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스님─천당 극락 가는 것이 최선의 삶인가

천당.극락 가는 것이 최선의 삶인가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월호스님

삶을 바라보는 관점 영생.불생 말하지만 최상은 보살의 중생구제 위한 ‘원생’

다른 종교에서는 영생(永生)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不生)’을 설한다.

여기에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

산다는 것은 과연 즐겁기만 한 것일까? 계속해서 즐겁게만 산다는 것은 가능할까? 아무리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라도 한 때가 지나가면 그만인 것은 아닐까?

영구히 산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영구히 사는 것일까? 변화가 없이 영구히 산다는 것이 과연 행복을 담보해줄까? 물론 즐거움으로만 가득 찬 세상에서 영구히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영구히 행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즐거움이란 괴로움의 상대적 개념이 아닐까?

삶 또한 죽음의 상대적 개념이다.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삶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생동하는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삶만 있다면, 삶을 생생하게 만끽할 수가 있을까? 권태를 느끼지는 않을까?

옛날 어느 사나이의 집에 아름답고 기품 있어 보이는 한 여인이 찾아왔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저는 공덕녀(功德女)라 합니다.” “무엇을 하는 분인지요?” “소녀에게는 묘한 재주가 있어서, 저를 보는 사람은 모두 기분이 저절로 좋아집니다.

또한 저와 함께 있으면 재물이 모이고 수명이 늘어나며 재수대통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다.

사나이는 흔쾌히 함께 살기를 수락했다.

그런데, 조금 후 또 다른 여인이 찾아왔다.

그 여인은 앞의 여인과는 정반대로 추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대는 누구요?” “저는 흑암녀(黑暗女)입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저 또한 묘한 재주가 있어 저를 보는 사람은 모두 기분이 좋다가도 나빠지게 됩니다.

또한 저와 함께 있으면 부유한 자가 가난해지고 수명이 줄어들며, 하는 일마다 재수가 없어지지요.” 사나이가 기겁을 하여 쫓아내려하자, 그녀가 말했다.

“앞서 온 공덕녀는 저의 언니입니다.

저희 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다녀야 하기에, 저를 쫓으려면 언니도 함께 내쫓아야 합니다.”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

일단 존재한다면 그 무엇이든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라는 말 자체가 변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변화가 없다면 존재를 느낄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변화가 있으므로 존재가 있고, 존재가 있으므로 시간이 있다.

존재는 곧 시간이며, 변화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상대적인 모든 것을 수반함을 의미한다.

존재는 상대적인 개념 속에서 존재한다.

고통 끝에는 즐거움이 있으며, 즐거움이 다하면 고통이 온다.

천당이 있으면 지옥이 있고, 낙(樂)이 다하면 고(苦)가 따른다.

복락이 있으면 재앙이 있다.

사실 고통이 없으면 진정한 즐거움을 알 수가 없으며, 재앙이 없으면 복락을 느낄 수도 없다.

선이 있는 곳에서 악은 더욱 드러나며, 악이 있기에 선은 더욱 선명하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상대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최상의 방법은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다.

천당에서 일시적인 복락은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복락이 다하면 다시 인간이나 지옥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는 최상의 방법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중생들의 복락을 위하여 기꺼이 다시 몸 받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바로 보살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삶은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이다.

업보로서 받은 몸뚱이가 아니라, 중생구제의 서원력으로 받은 몸뚱이기에 애착이 없다.

애착이 없지만, 버리지도 않는다.

열심히 중생제도에 헌신할 뿐!

-불교신문-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