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콧속을 보지 못 합니다
-월호스님-
불교에서는 타심통(他心通)이라고 해서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타심통이 열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분별심이 쉬어버린 사람의 마음은 읽을 수가 없지요.
인도의 대이삼장(大耳三藏)은 중국에 와서 타심통을 얻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숙종 황제가 서경의 혜충 국사에게 시험해보라 하니, 국사가 그에게 물었습 니다.
“그대가 타심통을 얻었다니 사실인가?” 그러자 삼장이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국사가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보라.” 삼장이 대답하였습니다.
“화상은 한 나라의 스승이거늘 어찌 서천에 가서 경선도을 구경하십니까?” 국사가 잠시 가만있다가 다시 말하였습니다.
“지금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보라.” 삼장이 다시 대답하였습니다.
“화상은 한 나라의 스승이시거늘 어찌 천진교에 가셔서 원숭이 놀음을 구경하십니까?” 국사가 다시 세 번째 질문을 하니, 삼장이 그가 간 곳을 모르거늘 국사가 꾸짖어 말하였습니다.
“이 들 여우의 정령아, 타심통이 어디에 있는가?” 이에 삼장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 세 번째는 마음을 알 수가 없었을까요? 이때에 국사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던 것일까요? 앙산 혜적(803-887 당나라 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앞의 두 차례는 환경에 끄달리는 마음이었고, 나중에는 자수용삼매(自受用三昧)에 들었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또한 조주 스님(778-897 당나라 스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삼장의 콧구멍 속에 있었느니라.” 어떤 스님이 이 말을 듣고 현사 스님(835-908 당나라 스님)께 가서 물었다고 합니다.
“콧속에 있었으면 어째서 보지 못했을까요?” 그러자 현사가 대답했습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이니라.” 위에서 말하는 자수용삼매(自受用三昧)는 일체가 ‘나’인 상태인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관과 객관이 벌어지기 이전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환경에 끄달리는 마음이 아닙니다.
‘나 아닌 것’이 없기 때문 모든 것이 ‘나’인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나 아닌 것’이 있을 때에 비로소 ‘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간 곳을 알 수가 없는 것은 자신의 발로 자신의 그림자를 밟을 수가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인 것 입니다.
조주 스님은 이를 좀 다 쉽게 표현하여 ‘콧속’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눈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이 코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콧속을 볼 수는 없습니다.
이보다 더욱 가까운 곳에 불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나 불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성을 찾지요.
하지만 불성은 찾고자 하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으로써 마음을 찾을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