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월호스님-
“두두물물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내가 귀한만큼 남도 귀한 법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외쳤다.
온 세상에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는 의미이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나만 존귀하고 남은 비천하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야 말로 아만과 독선을 철저히 떠난 종교이다.
이 말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존귀하다는 뜻이다.
자기야 말로 가장 존귀한 존재이다.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재물을 섬기거나 권세를 섬기거나 신을 섬기게 되면서 주인이 바뀌게 된다.
재물이나 권세 혹은 신 등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정작 주인인 자신은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의 존귀함을 깨우쳐야 한다.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임을 자각해야 한다.
나아가 누구나 스스로 인생의 주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존귀한 만큼 남들도 존귀함을 알아야 한다.
내 생각과 내 종교가 존귀한 만큼 남의 생각과 남의 종교도 존귀함을 인정해야 한다.
내 생각과 내 종교만이 옳다고 여기며, 남의 생각과 남의 종교는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이야 말로 오만과 독선의 집단이다.
한편 스스로가 주인이라 해서 불보살님의 도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움을 받는 것과 종노릇하는 것은 다르다.
불보살님에게 도움을 받고, 중생들에게 베푸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중생은 뿌리요, 불보살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에게는 크게 세 가지의 몸이 있다.
첫째는 몸으로 나투신 부처님(化身佛)이다.
2500여년 전에 인도 땅에 태어나서 몸소 가르침을 펴신 석가모니 부처님, 또는 조선시대에 상원사에서 세조 임금의 등을 문질러 병을 낫게 한 문수보살님이 그 분이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둘째는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報身佛)이다.
법장비구가 48대원을 세워 그 과보로 마침내 극락정토를 장엄하고 아미타부처님이 되셨다.
또는 관세음보살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에게 고통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주고자 서원을 세우셨다.
따라서 그 분들과 동일한 서원을 세우게 되면,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세 번째는 본래 성품자리의 부처님(法身佛)이다.
우주에 편만해서 아니 계신 곳 없으시고 영겁에 두루 해서 아니 계신 때가 없으시다.
아니 우주가 이 부처님에게서 비롯했고, 영겁이 이 부처님에게서 시작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형상이나 음성으로는 찾을 수 없는 부처님이다.
진리를 확실히 깨친 자만이 볼 수 있는 부처님이다.
쉬운 비유로써 설명하자면, 성품자리의 부처님은 순수에너지 그 자체이다.
마음자리의 부처님은 파동에너지이다.
몸 자리의 부처님은 뭉친 에너지이다.
순수에너지(성품, 본마음)에서 한 생각 파동이 일어나서 파동에너지(마음, 분별심)가 나타나고, 파동에너지가 뭉쳐져 뭉친 에너지(몸, 물질)가 되었다.
법신불이 중생제도의 염(念)을 일으켜 보신불로 나투었으며, 몸뚱이에 애착이 많은 중생까지 제도하고자 화신불로 나투신 것이다.
이러한 세 종류의 부처님은 나에게도 갖추어져 있다.
나의 몸뚱이가 화신불이요, 나의 마음이 보신불이며, 나의 본래 성품이 법신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그러하듯이 남도 그러하다.
그러니 두두물물이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리 봐도 부처님, 저리 봐도 부처님, 모두를 부처님으로 보는 이에게 부처님은 나타난다.
이리 봐도 중생, 저리 봐도 중생, 모두를 중생으로 보는 이에게 중생의 세계는 열린다.
존귀한 부처님의 세계를 열 것인가, 비천한 중생의 세계를 열 것인가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 불교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