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이어달리기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월호스님
“생사관 제대로 정립돼야 마음도 편안” 옛날에는 서서 죽고 앉아 죽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새는 왜 그런 이가 드문가? 중국 송나라 당시에 구양수라는 유명한 문인이 있었다.
그가 어떤 절에 당도하니, 마침 어떤 스님이 경을 읽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져서 나중에 그 스님을 보고 물었다.
“옛날에 공부하는 사람들은 앉아 죽고 서서도 죽었는데, 요새는 왜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옛날 사람들은 평소에 바쁘지 않습니다.
평소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죽을 때 뭐가 바쁘겠소.
바쁘지 않으니까 앉아서도 죽고 서서도 죽는 것은 그 사람의 한 가닥 일이지, 그것이 무얼 특별하다고 하겠소.” “그럼 요새 사람들은 어째서 그렇소?” “요즘 사람들은 평소에 바쁘지요.
아주 바쁘게 지냅니다.
어떤 때는 온통 정신이 없게 지내니 죽을 때에도 사뭇 바쁘지요.
그러니까 바쁜 사람이 발버둥도 치고 기진맥진하니까 쭉 드러눕기도 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잘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쁘다’는 말 일 것이다.
심지어는 ‘요즈음 바빠 죽겠다’는 표현도 즐겨 듣게 된다.
하긴 송나라 때에도 사람들이 바쁘기 짝이 없었다고 하니 요즘 같은 스피드시대에 바쁜 것은 당연지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무언가 남들에게 뒤처지는 것만 같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일부러라도 바쁜 척 해야만 잘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하지만 위의 내용을 보건대, 결코 바빠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쁘게 살다보니 바쁘게 죽고, 바쁘게 죽다보니 발버둥을 치거나 기진맥진해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살아서 마음이 한가해야 죽더라도 마음이 한가해서 앉아서도 죽고 서서도 죽을 수 있다.
역사속 기이한 열반의 모습도 자유자재한 ‘마음가짐’에 연유 마조스님의 제자인 등은봉 선사는 어느 날 대중에게 물었다.
“여러 곳에서 앉아 죽은 사람은 보았지만 서서 입적한 사람도 있었는가?” “예, 서서 죽은 이도 많습니다.” “그러면 거꾸로 서서 죽은 이도 있었는가?” “그렇게 죽었다는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이 말을 마치자, 은봉화상이 문득 거꾸로 서서 입적했는데, 옷자락이 그대로 있고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대중이 찬탄하고 다비를 거행하려 하였으나, 시신이 움직이지 않아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의 누이동생인 비구니가 곁에 가서 “오라버니는 생전에 계율을 잘 지키지 않고 막행막식하더니 죽어서도 사람을 현혹케 합니까?” 하며 손으로 미니 넘어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를 드러내 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죽고 살기를 옷 갈아입듯 하는
웰다잉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음이 한가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가 있었겠는가? 이렇게 마음이 한가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가
제대로 정립되어야만 할 것이다.
인생은 결코 일회성의 단거리
경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름의 끝이 가을로 이어지고,
가을의 끝이 겨울로 이어지는 것처럼
삶과 죽음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