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諸行無常)
월호스님
그 어디에도 ‘고정불변의 나’는 없다” 긍정적인 변화 만들어 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낙산사를 방문하였다.
해제 때면 거의 빼놓지 않고 참배하던 곳이었는데, 작년 화재 이후로 이제야 오게 된 것이다.
그동안 풀도 제법 자라고 여기저기 나무도 심어서인지 생각보다는 괜찮아보였다.
TV에서 보던 처참한 모습은 아니었다.
타버린 전각은 몇년 안에 다시 복구할 수 있겠지만, 나무들이 예전처럼 무성해지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다행이 참사를 면한 홍련암에 들어가 참배하며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을 생각하였다.
모든 존재는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가 깊숙이 와 닿았다.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결국 변화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한 것을 희구한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생명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조차도 고정된 모습이 아니다.
이루어져서(成), 머무르다가(住), 무너져버리고(壞), 마침내는 공(空)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서(生), 머무르다가(住), 바뀌어져(異), 소멸한다(滅).
이처럼 성ㆍ주ㆍ괴ㆍ공과 생ㆍ주ㆍ이ㆍ멸을 거듭하면서 순환 반복하는 것이 모든 생명과 우주의 진실인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영원을 희구하는 종교조차도 창시되어서, 머무르다, 바뀌어져, 소멸되는 것이다.
어느 날, 성안으로 탁발을 다녀온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오늘 탁발을 나갔다가 참으로 기이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엇이냐?” “네, 탁발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데, 성문 앞에서 한 떼의 풍악쟁이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신명나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 그런데 잠깐 탁발을 마치고 나오면서 보니, 모두가 죽어 있었습니다.
기이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가.
여래는 어제 그보다 더욱 기이한 일을 보았느니라.” “무슨 일이었는지요?” “어제 성안으로 탁발하러 들어가는데, 그 풍악쟁이들이 신명나게 놀고 있더구나.”
“그런데요?” “그런데, 탁발을 마치고 나오면서 보니, 여전히 재미나게 놀고 있더구나.” “예?” 무엇이 진정 기이한 일인가.
잠시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 기이한 일이다.
변화하는 것이 변치 않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변화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 애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이 아닐까.
〈법화경〉에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 (一切衆生 悉有佛性)’는 표현이 있다.
이것을 단순히,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으니, 열심히 수행해서 찾아내어야 한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성이라는 것은 그 어떤 형상화할 수 있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일체는 중생이며, 온갖 존재(悉有)는 불성이다.
중생이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주만물 일체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온갖 존재는 그 자체로서 불성이다.
살아 움직이고 있는 온갖 존재는 찰나생멸(刹那生滅)한다.
찰나생멸이야말로 변화하지 않는 생명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나’를 떠나서 그 어디에도 ‘고정불변의 나’는 없다.
아니,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행위’가 바로 ‘나’ (佛行是佛)라고 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따로 불성(佛性)인 나를 찾을 것인가.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