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만 싫어하지 말고, 즐거움에서도 벗어나라 –
법륜스님
즉문즉설 – ▒ 문 저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오늘 선운사를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도솔암으로 갔는데..
가 보니 마애불이 있었습니다.
마애불을 보면서 무척 큰 기쁨을 느꼈고, 큰 행운으로 느껴졌는데 돌아오는 길에 도로에서 강아지가 차에 치여 다친 것을 보았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너무 크게 다쳐서 치료는 안 되고 안락사를 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전에는 무척 기뻤다가..
오후에는 또 무척 슬펐다가..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게 기쁨과 슬픔의 반복인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 답 자기 마음에 들면 즐거운 것이고, 마음에 안 들면 기분이 나쁘죠? 바라는 대로 되면 기분이 좋고, 바라는 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쁘죠? (네)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늘 고(苦)와 락(樂)이 되풀이됩니다.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왔다갔다 할 뿐만 아니라 즐거움이 원인이 되어 괴로움이 되기도 하고 괴로움이 원인이 되어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괴로움 속에도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속에도 괴로움이 있습니다.
중생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고는 없고 락만 있기를 원하지만 실제 인생은 락만 있어서 천당 같을 때도 있고 고만 있어서 지옥 같을 때도 있고, 고와 락이 적당히 섞여 돌아갈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윤회의 사슬입니다.
천당에 가도 복이 다 하면 다시 떨어지고 지옥에 가도 죄가 다 하면 다시 올라오고..
윤회는 그런 것입니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락(樂)이라는 것도 영원하지 않고 고(苦)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이 락도 잘 살펴보면 뭐다? 고(苦)다.
이런 고락의 윤회를 고(苦)라고 해요.
그래서 ‘인생은 고해다’ 라고 할 때 인생은 고만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고락의 윤회다’..
이런 뜻입니다.
중생의 세계는 이런 윤회의 세계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게 해탈인데 해탈은 고(苦)에서만 벗어나는 게 아니고 락(樂)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락의 윤회로부터 벗어나려면 내가 원하는 게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내가 거기에 구애받지 않으면 벗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늘 날씨가 졸다, 나쁘다’ 시비를 하지만 사실 날씨는 좋은 날도 없고 나쁜 날도 없고..
그냥 날씨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내 마음에 들면 좋은 날씨이고 안 들면 나쁜 날씨에요.
그냥 날씨일 뿐입니다.
추우면 옷 하나 더 입으면 되고, 더우면 얇게 입으면 되고 비 오면 우산 쓰면 되고, 햇볕이 쨍쨍 나면 양산 쓰면 되고..
이렇게 그 환경에 대응해서 ‘비가 오려면 와라, 해가 나려면 나라..’이런 것을 이제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마애불 봤다고 그렇게 좋아할 것도 없고 강아지가 치어 죽는다고 그거 뭐 그렇게 괴로워할 일도 아니다..
마애불 봤으면 ‘아, 좋구나~’ 하고 끝내면 되고 강아지 다친 거 보고 병원에 데려갔는데 안락사 시켜야 한다면..
사람도 반신불수 되면 참 큰 일인데..
그 강아지는 누가 돌볼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안락사가 낫겠다..
덜 고통 받고 더 낫겠다..
이 말입니다.
물론 마음에 좀 찝찝하겠지만 그걸 계속 쥐고 있으면 중생이야..
털어야지.
그건 내가 아직 경계에 끄달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수준에서 조금 조금 한 발작씩 나아가면 내 뜻대로 됐다고 너무 흥분하지 않고 내 뜻대로 안 됐다고 너무 괴롭지 않고..
이게 이제 그 진폭이 크다가..
그 진폭이 작아지는 겁니다.
그 진폭이 없어야 아라한이 되는 건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진폭이 내가 감당할 정도로 잔잔하게..
요렇게 지켜볼 수 있으면 돼요.
그런 해탈의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