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스님─삼귀의

■삼귀의■ 쌍계사 강원 강사/

월호스님

참된 불교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 양족존 이욕존 중중존은 결국 본래 성품으로 돌아가 의지함 참된 불교인이 되기 위해 처음으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가 바로 삼귀의(三歸依)이다.

삼귀의는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이다.

삼보란 부처님과 그 가르침, 그리고 제자들을 보석에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는 확실히 이 세상의 빛나는 보석이다.

부처님과 그 가르침 및 이를 유지 전승하는 교단이 없었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종속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神)에게 종속되고, 재물에 종속되고, 명예나 술, 마약 등에 종속되어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을 주인으로 섬기거나, 재물을 섬기고, 명예나 술, 마약 등을 섬기면서, 정작 주인인 자기 자신은 영원히 종노릇에 만족하며 살아야 했으리라.

종노릇하는 이의 행복과 불행은 온전히 주인에게 달려있다.

그래서 신의 가호에, 재물에, 명예나 술, 마약 등에 행복과 불행을 걸어놓고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신의 가호나 재물 그리고 술이나 마약 등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조건 지워진 삶에 다름 아니다.

나 자신의 행복이 외부에 조건 지워져 있는 만큼, 그 삶은 자유롭지 못하다.

더 큰 신의 가호, 더 많은 재물, 더 나은 명예 등등 무한정한 집착에 매달려 끊임없이 표류할 것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과 같이, 집착이 많은 사람에게는 편안할 날이 없다.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 오히려 모든 것이 다가서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당당히 이르셨다.

바로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이라고.

모든 것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막연히 신의 가호를 바란다거나, 끊임없이 재물과 명예를 집착한다거나, 술이나 마약 등을 구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이 주인 됨을 회복하면, 이러한 모든 외부조건은 그야말로 나그네에 불과한 것이다.

잠시 왔다 떠나가 버리는 것이다.

바람이 불건 말건 끄떡없이 서 있는 저 큰 산과 같이, 주인은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조건 지워지지 않은 삶은 평안하다.

자신의 잘못을 면해보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잘난 점을 드러내보이고자 애쓸 것도 없다.

그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만족하며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좀 더 커 보이려고 까치발을 들고 사는 인생은 피곤하다.

옆에서 쳐다보는 사람마저 불안케 한다.

까치발을 내려놓는 순간 일단 편안해진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려다보면 가치의 척도가 ‘남’에게 있게 된다.

남의 이목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첩경이다.

그러므로 삼보에 귀의한다고 할지라도, 그 삼보를 또한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자성의 삼보에 귀의해야 하니, 부처란 깨달음(覺)이요, 법이란 바름(正)이며, 승이란 깨끗함(淨)이다.

육조스님은 말씀하셨다.

“자신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된 미혹이 나지 않으며, 적은 욕심으로 만족할 줄 알아 재물을 여의고 색을 여의는 것을 양족존(兩足尊)이라고 한다.

자기의 마음이 바름으로 돌아가 생각마다 삿되지 않으므로 곧 애착이 없나니, 애착이 없는 것을 이욕존(離欲尊)이라고 한다.

자기 마음이 깨끗함으로 돌아가 모든 번뇌와 망념이 비록 자성에 있어도 자성이 그것에 물들지 않는 것을 중중존(衆中尊)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귀의한다는 것, 즉 돌아가 의지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본래 성품자리로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소중한 가르침을 베풀어 보여 각자의 주인 됨을 직시케 하신 불ㆍ법ㆍ승 삼보에 어찌 귀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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