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을 놓아라 /법정 스님 처음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고 마지막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린 빈 손으로 왔으며 빈 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린 대부분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본래로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어쩌면 그렇게 한없이 채우는 일일지 모릅니다.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는, 끊임없이 닥치는대로 붙잡는 일일 터입니다.
돈을 붙잡으려 발버둥치고, 명예를, 지위를, 권력을, 지식을, 이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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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을 무한히 붙잡으며 이 한 세상 아둥바둥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입니다.
무한히 붙잡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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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음으로 인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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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추구하고 갈구하려고 하는”잡음!”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버리고자 갈망하는 고(苦), 괴로움이 시작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린 괴로움과 한바탕 전쟁이라도 버려야 할 듯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지식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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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이든 우리의 욕망을 가득 채워 줄 만큼 무한히 잡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린 너무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잡음”으로 인해 행복하고저 한다면 그 행복은 절대 이룰 수 없음이 진리의 참모습입니다.
인연따라 잠시 나에게 온 것 뿐이지 그 어디에도 내 것이란 것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연따라 잠시 온 것을 ”내 것”이라하여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바로 ”내 것”이라고 꽉 붙잡으려는 그 속에서, 그 아상(我相) 속에서,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내 것”을 늘림으로 인해서는, ”잡음”으로 인해서는 결코, 행복이며, 자유, 진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동안 내가 얻고자 했던 붙잡고자 했던 그것을 놓음(放下着)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놓음이 전체를 붙잡는 것입니다.
크게 놓아야 크게 잡을 수 있습니다.
”나” ”내것”이라는 울타리를 놓아버려야 진정 내면의 밝은 ”참나”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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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착(放下着)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 어쩌면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듯 느껴집니다.
그렇게 선입견을 녹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방하착(放下着)!! 그 속에 불교 수행의 모든 체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방하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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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放)은”놓는다”는 뜻이며, 착(着)은”집착,걸림”을 의미합니다.
즉, 본래 공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나” ”내것”에만 끄달려 이를 붙잡으려하는 어리석은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下)라는 것은”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참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체 모든 끄달림, 걸림, 집착을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내 안의 참나의 자리에 몰록 놓으라는 것입니다.
방하착, 방하착 하니 많은 이들이 의심을 가집니다.
그러면 다 놓고 나면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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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돌처럼 바위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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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방하착(着)이란 착심(着心)을 놓으라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저 멍 하니 바보처럼 세상을 소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집착하는 마음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하였습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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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일입니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살아갈 일입니다.
다만 마음을 한 쪽으로 머물러 착(着)을 두어선 안됩니다 게으르게 사는 것은 복을 까먹는 일일 뿐입니다.
적극적으로 복을 짓고 순간 순간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 밝은 깨침의 마음으로 늘 순간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벌되 돈에 대한 ‘집착’으로 벌지 말라는 것입니다.
못하게 되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돈에대한 집착을 놓으면 많이 벌어야 한다는 집착을 놓았기에 적게 벌어도 여여하며, 많은 돈을 벌었어도 다른 이를 위해 보시를 할 때 아깝다는 마음 없이 무주상보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돈에 대해 집착이 없으니 돈에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을 해야지 ‘집착’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이 떠나가더라도 그 사람이 잘 된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아닌 ‘집착’이라면 나와 함께 해서 괴롭더라도 붙잡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다는 이유로 그를 증오하고 괴롭히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입니다.
‘내 여자’ ‘내 남자’라고 하는 또 다른 아상일 뿐입니다.
상대방이 ‘내것’이라는 생각 나 좋을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아집(我執)’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맑고 순수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하라는 도리인 것입니다.
이렇듯 집착을 놓아버리는 일이야말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욕망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연장인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 올라오는 경계를 그저 주인공, 불성, 한마음, 본래면목, 참나라고 하는 그 지고함 속에 넣고 녹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녹이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경계를 이렇듯 내 안에 밝은 자리에 놓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방하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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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고 가는 이는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합니다.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으며,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기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항상 여여합니다.
함이 없이 늘 묵묵히 일을 해 나갑니다.
이렇듯 함이 없이 해야합니다.
일을 하며 ‘내가 한다’는 생각이 끼어들면 위험합니다.
그렇기에 그 마음 ‘내가 한다’고 하는 그 아상, 아집을 놓고 가는 것입니다.
방하착엔 내가 한다는 마음이 없기에 설령 괴로운 경계가 닥치더라도 괴로움의 주체가 없기에 하나도 괴로울 게 없습니다.
내가 괴로워야 하는데 아상을 놓았으니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괴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괴로움’이란 현상만 있을 뿐 내가 괴롭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놓고 나면 이렇게 자유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