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불교 – 초기불교

인도불교 – 초기불교

초기불교 1. 붓다와 제자들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의 생존 연대에 대한 학설은 분분하여 일치하지 않지만, 대략 기원전 500년경에 생존했던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데는 이설이 없다.

그의 일생에 대한 많은 일화들은 경전에서 상세히 전하고 있다.

기원전 560년경, 현재의 네팔 남부지역에 자리한 룸비니에서 탄생한 싯다르타는 석가(sa-kya) 부족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의 성씨는 고타마였으며,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목적을 성취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탁월한 지성과 예민한 성격을 지녔던 싯다르타는 극진한 보살핌 아래 왕궁생활을 영위했지만, 결국 세속의 삶을 버리게 된다.

그의 출가 동기는 ‘사문 유관(四門遊觀)’이라는 일화로 전해지듯이, 생로병사를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고자 그의 나이 29세 때 왕궁을 떠나서 수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싯다르타는 약 6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스승들에게 고행과 명상수행을 배워 익혔다.

베살리(Vesa-lI-)에서는 알라라 칼라마의 지도로 명상법을 배웠고, 라자그리하(Ra-jagr톒a)에서는 웃다카 라마풋타 아래에서 수행했다.

싯다르타는 극심한 고행으로 거의 죽음의 문턱에 이를 정도였으나 진리를 깨칠 수 없었다.

그는 고행을 포기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 보리수 아래 고요히 앉아서 선정에 들었다.

선정에 든 싯다르타는 정각(正覺)을 이루고 붓다(부처)가 되었다.

싯다르타의 이 깨달음은 인류세계의 위대한 인본주의 종교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인류의 수많은 종교들이 인간 이외의 어떤 절대자에 귀의하여 믿음을 요구하지만, 싯다르타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를 깨달아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한 싯다르타는 가장 먼저 이전에 자신과 같이 수행한 다섯 비구를 찾아 가서 첫 가르침을 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二邊)이 있으니 수행자는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붓다의 이 첫 가르침을 불교사에서는 초전법륜이라 하기도 하고 중도 대선언이라 하기도 한다.

모든 인간이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찾으려면 쾌락과 고행이라는 양 극단을 떠난 중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첫 가르침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때부터 싯다르타는 붓다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붓다는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사성제를 설하였다.

붓다에게서 사성제의 가르침을 듣고, 통찰력과 깨달음, 지혜와 광명을 얻게 된 수행자들은 붓다에게 귀의하게 된다.

붓다의 첫 제자들은 나중에 5비구로 불리는데, 아갸타카운디니야, 아슈와지트, 마하나만, 바드리카, 바슈파 등이었다.

그들은 붓다와 그의 가르침, 즉 불과 법에 귀의한 2귀의자로서 제자가 되었으나, 그 이후의 제자들은 불, 법, 승, 3보에 귀의하는 3귀의자로서 교단의 구성원이 되었다.

점차로 늘어가던 교단의 수행자가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에 이르렀을 때,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아, 떠나라.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세간을 사랑하기 위해,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애정과 안락을 위해,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아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도리에 맞고 언설이 잘 정돈된 법을 설하라.”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청하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고도 세심하게 자신의 지혜를 나누어 주었다.

특히 붓다는 설법할 때마다 다른 이를 위해서 보시하고,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날 것이라는 요지의 가르침으로 인과의 법칙을 강조했다.

2. 교단의 성립과 발전 붓다 당시의 교단은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승가(僧伽)로 유행생활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출가자들은 무소득(無所得)을 기본으로 하는 무소유 생활을 실천하였고, 어떠한 재물이나 가축, 노예 등도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교단의 발전을 바라는 재가자의 보시물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갔으며, 붓다에게 귀의하는 자산가들이 기부한 토지와 금전을 토대로 하여 여러 곳에 정사와 사원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발전과정에서도 교단의 성장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카쉬야파 3형제의 귀의이다.

우루빌바(Uluvilva-) 카쉬야파는 500명의 결발(結髮) 외도(jatㆍila)들을 이끌던 수장이었고, 나디(Nadi) 카쉬야파는 300명의 교도를 이끌던 수장이었으며, 가야(Gaya-) 카쉬야파는 200명의 교도를 이끌던 수장이었는데, 이 세 형제가 나란히 붓다에게 귀의하였다.

그들이 함께 이끌고 온 제자들이 모여 불교교단은 그야말로 대도약을 하게 되었다.

둘째, 빔비사라(Bimbisa-ra) 왕의 외호이다.

붓다의 생존 당시에 마가다국의 왕이었던 빔비사라는 15세에 즉위하여 16세에 불법에 귀의했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아자타샤투르의 왕위 찬탈로 인해 유폐된 뒤 죽음을 맞았던 빔비사라 왕은 재위 당시에 불교만 후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불교교단에 대해 우호적으로 베풀었던 것은 교단의 발전에 크나큰 힘으로 작용했다.

붓다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머물 때, 빔비사라 왕은 12만 명에 이르는 브라만과 장자들과 함께 붓다를 찾아가서 설법을 듣고 나서 귀의했던 일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그 때 설법을 들었던 12만 명 중에서 11만 명이 법안(法眼)을 얻었고, 1만 명이 붓다에게 귀의했다고 경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셋째, 최초의 승원(僧園), 죽림정사의 설립이다.

라자그리하에 세워진 죽림정사는 그 당시 최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에 자리함으로써 포교의 본거지로서 큰 역할을 다하였다.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세울 때, 그 입지를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기에 편하며, 이런 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며,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 바로 그런 곳.’ 그 후로 이와 같은 입지가 바로 승원을 세우는 기준이 되었다.

승원은 구조적으로 정사(精舍), 평부옥(平覆屋), 전루(殿樓), 누방(樓房), 굴원(窟院) 등 다양한 양식을 따랐지만, 그 중에서 정사와 굴원이 가장 오랫 동안 사용되었다.

정사는 평지에 벽돌이나 돌로 건립되었고, 굴원은 고원의 암석지대에 인공적인 굴을 뚫어서 만들었다.

현재 남아 있는 굴원과 정사의 흔적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초기교단의 원칙은 유행생활이었지만, 교단의 발전과 더불어서 정주생활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 정립된 교단의 구성원은 비구와 비구니, 사미와 사미니, 식차마나와 우바새, 우바이 등으로 세분되었다.

초기불교 이래로 불교의 교단은 다양한 구성원 간에도 상호 민주적이며 평등하게 유지되어 왔으며, 이러한 교단 운영법은 붓다 당시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

일찍이 붓다는 선언했었다.

“아난다여, 여래에게는 ‘나는 비구 승가를 보살핀다’라든지 ‘비구 승가는 나의 지휘 아래 있다’라는 생각은 없다.

” 붓다 당시에도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교단이 운영되지 않았듯이, 후대의 불교교단사에서도 교단 구성원의 자율과 화합을 통해서 유지되었던 것은 당연한 추이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붓다는 5비구의 출가를 계기로 승가(僧伽)를 형성하였고, 이후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여 비구니를 포함한 승가공동체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재가 신도들의 시주와 귀의로 우바새, 우바이도 포함된 사부대중(四部大衆) 공동체를 붓다의 교단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교단의 구성원은 흔히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으로 보고 있다.

3. 경전의 결집 붓다의 가르침은 그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던 제자들에 의해서 구두로 전해졌다.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evamㆍmaya- srutam. 如是我聞).” 이와 같은 서두로 그들은 전법을 시작했다.

본래 붓다는 모든 가르침을 구술로 전달했다.

그의 전 생애 동안 자신이 글로 써서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의 설법을 들었던 수많은 제자와 신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그러한 소망의 결과가 바로 경전으로 남게 된 것이다.

경전편찬은 ‘결집’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결집은 합송(合誦), 합주(合奏), 집회(集會)라고도 한다.

결집의 원어인 상기티(samㆍgI-ti)는 제자들이 한데 모여서 기억하고 있는 가르침을 일제히 읊는 것으로, 이의가 없음을 표시하여 불설(佛說)을 확정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뜻에서 결집은 ‘성전의 편집’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컨대, 경전편찬을 위한 집회가 결집이다.

경전은 바구니에 담아서 보관하던 관습에 따라 세 종류의 바구니, 즉 삼장(三藏)이라 부른다.

삼장은 경장, 율장, 논장으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삼장의 형식으로 불교경전이 완성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걸렸다.

기본적인 경전은 서기 250년경까지 그 대부분이 완성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불교경전은 크리스트교의 바이블이나 이슬람교의 코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1차 결집 가장 최초의 결집은 붓다의 열반 직후에 이루어졌다.

붓다가 입멸하자 몇 가지 우려가 있었다.

즉 그의 가르침이 차츰 없어진다든가, 잘못 전해진다든가, 이론(異論)이 제기된다든가 하는 등의 일이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또 교단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불제자들이 모여 각기 구전으로 기억하고 있던 교법을 함께 합창하여 서로 확인하고 가르침을 정리할 회의, 즉 결집이 이루어졌다.

제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에서 500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경장과 율장을 편찬하였다.

그래서 ‘500결집’이라고도 한다.

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의 교외에 있던 칠엽굴(七葉窟)에서 이루어졌는데, 마하카쉬야파(maha-ka-syapa)의 주도 아래 아난다(a-nanda)가 경장을 암송하였고, 우팔리(Upa-li)가 율장을 암송하였다고 전한다.

이 때 편찬된 내용은 후대 불교사의 지침이 되는 근본 경전으로서 가장 중요시되었다.

경전을 보면, 붓다는 그 당시 귀족층이 사용하던 고급언어였던 산스크리트어뿐 아니라 베다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민중을 상대로 한 교화 설법에서는 주로 속어였던 마가다어를 사용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최초의 경전 결집, 즉 제1차 결집 당시에 사용된 언어 또한 마가다어라는 것이 합리적인 귀결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근거는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초기 경전 언어로서 기록이 남아 있는 팔리(pa-li)어 속에 몇몇 잔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제2차 결집 기원전 383년경 제2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바이샬리(Vaisa-lI-)결집 또는 700결집이라고도 불린다.

붓다의 입멸 후 100년경,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사(Yasa, 耶舍) 비구는 바이샬리의 브리지(vr톔i)족 출신의 비구들이 계율에 위반되는 10가지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700명의 비구들을 바이샬리에 소집하여 그러한 10가지에 대해 심의했다.

그 때 회의에서는 10가지의 사안, 즉 ‘10사(事)’가 옳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이단이라고 간주하였다.

하지만 팔리 율장에서는 10사를 심의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스리랑카의 왕통사(王統史)인 『디파방사(DI-pavam톝a)』와 『마하방사(Maha-vam톝a)』에는 이 심의 다음에 성전의 결집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 때의 일을 제2차 결집이라고 부른다.

그 당시에 논의되었던 10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금을 뿔 속에 담아서 지니는 것. 둘째, 정오가 지난 뒤 공양하는 것. 셋째, 한 마을에서 탁발을 한 뒤 다른 동네에서 탁발하는 것. 넷째, 한 구역에서 포살을 두 곳 이상 나누어서 하는 것. 다섯째, 어떤 일을 하고 나서 나중에 허가를 받는 것. 여섯째,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 일곱째, 공양 후에 발효된 우유를 마시는 것. 여덟째, 발효된 과즙을 마시는 것. 아홉째, 앉거나 눕는 자리 깔개를 사용하는 것. 열째, 금이나 은을 시주 받는 것. 이상의 열 가지가 모두 정법(淨法)으로서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이들에 대해서, 결집을 통해서 모두 비법(非法)이라고 결의하였던 것이다.

다만 아난다의 직제자로서, 그 당시 법랍 120년에 이르던 최고의 장로 사르바카마는 9가지는 비법(非法)이지만,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은 경우에 따라 인정할 수도 있다고 판정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그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분분하였던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더욱 첨예한 대립을 낳았고, 분파를 야기시키는 큰 요인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제1차 결집은 단순히 경과 율의 결집이었으나, 제2차 결집은 율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상 차이가 난다.

제3차 결집 아쇼카 왕은 인도대륙 전역을 하나의 통치권 아래 지배했던 최초의 제왕으로 유명하다.

그는 강력한 무력 통치권을 기반으로 하여 인도대륙을 하나의 정치적 통합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피비린내 나는 정복전쟁을 거듭하던 아쇼카 왕은 기원전 260년경 불교도로 전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 아쇼카 왕은 부왕이었던 빈두사라 왕이 그랬듯이, 아지비카 교도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불교에 귀의한 뒤, 불살생의 원리를 실천하고 공평무사한 정책을 통해서 만인의 인심을 얻은 아쇼카 왕이 불교를 위해 공헌한 일들은 지대하다.

수많은 불교승원과 기념탑을 세웠고, 불교도를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몸소 붓다의 유적을 찾아가서 참배하였다.

여러 왕비들이 낳은 자녀들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는데, 그들을 곳곳에 전법사로 파견하였다.

이와 같이 불법을 널리 펴던 아쇼카 왕이 즉위 17년째 되던 해,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Pa-tㆍaliputra, 華氏城)에서 목갈리풋타팃사(Moggaliputtatissa)의 주도로 1,000명의 비구를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이를 1,000결집, 화씨성 결집, 1,000집법(集法) 등으로 부른다.

제3차 결집에서는 인도 자체와 스리랑카 등의 외국에 정통 교의를 전하는 성전을 편찬했으며, 논서들을 논장(論藏)으로 집성함으로써 비로소 3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3장을 편찬하는 데 총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특히 목갈리풋타팃사는 별도로 『카타밧투(Katha-vatthu, 論事)』를 지어서 그릇된 견해를 논박했다.

이러한 사실은 남전(南傳)의 율장(律藏)이나 『마하방사』와 『디파방사』 등에 기록되어 있다.

제4차 결집 서북 인도를 지배하던 카니슈카 왕(서기 73~103년 재위) 시대에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을 편집했던 일을 가리켜 제4차 결집이라 말한다.

현장(玄斡) 스님이 번역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발(跋)」에 의하면, 제4차 결집은 불멸 400년경에 카슈미르(KasmI-ra)의 환림사(環林寺)에서 이루어졌다.

파르슈와(Pa-rsva) 존자가 카니슈카 왕에게 건의하여 후원을 받아내서 3장에 정통한 500명의 비구들을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그 때 집대성된 것이 총 30만 송(頌) 660만 언(言)에 달하는 대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毗達磨大毘婆沙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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