.
그런데 충렬왕대 초기에 일부 친원파들이 원나라 조정에 담선법회는 원나라를 저주하기 위한 행사라고 모함하여 고려가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공민왕대까지 담선법회는 개최될 수 없었다.
또한 고려불교의 최고 명예직인 국사라는 호칭도 원나라의 국사 칭호와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국존(國尊) 또는 국통(國統)으로 바뀌었다.
무인집권기에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였던 결사불교도 그 성격이 변질되어 갔다.
최씨 정권 아래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수선사는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원나라 황실의 비호를 받는 사찰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결사불교마저 변질되는 가운데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승려는 일연(一然, 1206~1289년)이었다.
특히 그는 문헌편찬에 몰두했는데, 불교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의 역사적 일화들을 모은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여러 저술을 남겼다.
원 간섭기에 고려 사회와 불교계가 정체성이 흔들릴 때 사상적 기반을 확인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일연의 작업은 민족사와 불교사에 공히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새로운 사조의 수용 원 간섭기에는 원과 고려 사이의 인적 교류가 활발하였으므로 불교계에서도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원 간섭기 초기에는 원나라 황실에서 신봉하던 티베트불교가 고려에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황제의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온 인물 중에 티베트 승려들이 있었으므로 고려는 이들을 통하여 티베트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된 이후에는 공주의 신앙과 관련하여 티베트불교는 공주의 수행원과 고려에 거주하는 몽골 관인들을 중심으로 신앙되었다.
고려 왕실에서도 충렬왕과 충선왕이 티베트 승려로부터 보살계를 받기도 하여, 어느 정도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더 나아가 고려 출신으로 원에 들어가서 티베트불교의 승려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황실의 각별한 존중을 받았으므로 고려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특별한 우대 조치가 베풀어졌다.
하지만 고려에서의 티베트불교 수용은 황실에 대한 존중과 공주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강했으며 전체 불교계나 일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원나라 황실을 축원하는 법회의식 등을 통하여 티베트불교의 의례와 불상, 불구(佛具) 등이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반대로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 현재의 북경)에 고려인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고려의 불교가 원나라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원에 거주한 고려인들은 티베트불교보다는 전통적인 중국불교의 신자가 되었으며 때로는 독자적으로 사찰을 세우고 고국에서의 신앙생활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활동은 원나라 고관들과 결혼한 고려의 여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황제의 후궁이나 내시들도 참여하였다.
고려인들이 세운 사찰은 이후 고려에서 유학 온 승려들의 활동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고려의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 조정에서 활약한 충선왕의 불교 후원 활동도 중국불교계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충선왕은 황실의 대표로서 여러 종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승려들을 후원하고 백련종(白蓮宗)을 부흥시키는 데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연경과 강남지방의 주요 사찰에 대장경을 인출하여 시납하고, 임제종의 고승 중봉 명본(中峰明本)과도 교유하였다.
강남지역을 순회할 때에는 의천이 유학하였던 항주의 혜인사(慧因寺)를 방문하고 토지를 시주하여 중흥의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려인들에 의해서 고려의 불교성지가 원나라 지배층에 알려져 특별한 존중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법기(法起)보살의 상주처로 알려진 금강산은 원나라 황실과 고관들의 불사가 계속되었고, 다른 유명 사찰들에도 원의 고관과 연경 거주 고려인들의 후원이 적지 않았다.
고려 말의 불교계 13세기 말에 몽산 덕이(蒙山德異, 1231~1308년)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널리 확대된 간화선의 수행법은 14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려불교계의 주류가 되었다.
원의 지배 아래서 중국의 전통적 종파들이 쇠퇴하는 가운데 선종만이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었던 점도 고려에 간화선이 성행하는 배경이 되었다.
간화선풍이 불교계의 일반적 수행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재가 신자들의 화두참구도 성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귀족 자제들이 선종으로 출가하는 예가 점차 많아졌다.
급기야 선종은 명실상부한 불교계의 중심이 되었고, 교학불교의 승려들도 참선을 주로 하게 되어, 결국 선종과 교종의 구분은 흐릿해지고 말았다.
본래 선문의 규범으로 정해진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원나라에서 수입되어 불교사원 전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고, 종파를 넘나드는 승려들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특히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년)는 오늘날 한국불교조계종의 법맥과 종풍을 정립한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태고는 고려 충렬왕대에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양주 회암사로 출가하였다.
19세부터 화두를 참구하였으나 선교를 겸수하여 26세에는 화엄종 승과에 합격하였던 만큼 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 후 다시 선에 정진하여 37세에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에 들어 마치 세상을 크게 버리고 죽은 사람인 듯 보였는데 38세에 활연대오하고 오도송을 읊었다.
태고는 깨침 이후 46세 되는 1346년 원나라로 향해 당시 선의 중심이었던 중국에 가서 순례하던 중 “강호의 진정한 안목은 석옥에게 있다”는 말을 듣고 석옥 청공(石屋淸珙, 1257~1352년)을 친견하고 깨침을 인가 받았다.
석옥은 조계 혜능, 마조, 임제의 법을 이은 임제종 양기파의 선사로, 태고는 임제선법의 증표로 의발을 받아 돌아왔다.
태고는 56세 되는 고려 공민왕대에 왕사로 추대되어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거듭된 청으로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당시 각각의 문중으로 화합하지 못하던 구산선문의 통합을 추진하고 한양 천도를 주장하였다.
태고의 이러한 뜻은 선종은 본래 하나인데 구산으로 나누어져 화합하지 못하는 병폐를 치유하며 나아가 의천에 의해 약화된 선종을 중흥하여 『백장청규』의 정신을 되살리고 간화선풍을 드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은 태고 보우를 중흥조로 모시고 있다.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년) 역시 태고 보우와 동시대인으로 고려 말 선풍을 떨친 대선사였다.
흔히 한국불교계 삼화상(三和尙)하면 ‘지공ㆍ나옹ㆍ무학’을 꼽고 사찰의 삼성각에 진영을 모시어 둔 곳이 있을 정도로 이름난 고승들이다.
나옹은 20세에 문경 사불산 묘적암으로 출가하여 화두 참구를 하였으며 양주 회암사에서 깨치고 원나라 연경으로 가서 선지식을 친견하였는데, 평산 처림과 지공, 두 선사로부터 전법인가를 받아 각각 가사와 불자를 받고 돌아와 간화선풍을 떨쳤다.
공민왕은 나옹을 왕사로 추대하였고, 나옹의 제자로는 고려 말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무학 등 100여 명이 있다.
이와 같이 불교계가 간화선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가운데 불교계 밖에서는 성리학이 신진사대부들에게 수용되어 새로운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이념으로 수용된 성리학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불교를 배척하는 이론들도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사찰이 왕실 및 권문세가와 연결되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점유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승려가 되어 수행자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 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찰재산의 축소와 승려자격의 강화가 제시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개혁이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쳐 실시되지 못하면서 점차 불교이론 자체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었다.
특히 위화도 회군으로 사대부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사회의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진보파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진보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불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이들은 모든 사찰을 철폐하여 관청과 학교로 사용하고 승려는 환속시켜 군역에 충당하자는 척불론을 주장하였다.
보수파와 진보파의 심각한 대립 끝에 진보파 사대부들이 승리하여 조선 왕조가 열리게 되었고, 척불론은 사대부들 사이의 명분으로 확립되었다.
비록 일부 국왕의 불교에 대한 호의와 전통적 신앙에 대한 민심의 고려로 척불론이 온전히 실시되지는 못하였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궁극적으로 척불의 완성을 지향하며 정책을 추진해 갔다.
2) 사자상승 : 사자란 스승과 제자를 뜻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사자상전(師資相傳)이라고도 한다.
3) 체관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