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룬 아나빠나싸띠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huddhasa 서문(preface) 이 책의 앞 부분은 순룬 위빳사나 명상이라는 이름의 작고한 아라한인 민쟌의 순룬 우 까위이 세야도에 의해 전해진 명상방법을 순룬 우 와라 세야도(미안마 까바에 명상센타 3대선원장)가 간결하게 정리(설명)한 것이다.
닙바나의 길이라는 이 책의 뒷 부분은 인도의 비하르주의 붓다가야에서 4번째로 열린 빠알리 삼장 독송 의식에서 우 와라 세야도에 의해 설해진 가르침이다.
그것은 2008년 12월 1일밤, 고따마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했고 붓다가 된 보리수나무 아래서 설해졌다.
준비단계(parikam)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asambuddhassa(3번) 만일 내가 윤회의 시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존귀한 붓다, 담마와 상가, 나의 부모, 스승님과 지각 있는 모든 존재에 거슬러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어떤 나쁜 행위(커거나 작거나)을 행했다면, 나는 어떤 살아있는 존재에 대하여 심지어 아주 작은 나쁜 행위 조차도 행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고 참회합니다.
이 명상 시간 동안 높으신 붓다에게 나는 닙바나 성취를 목적으로 나의 오온(몸과 마음)을 바칩니다.
이 명상 시간 동안 존경할만한 순룬 구[1] 짜웅[2] 세야도[3]에게 나는 닙바나 성취를 목적으로 나의 오온을 바친다.
윤회하는 삼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3번 반복) 나의 이 공덕[4]을 삼계의 모든 존재들과 함께 나눕니다.
바라오니, “사두[5]”를 외침으로써 나의 공덕을 나누어 가지시기를! 나 역시도 훌륭한 존재들에 의해 행해진 칭찬할 만한 모든 가치 있는 행위들을 함께 나누어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6] “Sun Lun Vipassanā meditation method(순룬 위빳사나 방법)” 순룬 위빳사나 명상방법은 민쟌의 작고한 아라한인 순룬 세야도 우 짜웅에의해 발견됐다.
그는 그 자신 스스로 굉장한 노력과 마음 챙김을 실행했다.
집중적이고 계속적인 마음챙김의 넉달 후에, 그는 arahatship(아라한과)을 성취했고 그리고 유명하고 위대한 아라한이 되었다.
순룬 세야도 지[7]는 1878년에 민쟌읍에서 가까운 순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에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1952년에 죽었다.
그는 1920년 6월에 아나빠나(들숨 날숨) 위빳사나 명상 훈련을 시작한 후, 1달 동안 굉장한 마음챙김으로 수행하여 7월 13일 밤10시에, sotāpattimagga(예류과, 첫 번째 단계의 깨달음)을 성취했다.
그는 예류자(흐름에 든 자)가 되었다.
그는 강렬한 sati로 명상을 계속했다.
두 번째 달, 8월 13일 밤 10시에, 그는 sakadāgāmimagga(일래도, 두 번째 단계)를 성취했다.
그는 일래자(한 번만 돌아오는 자)가 되었다.
세 번째 달, 9월 13일 밤 10시에, 그는 anāgāmimagga(불환과, 세 번째 단계)를 성취했다.
그는 불환자(돌아오지 않는 자)가 되었다.
아나가미 도를 성취한 후, 그는 출가하여 사미(예비승)가 되었다.
사미시절에, 그는 강한 sati를 가지고 위빳사나 명상을 계속했다.
10월 13일 밤 10시에, 그는 아라한도(네 번째 단계)를 성취했다.
그는 아라한(고귀한 존재)이 되었다.
아라한이 된 후, 그는 이 순룬 위빳사나 명상 방법을 가르쳤다.
이 방법은 간단하고, 명확하고, 구체적이고, 완벽했고, 더하거나 뺄 것이 없었다.
간결한 구조는: “닿음(Touch) – 앎(Awareness) – 마음챙김(Mindfulness)”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하거나 알아차림(sati)이 되야 된다.
당신은 네 가지 자세 모두에 마음챙김(sati)이 되야 된다.
그것은 앉고, 서고, 걷고 그리고 잠자는(눕는) 자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앉는 자세는 보통 사람에게 가장 이상적인 자세이다.
얇은 매트나 타올이 깔린 마루바닥에 앉아라. 두꺼운 방석 앉지 말라. 앉는 자세에 있어서, 순룬 명상 방법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들숨날숨(아나빠나 싸띠)에 알아차림이고, 두 번째 부분은 몸의 감각(vedanā)에 마음을 두는(sati)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적어도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을 움직이거나 자세를 바꾸지 않고 앉는 것에 적합한 한 자세로 앉는 것이다.
가장 좋은 자세는 결가부좌를 하고 앉는 것이다.
느슨하게 앉지 말라. 견고하게 앉아라. 그래야 고통스러운 감각이 일어날 때 움직이거나 자세를 바꾸지 않고 그러한 고통스러운 감각에 마음챙길 수 있다.
결가부좌하고 등은 곧게 세우고 앉아라. 너의 오른손은 왼손바닥 위에 두어라. 너의 두 팔은 너의 몸 옆에 붙여라. 너의 코끝과 호흡의 시작점에 너의 sati를 두어라. 코끝이나 위 입술에 sati가 되도록 노력해라. 만일 네가 sati가 된다면, 너는 코끝이나 위 입술에 공기가 닿는 것을 알 것이다.
너는 닿는 것을 아는 그곳에 주의 집중해야 한다.
만일 네가 닿는 모든 현재순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면, 그때 너는 위빳사나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빳사나 명상은 “물질 위에 마음”을 두는 훈련이다.
공기는 물질이다.
그리고 코끝이나 또는 윗입술 또한 물질이다.
네가 강렬한 주의 기울임과 함께(sati) 숨쉴 때, 너는 공기와 코끝이라는 두 물질의 닿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 “닿는 것에 대한 앎”(the awareness of touch)에 주의 집중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위빳사나 명상의 올바른 길 위에 있다.
순룬 명상 방법은 위빳사나 야니까(yānika, 위빳사나 행자) 방법이다.
이 방법에서 선도적인 요소는 위빳사나이고 사마타는 위빳사나 뒤에 따른다.
예를 들면, 만일 네가 열 번을 숨쉰다고 가정하고, ‘닿음에 대한 앎’에 네 번 주의 집중(sati)이 있다면, 그 네 번은 위빳사나 명상이다.
나머지 여섯은 닿는 것의 앎에 sati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사마타 수행이 될 것이다.
너는 충분하고 구체적인 삼매를 얻기 위해서 약 45분에서 한 시간 동안 강렬한 주의 기울임(sati)으로 숨쉬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강하고, 짧고, 빠른 숨을 쉬는 것이 더 좋다.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쉬어야 하는가? 우리는 [공기가 코끝이나 윗입술에] 닿는 것을 알 정도로 충분히 강하게 호흡하는 것이 필요하다.
너의 숨이 강하든지 부드럽든지 간에, 만일 네가 닿는 것(공기가 코끝이나 윗입술에)을 알지 못한다면, 그때 그것은 잘못된 위빳사나 명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접촉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네가 모든 닿는(접촉)것에 대한 앎에 주의 기울일(sati) 때 오로지, 그때 너는 올바른 위빳사나 명상 방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네가 숨쉬는 동안 닿는 것을 안다면, 너는 위빳사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네가 숨쉬는 동안 닿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삼마타 이다.
순룬 명상 방법은 위빳사나 야니까 이다.
이 방법에서 선도적인 요인은 위빳사나이다.
삼마타는 위빳사나 뒤에 따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짧고 빠르게 숨쉬는 것이 더 낫다.
짧고 빠른 호흡은, 한 번 닿고 다른 호흡이 닿는 것 사이의 시간 간격은 매우 짧다.
그래서 마음은 밖으로 나가거나 어떤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빨리 삼매(선정, 집중력)를 얻는다.
우리는 중단 없이 전체 호흡명상 시간 동안(45분간) 위대한 주의 기울임(sati)과 함께 지속적으로 숨쉬어야 한다.
아나빠나 호흡 시간에 있어서, 순룬 구 짜웅 세야도는 중요한 규칙을 정했다.
“네가 지쳤을 때도 멈추지 말라”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지칠 때 마다 언제나 숨을 멈춘다면, 그때 우리는 구체적인 삼매를 신속하게 얻지 못할 것이고 위빳사나 명상에 우리의 진보는 느려질 것이다.
왜 우리는 지치는가? 우리는 들숨과 날숨의 균형이 맞지 않고 한결 같지 않기 때문에 지친다.
모든 사람들의 날숨(토하는 숨)은 들숨보다 더 강하다.
천천히 천천히 네가 조만간에 숨을 쉴 때 서서히 당신의 폐 안에 적은 공기만이 남는 때가 온다.
너의 폐에 있는 공기가 적어지기 때문에, 너는 지칠 것이다.
만일 네가 지친다 해도 숨쉬는 것을 멈추지 말라. 너는 닿는 지점에 강한 주의 집중(sati)을 두면서 더 강하게 숨을 들이 쉬면서 숨쉬기를 계속한다.
얼마간 지나서, 들숨과 날숨이 균형이 잡힐 때, 그때 피로는 사라진다.
이 방법으로, 너는 모든 현재 순간 닿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계속해서 숨을 쉬고, 그리고 빨리 삼매를 얻을 수 있다.
Sati를 가지고 강하고 짧고 빠르게 45분을 호흡한 후, 그것은 숨을 멈추는 시간이 될 것이다.
너는 약 100번정도 강렬한 sati로 강하게 호흡한다.
너는 한번 깊은 호흡을 하고, 숨을 잡고 너의 마음으로 몸 전체를 관찰한다.
마음은 자동으로 가장 명백하거나 고통스러운 감각에 갈 것이다.
너의 마음을 그 감각에 두라 그리고 그것을 강한 sati로 관찰하라. 그 감각이 일어나는 그대로 주의 집중한다.
만일 그 감각이 통증이라면, 고통스러운 감각에 대한 앎에 마음집중(sati)한다.
만일 감각이 경직된 것이라면, 그 경직된 감각에 대한 앎에 마음을 집중한다.
처음에, 너의 sati는 단지 감각 위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너의 무릎이나 각 사지마디나 너의 몸 한 부분이 아프다는 것을 알 것이다.
네가 움직이지 않고 머물면서 그리고 너의 sati를 감각에 침투하도록 할 때. 그때 너는 단지 고통스러운 감각만을 알 것이다(몸에 대한 지각 없이). 너는 통증이 너의 무릎이나 사지마디나 너의 몸 어떤 부분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때, 몸에 대한 너의 개념(지각)은 사라질 것이다.
너는 오직 고통스러운 ‘감각에 대한 앎’에 주의 집중(sati)하고 있다.
너는 위빳사나 명상 수행의 올바른 길에 있다.
순룬세야도 지는 위빳사나 명상의 두 번째 부분에 하나의 규칙을 정했다.
두 번째 부분은 감각(vedanānupassana)에 마음 챙김을 둔다.
순룬세야도 지 까위는 말했다.
“움직이거나 자세를 바꾸지 말라”(경련이나 고통스런 감각일 때) 움직이지 말고 그 감각에 부지런히 주의 집중하며 우리는 요기(수행자)에게 움직이지 않고 머물도록 요구한다.
그것은 고문이나 그를 고통스러운 감각으로 괴로움을 겪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네가 움직이지 않고 그 감각에 마음 챙기며 머물 때, 너의 sati는 감각에 침투할 것이고 그리고 너는 그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주의 집중하고 있는 그 감각이 영원하지 않고 변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너는 무상(anica)의 진실을 깨닫고 이해할 것이다.
네가 움직이지 않고 그 감각에 마음 챙기면서 머물 때, 너는 너의 몸이 행복(sukha), 고통(dukkha)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고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괴로움(dukkha)의 진실을 알고 이해할 것이다.
불쾌한 감각이 매우 고통스러울 때, 너는 이 고통스러운 감각이 빨리 사라지기를 원한다.
고통스러운 감각은 사라지거나 또는 스스로에 의지하여 진정된다.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그렇게 너는 영혼 없음 또는 무아를 알고 이해할 것이다.
너는 무아(anatta)의 진실을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너의 sati를 감각에 침투시키거나 꿰뚫게 하고 그리고 강한 sati로 감각을 관찰할 때, 너는 무상(anica), 고(dukkha), 무아(anatta)를 알거고 이해할 수 있다.
얼마 동안 우리는 감각에 sati를 해야 하는가? 우리는 숨을 멈춘 후에 그 감각에 sati를 시작하고, 우리는 그 감각이 시작되고 완전히 끝나거나 사라질 때까지 감각의 연속(sequence)[8] 전체를 뒤따라야 한다.
감각의 연속이 끝나거나 사라지는 데는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또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감각에 sati가 뒤따라야만 하는 가는 각자의 개별적인 감각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앉는 것은 단지 오랜 시간 동안 좌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감각의 연속이 끝날 때까지 뒤따라서 지켜보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앉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감각의 끝에서, 만일 우리가 운이 좋거나 그리고 만일 우리가 전생의 바라밀(완성)를 갖추었다면, 그때 우리는 도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몸의 어떤 부분도 움직이거나 자세를 바꾸지 않고 부지런히 감각에 sati하면서 고요히(움직이지 않고) 머무는 것에 의해 큰 이익을 얻는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머물고 감각에 우리의 sati를 침투케 하거나 또는 꿰뚫게 할 때, 우리는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감각을 알고 주위를 기울인다.
감각의 일어남과 혀는 생멸의 사라짐을 아는 지혜(udayabbaya ñāṇa)라 불린다.
우리는 알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지혜를 얻는다.
우리가 위빳사나 명상 수련을 할 때, 우리는 열 가지 마음의 경지 또는 열 가지 위빳사나 통찰 지혜를 통해서 나아가야 한다.
첫 번째가 원인의 지혜인 명상의 지혜(sammassana ñāṇa)이다.
너는 네가 무엇을 하든지 모든 현재순간에 sati가 되도록 노력한다.
그것이 명상의 지혜이고, 첫 번째 위빳사나 통찰지이다.
나머지 아홉 가지 지혜, 생멸의 지혜(bhaṅga ñāṇa)부터 수순 하는 지혜(anuloma ñāṇa)가 결과의 지혜다.
네가 오온에, 특히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감각(vedanā)에 sati를 둘 때, 그것은 생멸의 지혜이다.
생멸의 지혜는 두 번째 위빳사나 통찰지이다.
너는 감각에 부지런히 계속해서 주의 기울이고 그러면 떨어지고 깨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일어나는 것 보다 더 명백하거나 두드러진다.
너의 오온의 무너짐 또는 깨어짐의 앎에 대한 주의 기울임이 세 번째 위빳사나에 통할 지혜이다.
무너짐의 지혜라 불리는 (bhanga ñāṇa)이다.
계속해서 부지런한 sati로 네가 오온이 일시적이고,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깨닫게 된다.
네가 너의 마음과 몸(오온)이 일시적이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깨닫게 될 때, 그때 너는 오온이 두려워진다.
그것은 두려움의 지혜(bhaya ñāṇa)라 불리는 네 번째 위빳사나 지혜이다.
계속해서, 부지런히 sati함으로써, 너는 모든 사람의 오온이 일시적이고, 불안전하고, 불쾌하고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거나 깨닫게 된다.
너는 오온의 부족함과, 결점 그리고 위험을 이해하고 주의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위험의 지혜(ādīna ñāṇa)라 불리는 다섯 번째 위빳사나 통찰지혜이다.
네가 오온 모두가 부족함, 결점, 그리고 위험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때, 너는 오온에 넌더리 나고, 싫어하고, 혐오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역겨움의 지혜(nibbida ñāṇa)라 불리는 여섯 번째 위빳사나 통찰지혜이다.
네가 오온에 넌더리가 날 때, 너는 오온은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너는 오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그것은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nuñcitukamyatā ñāṇa)라 불리는 일곱 번째 위빳사나 통찰지혜이다.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는 대양의 중간에 항해하고 있는 배 위에 있는 작은 새의 비유로 설명될 수 있다.
작은 새는 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날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대양은 너무 넓고 육지는 매우 멀며, 그 작은 새는 육지에 도달하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는 배로 돌아온다.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에 도달한 요기(수행자)는 오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위빳사나 명상은 오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에는 충분히 강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다시 오온에 계속해서 부지런히 sati해야만 한다.
당신은 다시금 위대한 주의 기울임과 함께 감각을 지켜보며 고요히 머무른다.
그것은 다시 깊이 숙고(다시 시작)하는 지혜(paṭisaṅkhā ñāṇa)라 불리는 여덟 번째 위빳사나 명상의 지혜이다.
계속해서 부지런히 감각에 sati를 해 나감에 따라, 당신은 즐거운 감각이든, 괴로운 감각이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중립적인 감각이든, 어떠한 감각이든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이 주의 기울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깨끗하고 또렸하고 집중된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감각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너는 그것을 강한 sati로 견딜 수 있다.
만일 감각이 매우 희미하다면, 그 희미한 감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릴 수 있다.
그것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aupekkha ñāṇa)라 불리는 아홉 번째 위빳사나 통찰 지혜이다.
계속해서 부지런히 sati를 함으로 인해, 너는 너의 마음이 더 낮은 지혜의 단계에서 닙바나인, 더 높은 도의 지혜로 일치되고 그리고 적응이 되는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그것은 수순의 지혜(anuloma ñāṇa)라 불리는 열 번째 위빳사나 통찰지혜 이다.
위빳사나 명상을 수행하는 누구든지 도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열 가지 위빳사나 통찰지혜를 거쳐야만 한다.
만일 네가 열 가지 지혜 모두를 완성했다면 그때 너는 예류자라 불리는 첫 번째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너는 예류자(흐름에 든자)가 된다.
네가 두번째로 열 가지 지혜 모두를 완성했을 때, 너는 일래도라 불리는 두 번째 단계에 도달 할 것이다.
너는 일래자(한 번만 돌아 오는 자)가 된다.
만일 네가 세 번째로 열 가지 지혜 모두를 완성한다면, 너는 불환도라 불리는 세 번째 단계를 얻을 것이다.
너는 불환자(돌아오지 않는 자)가 된다.
만일 너는 네 번째로 열 가지 지혜 모두를 완성한다면, 너는 아라한도라 불리는 네 번째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너는 아라한(고귀한 존재)가 될 것이다.
아라한은 그에게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이 없다는 것을 안다.
아라한은 그가 번뇌가 다한 순수한 삶을 산다는 것을 안다.
그는 도의 지혜를 깨닫기 위하여 해야만 했던 것을 모두 이루었고 그는 그와 같은 깨달음을 위해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위빳사나 명상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 도의 지혜를 얻기 위해 거쳐야만 할 열 가지 위빳사나 통찰지혜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다.
너는 네가 도의 지혜를 얻을 때까지 너의 지혜의 단계를 더욱 더 높이도록 감각이나 오온에 계속해서 부지런히 주의 기울여야 한다.
너가 움직이지 않고 그리고 계속해서 부지런히 감각에 마음 챙기며 앉아 있을 때, 너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알 것이다.
그 아는 것은 kayānupassī(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이라 불리어 진다.
감각을 알아차리고 그리고 감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은, vedanānupassī(감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이라 불리어진다.
네가 감각에 대한 단순한 앎 그 자체에 마음 챙길 때, 그것은 마음에 대한 지속적 관찰이라 불린다.
내가 무상.고.무아의 현상에 마음 챙길 때, 그것은 법에 대한 지속적 관찰이라 불린다.
어느 것이 되든, 우리는 모든 현재 순간에 알아차림이 되야 한다.
우리는 네 가지 자세나 또는 자리 모두에서, 즉 앉는 것, 서 있는 것, 걷는 것 그리고 눕는 자리에서 위빳사나 명상을 행해야 한다.
걸을 때, 너는 너의 발이 땅에 닿는 것에 마음 챙겨야 한다.
너는 너의 발이 땅에 닿는 모든 현재 순간 마음 챙겨야 한다.
네가 먹을 때, 너의 손이 음식에 가고, 음식을 집고, 너의 입에 넣고, 씹고 그리고 삼키는 것을 마음 챙긴다.
잠자는 자세에서, 만일 네가 너의 호흡에 sati를 원한다면 그때 강한 sati로 너는 코끝의 공기가 닿는 부분에 주의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닿는 부분에 집중되게 노력해라. 만일 네가 숨쉬는 것에 주의 기울이기(sati)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때 너는 몸 전체를 sati로 관찰한다.
너의 마음은 자동으로 가장 명백하고 드러난 감각에 간다.
그 감각이 있는 그대로 주의 기울이려고 노력해라,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감각은 진정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잠에 떨어질 것이다.
네가 일어날 때, 네가 잠에서 완전히 깨기 전에, 너의 sati는 감각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 자세나 자리 모두에서 마음챙기고 위빳사나 명상을 수행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다섯 가지 힘(오력)을 가지고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 위빳사나 명상을 해야만 한다.
그것들은 믿음의 힘(saddhā bala, 강력한 믿음 또는 신념), 정진의 힘(viriya bala, 강력한 노력), 알아차림의 힘, 삼매의 힘, 지혜의 힘이다.
네 가지 종류의 힘, 각각은 믿음, 정진, 삼매 그리고 지혜이다.
우리는 그것에 넘치거나 모자랄 수 있다.
오로지 sati의 힘은, 우리는 결코 그것을 넘치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현재 순간에 강력한 sati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깨달으신 고따마 붓다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마음 챙김의 확립)과 그리고 부지런히 sati를 행한다면, 너는 7일에서 7년 안에 아라한 도나 또는 불환도 성취할 수 있다.
이 四念處 수행은 존재들의 마음을 정화하기 위한, 왜냐하면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육체적인 고통과 그리고 정신적인 고민을 완전히 파괴하고, 고귀하고 성스러운 도의 성취와 그리고 닙바나의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길이라고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존재들이 이 바로 현재의 삶에서 쉽고 빠르게 닙바나를 성취하기를! 닙바나에 이르는 길 오늘, 나는 닙바나의 길에 관해 설명하고 싶다.
나는 위빳사나 듀라승 이기 때문에, 나는 실제적인(경험적인) 관점에서 “닙바나의 길”을 설명할 것이다.
내가 세부적인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닙바나의 뜻을 알 필요가 있다.
‘닙바나’란 무엇인가? 닙바나의 정의 중 하나는 “모든 괴로움의 끝”이다.
닙바나를 알고 이해 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괴로움을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존재들은 samsarā라 불리는 태어나고 죽는 순환을 계속 하고 있다.
삼계의 어떤 존재이든 일단 태어나면, 질병,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고뇌, 절망을 겪게 된다(生.老.病.死). 너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될 것이다(愛別離苦). 너는 좋아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머물고 관계 맺게 된다(怨憎會苦).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求不得苦). 이것들은 모든 존재들이 만나거나 마주쳐야만 하는 모든 고통(四苦 八苦)이다.
깨달은 붓다와 깨달은 모든 붓다들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을 행할 것을 권했다.
닙바나에 도달하는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길은 마음챙김의 확립을 행하는 것이다.
마음챙김의 이 수행(실천)은 삼계의 모든 존재들에게 적합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존재들을 여섯 가지 기질로 나눌 수 있다.
이것들 여섯 가지는 Lobha: 탐욕. Dosa: 화내거나 혹은 성질이 급한 것; 적의 Moha: 무지, 당혹, 현혹 Sadhā: 믿음으로 가득찬 또는 확신 Vitakka: 몽상적인, 사유하기를 좋아하는, 지적인 Paññā: 지혜, 지능적인 Lobha, 거친 형태의 탐욕은, 다른 사람의 돈이나 물건을 다른 사람의 허락이나 동의 없이 힘으로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매우 미세한 형태의 탐욕은, 네가 어떤 것을 보았을 때, 너는 네가 본 것을 좋아한다.
네가 본 것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탐욕의 미세한 형태이다.
네가 들을 때, 냄새 맛을 때, 네가 맛볼 때, 네가 접촉할 때, 네가 생각할 때는 언제나, 만일 너의 마음에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때 그것은 당신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탐욕의 매우 미세한 형태이다.
Dosa, 거친 형태의 분노인 dosa는, 네가 다른 사람과 언쟁하고 싸우는 것이다.
매우 미세한 형태의 분노는 네가 어떤 것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만지거나, 생각 할 때는 언제나 너의 마음속에 싫어함이 있는 것이다.
그 싫어함은 당신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매우 미세한 형태의 분노이다.
무지인 moha는, 네가 옳고 그른 것, 진실과 거짓,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당혹이다.
무지는 마음을 오염시킨다.
신뢰나 신념인 sadhā는 그것에 관해 주의 깊은 생각 없이 매우 쉽게 믿는 것이다.
Vitakka는 상상이나 그리고 몽상에 생각이 잠긴 사람이다.
Paññā는 지혜.지성이다.
쉽게 그리고 빨리 이해하는 이 마음 챙김의 확립의 실행은 여섯 가지 기질 모두에게 적합하다.
4념처(네 가지 확고한 마음 챙김)은 다음과 같다.
몸(kāya)에 대해 계속해서 관찰(몸에 대한 마음챙김) 감각(vedana)에 대해 : (감각에 대한 : ) 마음(citta)에 대해 : (마음에 대한 : ) 법(dhamma, 현상)에 대해 :(현상에 대한 : ) 실제로, 네 가지 모두는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몸에 대해 마음 챙기는 것이 더 분명하고 두드러질 때, 우리는 그것을 몸에 대해 계속해서 관찰한다 라 부른다.
느낌에 대해 마음 챙기는 것이 더 분명하고 두드러질 때, 우리는 그것을 감각에 대한 계속해서 관찰함 이라 부른다.
마음에 대해 마음 챙기는 것이 더 분명하고 두드러질 때,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 대해 계속해서 관찰함이라 부른다.
현상에 대해 마음 챙기는 것이 더 분명하고 두드러질 때, 우리는 그것을 담마에 대해 계속해서 관찰함이라 부른다.
그것은 한 그릇의 국과 같다.
국속에 설탕, 소금, 레몬 그리고 고추를 넣는다.
설탕을 더 넣으면, 우리는 그것을 달콤한 국이라 부른다.
소금을 더 넣으면, 우리는 소금 국이라 부른다.
레몬을 더 넣으면 우리는 그것을 시큼한 국이라 부른다.
고추를 더 넣으면, 우리는 그것을 매운 국이라 부른다.
국에 비록 설탕, 소금, 레몬 그리고 고추 네 가지 재료 모두 들어가 있지만, 우리는 맛이 더 명확하거나 선명한 쪽 국을 이름 붙인다.
유사한 방법으로, 우리는 네 가지 확고한 마음 챙김에 두드러진 맛에 따라 이름 붙인다.
즉 身.受.心.法에 대해 계속해서 관찰한다.
라고 이름 붙인다.
네 가지 확고한 마음 챙김인, satipaṭṭhana 수행은, 우리는 들숨과 날숨에 마음챙김으로 출발한다.
이 들숨과 날숨에 마음 챙김은 아나빠나 명상이라 불린다.
네가 움직이거나 자세를 바꾸지 않고 대략 적어도 1시간 30분 동안 머물 수 있는 자세로 앉아라. 가장 좋은 자세는 결가부좌로 앉는 것이다.
너의 등은 곧게 유지해라. 두 팔은 왼손 바닥에 오른 손을 두고 너의 몸통에 붙인다.
너의 눈은 감아라 그리고 너의 마음은 코끝에 두라 그리고 강한 마음 챙김으로 숨을 쉰다.
만일 네가 강한 마음 챙김으로 호흡한다면, 너는 코끝에 공기가 닿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공기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그 “닿음에 대한 앎”에 주의 집중하라. 코끝에 공기가 닿는 모두에 마음을 집중하라. 네가 안이나 밖으로 따라가는 것은 필요치 않고, 코끝의 닿음에 바로 마음을 집중하라. 만일 네가 닿음에 대한 앎에 마음이 집중 된다면, 우리는 몸에 대해 계속해서 관찰하는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또한 위빳사나(통찰) 명상이라 불리어 진다.
무엇이 위빳사나 인가? 위빳사나 명상의 정의 중에 하나는 “물질 위의 마음”에 주의 집중하는 것이다.
공기는 물질이다.
그리고 코끝도 또한 물질이다.
네가 호흡할 때, 두 물질이 닿는다.
Sati를 가지고 네가 공기가 코끝에 닿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네가 그 닿음에 대한 앎에 마음을 집중할 때, 또한 몸에 대한 계속해서 관찰이라 부른다.
우리는 충분한 집중(삼매)를 얻기 위해 약 45분 동안 계속해서 호흡해야 한다.
초심자는 강하고, 짧고, 빠르게 숨을 쉬는 것이 더 좋다.
우리가 짧고, 빠르게 숨 쉴 때, 한 번 닿고 다른 것이 닿는 것과 시간 간격은 매우 작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거나 어떤 생각에 관해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너의 sati는 바로 닿는 지점이다.
우리는 빨리 집중(samādhi, 삼매)를 얻는다.
우리의 명상 지도자인, 작고한 아라한인 존경하는 순룬 구 짜웅 세야도께서 호흡 명상 시간에 지켜야 할 하나의 중요한 규칙을 정했다.
“만일 지쳐도 멈추지 말라” 라는 것이다.
우리의 위빳사나 명상의 빠른 진보를 얻을 수 있는 엄중하게 따라야 하는 규칙이다.
만일 우리가 지칠 때마다 언제나 멈춘다면, 그때 우리는 완전하고 구체적인 삼매를 빨리 얻을 수 없고 우리의 명상 진보는 매우 늦어질 것이다.
왜 우리는 숨쉬는 행위에서 지치는가? 왜냐하면 누구나 보통 호흡에서, 내쉬는 호흡이 들이쉬는 호흡보다 더 강하다.
그래서 약 5분 동안 강하게 숨쉰 후, 우리는 우리의 내쉬는 숨이 들이쉬는 숨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친다.
폐에 있는 공기(산소)가 점점 적어진다.
그래서 지친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지칠 때, 약 10번에서 15번 동안 들숨을 더 강하게 숨쉰다.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균형이 맞을 때, 피로는 사라진다.
이 방법으로, 너는 현재 호흡 명상 시간 동안 계속해서 숨쉴 수 있고 그리고 빨리 구체적인 삼매를 얻을 수 있다.
호흡을 멈출 시간 일 때, 우리는 약 100번이나 또는 30초 정도 강하고, 짧고, 빠르게 숨을 쉰다.
우리는 코끝에 모든 닿는 것을 알고 강한 sati로 숨을 쉰다.
그때 우리는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쉬고 그리고 너의 숨을 잡고 숨을 멈춘다.
너의 마음으로, 너는 강한 sati로 몸 전체를 지켜 본다.
마음은 자동으로 가장 선명하고 그리고 명확한 감각으로 간다.
예를 들면, 만일 가장 분명하고 또는 고통스러운 감각이 무릎에 있다면, 마음은 무릎의 고통스러운 감각으로 갈 것이다.
너의 sati가 단지 그 감각의 위에 놓여 있을 때(아직 완전히 관통하지 않고). 너는 너의 무릎이나 너의 사지나 너의 몸의 어떤 부분에 고통이 있는지 알 것이다.
네가 인내심 있게 움직이지 않고 머물 때, 너의 다리나 팔을 움직이거나 자세를 바꾸지 않고, 너는 너의 sati를 감각에 침투 시키거나 꿰뚫게 하라. 너의 sati가 고통스러운 감각에 침투거나 꿰뚫을 때, 너는 고통스러운 감각만을(몸에 대한 지각없이) 있는 그대로 알 것이다.
너는 너의 무릎이나 다리나 또는 몸의 어떤 부분에 고통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너는 고통을 단지 알고 그 고통에 주의 집중한다.
너는 너의 몸 어느 부위에 고통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몸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너의 마음이 감각에 침투하거나 관통할 때에, 너는 이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 것이다.
느낌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느낌은 견고하거나 또는 영속하지 않다.
감각은 항상 변하고, 일어났다 사라진다.
너는 이 감각이 영속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무상)이다.
너는 일시적인; 즉 무상의 법칙을 깨닫거나 이해할 것이다.
감각에 마음 챙길 때, 너는 너의 몸이 괴로움으로 혹은 고통스런 감각으로(dukkha) 가득 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너는 고통의 법칙인 고제(dukkha saccā)를 깨닫고 이해할 것이다.
감각이 매우 고통스럽게 될 때, 너는 이 고통이 사라지거나 진정되기를 원한다.
이 고통스러운 감각이 사라지거나 진정되든지 간에 그것은 그 자연에 의존하고, 우리는 그것(고통)을 통제 하거나 명령할 수 없다.
그것은 영혼 없음, 즉 무아(anatta)라 불린다.
너는 영혼 없음, 자아 없음, 무아의 법칙을 깨닫고 이해 할 것이다.
감각에 sati를 두는 이것은 감각에 확고한 마음 챙김인 vedanānupassī(감각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이라 불린다.
우리는 첫 번째 감각의 한 연속이 끝날 때까지 강한 마음 챙김으로 감각에 뒤따라야 한다.
감각의 한 파장이 끝날 때까지 강한 마음 챙김으로 뒤따를 때, 그것은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얼마나 오랫동안이냐는 개별적인 감각에 의존한다.
우리는 시작부터 그것이 끝날 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않고, 다리나 팔이나 너의 몸의 어떤 부분도 움직이지 않고 매우 인내심 있게 주의 집중(sati)을 기울어야 한다.
만일 운이 좋다면, 그 감각의 끝에서 너는 도의 지혜를 얻을 수 있고 그리고 소따빤나(흐름에 든 자)가 된다.
우리는 수행자(요기)에게 아무리 고통스럽거나 또는 불편한 감각이라 해도 감각에 마음 챙기며 움직이지 않고 머물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수행자(요기)에게 괴로움을 겪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주의 기울임(sati)이 감각에 침투하고 꿰뚫어서 통증을 있는 그대로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처럼 되면 단지 고통만이 알 뿐이다.
너의 마음 챙김이 감각 속을 꿰뚫을 때 너는 이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것이다.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는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ṇa)”라 불린다.
네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앉아서 그리고 강한 sati로 감각을 알 때, 너는 감각의 사라지는 과정을 더 알게 될 것이다.
이때, 당신의 지혜(마음)의 단계는 방가 나냐(무너짐의 지혜)라 불리는 세 번째 단계에 이른 것이다.
너의 지혜의 단계는 무너짐의 지혜(baṅga ñāṇa)라 불리는 세 번째 단계이다.
네가 오온(몸과 마음)이 계속해서 무너진다는(사라지거나 또는 깨지는 것) 것을 알 때, 너는 마음과 몸은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는 너의 마음과 몸이 일어나고 죽는 이 과정이 두렵게 된다.
너의 통찰지의 이 단계가 두려움의 지혜(bhaya ñāṇa)라 불리는 네 번째 단계(마음의 단계)이다.
네가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그리고 강한 sati로 계속 감각을 관찰할 때만 오로지 그때 너의 마음의 단계가 성장할 것이다.
너가 감각에 주의 집중을 계속할 때, 너는 일시적인 “무상(annica)”의 법칙과 괴로움의 법칙인 “고(dukkha)”와 그리고 영혼 없음 혹은 자아 없음이 “무아(anatta)”를 깨닫거나 이해 하게 될 것이다.
너는 오온의 결점이나 또는 부족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 너의 마음의 단계(지혜의 단계)는 위험의 지혜(ādiinava ñāṇa)라 불리는 다섯 번째 단계로 상승할 것이다.
너는 너의 오온(마음과 몸)에 관해 결점이나 부족함을 깨닫거나 이해할 때 너는 넌더리나거나 싫증나게 된다.
넌더리의 이 지혜는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ṇa)”라 불리는 여섯 번째 마음의 단계이다.
네가 오온에 대해서 넌더리나게 될 때, 너는 윤회(saṁsarā)라 불리는 태어남과 죽음의 반복으로부터 탈출하거나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이 지혜는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ccitukamyatā ñāṇa)”라 불리는 일곱 번째 마음의 경지이다.
비록 네가 오온으로부터 자유로워 기를 원한다 할 지라도 너의 삼매와 sati가 자유로워지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다.
너는 감각에 강한 sati를 다시 계속해야 한다.
문헌에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양의 중간의 배위의 작은 새의 예가 있다.
작은 새는 배로부터 떠나기 위해 날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육지는 너무 멀어 배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비록 네가 오온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를 원할 지라도, 너의 집중(삼매)과 sati가 자유로워 지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다.
너는 오온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리고 중단 없이 감각에 강한 sati를 계속해야 한다.
이것이 깊이 숙고하는 지혜(paṭisaṅkha ñāṇa)라 불리는 여덟 번째 마음의 단계이다.
네가 감각에 sati를 계속할 때, 너는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aupekkhā ñāṇa)라 불리는 아홉 번째 마음의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이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의 단계에서, 너의 삼매와 sati는 감각에 있는 그대로 주의 기울일 수 있는 만큼 충분히 강하다.
만일 감각이 매우 강하고 그리고 고통스러워도, 너는 몸의 어떤 부분도 움직이거나 위치를 바꾸지 않고 고통스런 감각에 저항(버티고)하며 마음 챙김 할 수 있다.
만일 감각이 매우 약하거나 또는 즐겁다면 너는 그와 같이 희미하거나 즐거운 감각에 있는 그대로 주의 기울일 수 있다.
너는 감각이 즐겁든지 괴롭든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든지 간에 감각에 계속적으로 마음챙김 할 수 있다.
모든 요기(수행자)들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강한 과 함께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네가 감각에 마음챙김을 계속할 때, 너는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ṇa)라 불리는 열 번째 마음의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그것은 그리고 더 낮은 선행하는 지혜로써 더 높은 도의 지혜로 적응하는 특징(성질)을 가지고 있다.
만일 네가 강한 sati와 그리고 부지런히 수행을 계속한다면 너는 sottapatti magga(흐름에 든자)의 첫 번째 깨달음의 단계를 얻을 것이다.
너는 열 가지 지혜(마음)의 단계(열 가지 위빳사나 통찰지)에 올라 일래과 불환과 그리고 아라한과 각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강렬한 sati로 다시 열 가지 지혜의 단계를 거쳐 오르는 위빳사나 수행을 반복한다.
당신은 감각을 극복한 후 당신의 마음은 이제 마음 자체에 주의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깨끗하고 집중되어 있다(cittānupassi). 만일 너의 마음에 탐욕이 있다면 너는 너의 마음에 탐욕이 있는 것을 안다.
만일 너의 마음에 분노가 있다면 너는 너의 마음에 분노가 있는 것을 안다.
만일 너의 마음에 미혹이나 무지가 있다면 너는 너의 마음에 미혹이 있는 것을 안다.
만일 너의 마음이 위빳사나 명상의 목표로부터 멀리 표류한다면, 너는 너의 마음이 표류하고 있는 것을 안다.
너는 너의 마음을 명상의 지점으로 되돌리고 그리고 강한 sati로 너는 너의 마음을 명상지점에 유지 한다.
네가 감각(vedanā)을 극복한 후, 언젠가 그것은 법(현상)에 대한 관찰로 간다.
강한 sati로, 너는 정신적 – 육체의 현상[9]에 마음챙김을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것들(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이 어떤 자아나 혹은 영혼이 없이 단지 현상[10]이라는 것을 안다.
강한 마음 챙김으로 너는 만일 감각적 욕망이 너에게 존재하고, 너는 감각적 욕망이 너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챔을 알 것이다.
만일 감각적 욕망이 너에게 존재하지 않으면 너는 너에게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 챌 것이다.
적의가 있을 때, 너는 너에게 적의가 있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고, 적의가 존재하지 않을 때, 너는 너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태(나른함, 나태)와 그리고 둔감(무디고 느림; 활동적이지 못함)인 thina-midda(해태와 혼침)이 너에게 존재할 때, 너는 해태와 혼침(게으름과 둔감)이 너에게 존재하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태와 혼침이 없을 때, 너는 나태와 혼침이 너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들뜸과 후회(산란함과 근심)가 너에게 있을 때, 너는 들뜸(산란)과 후회(근심)가 너에게 존재하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고, 너에게 들뜸과 후회가 존재하지 않을 때, 너는 너에게 들뜸과 후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의심(의심이나 동요)이 너에게 존재할 때, 너는 너에게 의심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너에게 의심이 없을 때, 너는 너에게 의심이 없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너는 확고하게 담마(현상), 정신적.육체적 현상에 sati를 유지하고 그리고 자아와 영혼이 없는 단지 그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에 주의 기울일 것이다.
때때로 너는 다른 존재 내부 현상들 역시 같은 본성(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 기울이게 될 것이다.
네 가지 satipaṭṭhana(네 가지 확고한 마음 챙김), 즉 몸에 대한 관찰, 감각에 대한 관찰, 마음에 대한 관찰, 그리고 법(담마, 현상)에 대한 관찰이 동시에(같은 때에 일어남) 일어난다.
몸에 너의 sati가 더 명백하고 드러날 때, 우리는 비록 다른 세 가지가 존재 한다 해도 그것을 몸에 대한 관찰이라 부른다.
그리고 또한 감각(vedanā)에 우리의 sati가 더 명백하고 두드러질 때, 우리는 그것을 감각에 대한 관찰이라 부른다.
마음에 우리의 sati가 더 명백하거나 두드러질 때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 대한 관찰이라 부른다.
담마(현상)에 우리의 sati가 더 명백하거나 드러날 때, 우리는 그것을 법에 대한 관찰이라 부른다.
우리는 네 가지 자세 모두, 즉 말하자면 앉을 때, 서 있을 때, 걷거나 눕는 자세 모두에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행해야 한다.
걸을 때, 우리는 땅이나 마루에 우리의 발이 닿는 것에 주의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현재 순간 우리의 발이 닿는 것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먹고, 마시고, 씹고, 삼키고 그리고 심지어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에도 접촉지점에 마음 집중이 되어야 한다.
잠자는 자리에서 누울 때, 만일 너는 호흡에 마음 집중을 원한다면, 너는 코끝에 공기가 접촉하는 것에 마음챙김이 되야 한다.
너는 모든 접촉 점에 마음 집중이 되야 한다.
만일 네가 잠자는 자세에서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때 너는 깊이 숨을 쉬고, 너의 숨을 잡고 그리고 sati로 몸 전체를 관찰해라. 마음은 자동으로 가장 명백하거나 또는 두드러진 감각으로 간다.
감각이 진정될 때 너는 잠에 떨어질 것이다.
네가 일어났을 때, 네가 완전히 깨기 전에, 너의 마음은 감각에 sati가 될 것이다.
만일 네가 누워 있을 때 두드러진 감각이 없다면, 그때 베개에 닿는 머리나 또는 너의 몸의 어떤 부분이 마루바닥에 닿는 지점에 sati해라. 너는 네가 완전히 완전히 잠들었을 때만 오직 sati가 없다.
나머지 시간에 너는 네가 무엇을 하든지 sati가 되야 한다.
그것이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4념처), 즉 앉고, 서고, 걷고, 잠드는 몸에 대한 관찰, 감각에 대한 관찰, 마음에 대한 관찰, 그리고 법에 대한 관찰을 네 가지 모든 자리에서 수행하는(실행하는)방법이다.
만일 우리가 많은 노력과 강한 sati로 계속적으로 4념처를 행한다면 우리는 어떤 때, 어떤 자세에서든 도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법의 놀라운 특징 중의 하나이다.
당신은 오직 많은 노력과 강한 sati로 4념처를 수행하는 “원인(cause)”을 짓기만 하면 된다.
도의 지혜를 얻는(깨닫는) 결과(이익)은 언제, 어디든지, 어느 자세에서든 그 스스로에 의해 온다.
깨달으신 고따마 붓다는 말씀하셨다.
이 4념처를 행하는 것은 존재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함이고, 고통(정신적 고통)과 고뇌(정신적 괴로움)의 완전한 파괴를 위함이고, 고귀한(성스러운)도를 성취하기 위함이고, 그리고 닙바나를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길이다.
깨달은 고따마 붓다는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계속해서, 부지런히, 많은 노력과 강렬한 sati로 4념처를 수행한다면, 너는 7일에서 7년 내에 아라한도나 또는 아나가미도를 성취할 수 있다.
그것은 보통의 경우이다.
많은 pārami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은 휠씬 더 빨리 도의 지혜를 성취할 수 있다.
어떤 pārami도 갖지 않은 사람의 경우, 너는 빠라미를 갖기 위해 4념처를 수행해야 한다.
빠라미를 가지고 있으나 그러나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또한 그들의 빠라미를 성숙시키기 위해 수행해야만 한다.
빠라미가 성숙한 사람들, 또한 도의 과를 얻기 위해 그것을 행해야만 한다.
이미 도의 지혜를 얻은 사람들도 4념처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닙바나로 건너거기 전의 삶에서 가장 이익 되고, 평화롭고 그리고 만족스러운 길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들이 가능한 한 빨리 닙바나에 도달하기를” 삼계의 모든 존재들이 네 가지 비참한 상태, 세 가지 불행, 여덟 가지 부적당한 시기의 상태, 다섯 가지 거대한 적, 네 가지 미완성의 상태 그리고 다섯 가지 퇴보로부터 항상 자유롭기를 기원합니다.
Sayadaw U Wara Kaba Aye Sun Lun Gu Kyaung [1] 구: 동굴 [2] 짜웅: 승원, 수행처, 절, [3] 법럽 20년 이상의 큰 스님에게 붙이는 공경의 호칭 [4] Merit: dāna, sīla, vipassanā, samātha. [5] 사두: 훌륭합니다.
[6] Mudhita(함께 기뻐함)으로 인해 다른 이의 공덕을 함께 나누어 가지게 됨 [7] 지: 공경의 표시, great [8] 연속(Sequence): 유사한 감각의 파장이 여러 번 반복해서 오는 것. 연속이란 일어나고 사라지는 파장들의 연속. [9] 정신적 현상이든(생각, 감정) 육체적 현상(강박) 둘 모두는 마음의 대상(현상, object of the wind) [10] 현상: 마음의 대상, 앎의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