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i 불교(동남아 불교)

Pali 불교(동남아 불교)

                                                                                                                                               빅 쿠 원 우                                                                                                                                               01/ 03/ 2012   *. 동남아 불교 ‘소나’비구의 「Udāna」(자설경)에 나타난 것을 분석해 볼 때 부처님 당시에도 법을 암송 송출하는 형식이 정형화돼 있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Pāli어의 언어학적 구조? Nikaya의 구조?   Ⅰ. 스리랑카 불교 스리랑카왕 레오남 삐야 띳사(신이 좋아하는)는 절을 지어 왕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으며, 이절이 대사이다.

아쇼카왕도 절을 지어 자기이름을 붙임(아소카라마, 아소카절) 이곳에서 Moggaliputtattsa비구가 경전 3차 결집을 하면서 논서를 작성하였다.

남방전통은 부처님 탄생. 깨달음. 열반일을 같은 날로 정하여 Vesak day(큰 축제)라 했으며, 모든 행사는 보름날 행했다.

이러한 전통은 둣다가마니 왕때 생김. 1) 붓다가마니 아바야 ; 큰절을 지음(무외산사), 아바야 끼리에서 대승과 상좌부가 같이 살았으며 후에 따로 분리. 2) 붓다고사는 마하나와왕 때(A.D 409~431) 스리랑카 싱할리 주석서를 빨리어로 번역, 아바야끼리절에서 청정도론 편찬하여 시험에 통과 한 후 주석서를 옮김. 3년 후 인도로 돌아간다.

3) 스리랑카는 후에 태국에서 빨리 삼장을 역 수입하였다.

이를 시암니까야(시암종: 상류층 자제들만 출가 허락)라 이름 함.  스리랑카는 외세의 침략으로 불교가 말살되어 후대에 태국. 미안마 등에서 몇 번에 걸쳐 역수입 하였다.

1) 1065년 미안마에서 비구계를 받고 스리랑카로 돌아와서 불교를 전파. 2) 1475년 미안마에서 재 역수입 3) 1758년 태국에서 불교 수입 4) 1801년 미안마에서 재수입(아마라꾸라종, 불사) 스리랑카에 현존하는 종파 1) 시암종: 태국불교 수입, 시암 니까야 2) 아마라꾸라종 : 미안마에서 수입 3) 라만야종 : 스리랑카 자체에서 형성된 종단 라만야 니까야, 외세의 침입 1) 16세기(1505~1658) 포로투칼의 침입과 영국 등에게 200년 동안 외부의 통치하에서 있었으나 전통을 잘 지켜 왔다.

2) 포로투칼과 영국의 끈질긴 불교말살 정책과 기독교 개종화 작업결과 그의 전 국민이 기독교화 했지만 파아나두라[1] 논쟁을 통해서 불교가 다시 부흥하게 되었고 파아나두라 논쟁 당시 어린 아이었던 ‘아나까리까 담마난다’가 논재에 참석하였고 그 후 발심하여 불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Ⅱ. 미안마 불교   유명한 아나후라타왕조(A.D 1043년) 대승불교와 상좌부 불교가 공존했지만 대승불교는 오래가지 못했다.

  Ⅲ. 태국불교 태국에서도 대승과 상좌부 불교가 공존했지만 랑캄행왕 때 스리랑카와 같이 완전한 상좌부불교로 결정, 대승불교를 축출하였다.

  Ⅳ. 캄보디아 불교 크메르 왕국 때(A.D 14~15세기 경) 대승불교가 흥했다.

  Ⅴ. 베트남 중국불교의 영향으로 대승불교가 흥했지만, 상좌부 불교와 공존했다.

  *. 불교학자들의 주장 1881년 P.T.S 성립, ‘리스 데이비스’가 서양의 삼장을 치밀하게 집대성 하여 세계에 유포시킨 공로자.   *. Pāli어는 어떠한 언어인가? – 학자들의 접근 기독교의 이단 논쟁   1) 정본 : 케논(성스러운 책)   2) 사본 : 5부 니까야를 케논이라 부른다.

힌두에서는   1) 정본을 Śruti : 신이 말한 것을 듣고 전한 이야기로 인간의 영역을 넘은 것으로 조금도 첨가 할 수 없다.

즉 “베다”를 말한다.

  2) 사본을 Śmṛti(ⓟ Sati) : 베다를 제외 한 것 산스크리트어 : ① 베딕(클래식) 산스크리트 ②고전 산스크리트   ‘Paṇini’ : 유명한 문법 학자로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문법학자이다.

그는 그 당시 언어를 조직화 체계화해서 새로운 언어 비슷한 산스크리트어를 만들었다 이것을 클래식 산스크리트어라고 한다.

  1) aṣṭādhyāī(8권의 책으로 불법 최초의 책이다) 이 안에 쓰여진 짧은 책을 sutta라 한다.

  2) pānini : 산스크리트 문법책 * kaccāyanavyākarana 1), 2)에 버금가는 문법책으로 불교에 언어체계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추증할 수 있으며, 불교용어 사용법 체계를 잡아놓았다.

빨리어는 산스크리트어 입장에서 볼 때 프라끄라티어로 볼 수 있다.

  1) 프라끄라티어는 훨씬 후대에 사용하였고 빨리어는 부처님 말씀으로, 결론적으로 어느 한 지방에 맞아떨어지는 곳이 없다.

  2) 그 당시 내려온 언어를 다시 조직화 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3) Pāli어를 보면 부처님은 언어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베다보다 더 일찍 형성된 부분도 있으며, 베다 보다 빨랐다는 언어학적 증거도 있다.

  *. 불교 학자들의 정리 마가다어 설 : 아쇼카 언어로 유사성은 있으나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   1) 마가다어는 전설대로 빨리어는 부처님 말씀 그 말 그 대로라는 설   2) 빨리어가 마가다어기는 하지만 다른 언어적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다.

  3) 마가다 설이 아니다.

꼬살라 언어 설 : 당시 공용어였다.

유사성은 있다.

우찐 설(마힌다 테라가 태어난 곳) 깔링가 설 빨리어는 부처님 말씀에 가장 가까운 말이고 가장 오래된 언어이며,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하는 대는 확실한 바탕이 된다.

전통 쪽을 주시해서 볼 필요가 있다.

주석서에서 소나비구의 일화에서 볼 수 있었듯이 초기경전 암송에 있어서 어떠한 형식의 정형화가 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서로 간에 부처님 말씀을 수지 독송했다는 것을 소나의 경에서 추적할 수 있다.

초기경에 보면 Vinayadh(율을 암송하는 자), Dhammadh(법을 송출하는 자, sutta를 외우는 자) 이른 말이 초기경전에 나타나고 있다.

아쇼카 석주에 슈단띠카(특별한 암송하는 자), 빼따낑(peṭiṃ), 띠삐따(삼장) 등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

Pañca nekayika( 빤자 내까이까가 변해서 빤짜 디까로 됨)에 5부 니까야란 말이 있고 전문으로 외우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전문으로 송출하는 자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추증할 수 있다.

  1) 주석서(Atthaka)의 뜻을 말하는 자   2) Bhāṇāka, 디까 바나까 : 전문적으로 가지는 사람.   3) 맛지마 바니까 : 맛지마 바니까만 전문적으로 가지는 사람들   4) 담마 바니까(법사)   5) 대승에서도 바니까란 말이 나온다.

이처럼 석존 시대부터 일정한 형식의 내용을 갖춘 불설의 원형이 또는 붓다웟짜(붓다담마, 붓다숫따)가 성립되어 전승되었다.

  1) 1차 결집 때 종합적 공인절차를 통해 합법적인 정전화 작업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2) 2차 결집에서 분열, 분열 전까지는 근본 가르침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승자들인 상좌부 계통으로 전해져오고 소외된 부파에서는 한 가지 니까야만 갖게 된 것을 봐서 부처님의 말씀, 즉 정법을 지키는 데 몰두하지 않고 시대에 어울리는 융합한 것 같다.

  *. 니까야 ‘니까야’는 묶음.수집이란 뜻이고, ‘아함’은 아가마의 음역으로 전승.전통이란 뜻이다.

5부니까야인 쿠따까 니까야는 다음과 같다.

  1) 15경       ①쿠따카 빠타(소송경)       ②담마 빠다(법구경)       ③우다나(자설경)       ④잇디웃따까(여시어경)       ⑤숫따니빠다(경집)       ⑥위마뉴왓투(천궁사)       ⑦뺏다(조상신)왓투(아귀사)       ⑧테라바타(장노게       ⑨데라 (장노니게)       ⑩자타카(본생담)       ⑪닛데사 : 숫따니빠다를 주석한 주석서(초기의 주석)       ⑫삐띠삼비다 맛가(무애해도)       ⑬아빠다나(비유경, 12분교 뒤에 형성)       ⑭붓다왕사(불종성경, 역사서)       ⑮짜리아 삣다까(행장경)     2) 태국       ⑯넷띠빠까다나       ⑰빼땃꼬뻐대사     3) 버마       ⑱밀린다 빵하   *. 경전 표기법 DN. vol. Ⅰ : 디까니까야 1권 MN.Ⅰ. 92 : 맛지마니까야 1권 92페이지 Dhammapāda : Dh. 124   [1] 1873년 8월 26일, 스리랑카의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 파아나두라(Panadura)에서는 스리랑카 불교의 명운을 건 역사적인 설전이 벌어졌다.

불교를 우상 숭배의 미신 정도로 비하하며 무차별적인 선교를 감행하고 있던 기독교에 맞선 한 스님의 공개적인 토론회가 열린 것이다.

스리랑카 불교 부흥의 사명을 안고 대론에 나선 주인공은 모호티왓테 구나난다(Mohottiwatte Gunananda. 1823~1890) 스님이었다.

구나난다 스님은 영국인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와 사리만나 전도사를 상대로 기독교 교리의 모순과 불교에 대한 그들의 비하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공개적인 논쟁을 벌였다.

    1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파아나두라의 대론장에서 구나난다 스님은 기독교인들이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는 유일신의 허점과 윤회, 연기, 깨달음 등 불교의 주요 교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무지를 지적하는 논리 정연한 대론을 펼쳐 나갔다.

어떻게 해서든 불교를 저급한 종교로 전락시키려는 기독교인들의 반박도 거셌지만 물러설 수 없는 논쟁의 장에 나선 구나난다 스님의 결연한 의지와 정법의 교리로 무장한 정연한 논리는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논쟁의 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논쟁이 끝났을 때 목사와 전도사는 불교의 승리를 인정하는 참가자들의 환호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 이교도의 무지 논리적으로 반박      이날의 논쟁은 동양의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고 비하하려했던 기독교의 오만한 세력 확장에 대해 불교가 정법의 교리로 맞서 승리했다는 표면적인 의미와 함께 불교국가 스리랑카 사람들의 자부심을 고양하고 정법의 힘으로 이교도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해준 역사적 전환점으로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파아나두라 대논쟁으로 불리는 이 역사적인 사건은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미국 남북전쟁의 참전 영웅이었던 올콧트(H.S.Olcott. 1832~1907) 대위와 그의 부인 브라밧츠키(H.P.Blavatsky)는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을 보고 감명하여 미국인 최초의 불교도가 되었다.

올콧트 경은 1875년 뉴욕에서 신지협회(The Theosiphy Society)를 설립해 인도와 스리랑카 불교 부흥 운동의 원동력으로 삼은데 이어 1880년에는 스리랑카로 건너와 불교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올콧트 경은 스리랑카에도 신지협회를 설립하고 승가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한편 경전에 대한 연구와 전승에도 힘을 기울여 내부의 역량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또한 재가불자를 결집해 신문과 각종 포교 책자들을 발행했으며 각 지역마다 학교를 세워 아이들이 더 이상 기독교계통의 학교에서 불교에 대한 왜곡된 교육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와 같은 불교 부흥 운동의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 스리랑카 불교부흥 견인한 올콧트      스리랑카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다르마빨라는 청년시절 ‘데이비드’라는 서양식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당시 대다수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계통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구나난다 스님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청년 데이비드는 올콧트 경이 스리랑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당시 그를 수행하며 통역하는 과정에서 스리랑카의 암울한 현실과 불교의 위기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그는 이후 열정적인 불교운동가가 돼 스스로의 이름을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로 개명하고 스리랑카의 불교를 부흥하기 위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국내의 불교 성지들을 보수하고 부당한 종교 박해에 대해 결연히 대항했다.

또한 스리랑카 불교에만 머물지 않고 상좌부 불교권과 미국, 인도 등을 방문하며 스리랑카의 현실을 전하고 불교도의 역할을 호소하는 등 불교 부흥운동을 국가 부흥운동으로까지 확산시켜 나갔다.

    19세기 말 파아나두라 대논쟁을 기폭재로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스리랑카 사람들의 불교적 자부심과 자신감은 올콧트와 같은 헌신적인 조력자들의 노력과 승재가의 굳은 단결을 동력삼아 꺼져가던 법등을 다시 밝히고 독립을 위한 국민들의 열정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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