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마라.
-법륜스님-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수행을 할 때 ‘마장이 낀다.’ 이런 말을 많이 하지요? 공부하다보면 공부를 못 하게 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누구나 다 원하지요.
그런데 수행을 하면 누구에게나 마장이 일어납니다.
옛사람들은 이 마장이라는 것을 ‘수행을 방해하는 마구니’라고 하여 그것이 수행을 못 하도록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장애는 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게 어떤 것이든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 사건 때문에 내가 물러나는 마음을 내면 그게 바로 ‘마장’이지요.
그러면 이런 물러나는 마음 어떤 것을 하려고 할 때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나는 마음이 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것이 내 업식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습관을 바꾸려고 할 때 과거의 습관이 저항하는 거예요.
이 업의 흐름, 습관의 흐름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뉴턴의 제3법칙인 ‘관성의 법칙’과 같아요.
움직이는 물건은 계속 움직이려고 하고 멈추었던 물건은 계속 멈추어 있으려고 하는 성질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움직이는 물체를 멈추려면 힘을 가해야 하고 멈춰 있는 물체를 움직이려면 역시 큰 힘을 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습관이라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 움직이는 물체와 같아요.
습관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 그 방향으로 가려 하는데 우리가 그걸 바꾸려고 하면 이 습관이 상당한 저항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저항력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결심을 하면 꼭 사건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심을 단단히 해도 삼일을 못 넘기지요.
하지만 이 마장이라는 것도 확실한 의지 즉 죽기를 각오한 대결정심 앞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반면에 털끝만큼이라도 틈이 생기면 마장은 쏜살같이, 비수같이 파고들어서 주인 노릇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생각 자체를 바꾸게 하여 공부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하면 마음속에서는 항상 또 다른 망설임이 생기지요.
부처님께서도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까지 마왕으로부터 유혹을 받게 됩니다.
마왕의 자리를 주겠다는 즉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중생이 바라는 최고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마왕이여, 나는 바라는 바가 없소.” 하고 말씀하셨어요.
바라는 바가 없으니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부처님께는 아무런 유혹이 되지 않는 거예요.
이것도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게 좋을까요? 원하는 바가 없는 게 좋을까요? 원하는 바가 없는 것이 나에게 훨씬 좋습니다.
날씨를 예로 들어 봅시다.
날씨에 대해서 내가 어떠했으면 좋겠다는 원하는 바가 없으면 비 오든, 구름 끼든, 덥든, 춥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바가 있으면 날씨의 변화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굉장히 지혜로운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은 높고 낮음이 없지요.
제법은 존재 가치의 높고 낮음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空)’입니다.
다만 필요에 의해 쓰일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가치는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높다는 데 집착합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일단 이치가 뚫리면 수없이 걸려서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치가 딱 꿰뚫어지지 않으면 자기가 잘못을 하고도 잘못한 줄 모르고 틀리고도 틀린 줄 모르고 모르면서도 물을 줄 모릅니다.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 줄을 모르니까 이것은 해결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일단 이치를 확실히 알아버리면 잘못해도 잘못한 줄 알고 모르면 모르는 줄 알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나아지게 돼요.
그래서 법의 이치를 정확하게 꿰뚫어야 합니다.
이것을 ‘견도’라고 합니다.
적어도 이생에는 ‘견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치를 통달하여도 지금까지의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무의식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약간 방심을 하면 업식이 일어나서 업식이 주인 노릇을 합니다.
이치대로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는 것이 ‘수행’입니다.
넘어져서 일어날 줄 모르는 상태에서 누워 있는 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수행’은 연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됩니다.
즉, 자신이 공부할 때 자기 원하는 대로 되면 교만해지듯이 이 마음이 교만해져서 얻지 못한 것도 얻었다 증득하지 못한 것도 증득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 게 아니라 마장이 있더라도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마장이 일어날 때 그것이 마장인 줄 알면 됩니다.
‘아, 이게 과거 나의 업식이구나.
이렇게 일어나는구나.
이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이걸 늘 봐야 합니다.
그럼 거기에 휩쓸려 가지 않아요.
견도가 열리면 어긋나는 자기를 끝없이 볼 수 있어요.
부부관계에서도 볼 수 있고 음식에서도 볼 수 있고 잠자는 것에서도 볼 수 있고 절하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24시간이 공부꺼리지요.
그러니 잘하면 내게 교훈이 되고 못하더라도 내게 뉘우침이 되니까 넘어져도 일어나면 됩니다.
‘아, 내가 이 정도에 걸려 넘어지는구나.’ 알게 되면 한 번, 두 번 걸려 넘어지면서 세 번째는 안 넘어질 수도 있지요.
세상살이에 혼란이 있는 게 정상인 것처럼 일하는 데 장애가 있는 것이 정상이에요.
그런 것처럼 수행할 때는 마가 있는 게 정상입니다.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견고해지지 못합니다.
원을 세웠다 하더라도 한 번, 두 번 넘어지면서 만 번 넘어져도 일어나고 다시 만 한 번째에도 일어난다고 하면 그 원이 아주 견고한 겁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서원이 굳건하지 못했다면 마왕이 천하를 다 내 주겠다고 했을 때 받았을 거예요.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이무소득고 –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처럼 얻을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마가 허망한 것임을 꿰뚫어 보고 마 자체에는 뿌리가 없다는 것을 사무쳐 알게 되면 마가 어찌 나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로써 수행을 돕는 벗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마장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나한테 이런 마장이 또 있구나.
결국은 이것이 내가 앞으로 극복해야 될 대상이구나.’ 하고 돌이킬 줄 안다면 마장이 일어남으로써 우리가 알아차리는 기회를 얻는 것이지요.
일어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일어남으로 해서 내 수행의 과제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고 마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꾸준히 정진해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