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스님─칭찬에도 비난에도 흔들리지 말고___

칭찬에도 비난에도 흔들리지 말고…

-서암스님-

탐심, 진심, 치심의 세가지 독약에 의해 죽어가는 것이 중생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죽게 하는 그 삼독 중의 하나로 성내는 마음을 살펴 봅시다.

우리는 성을 안 내고 산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 안 내고 살면 좋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 성내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게 되면 자신도 그 모습이 아주 보기 싫지요.

아마도 여간 괴팍한 성질이 아니라면 성낸 얼굴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진심에 죽는다는 것은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경우도 뚜렷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닭을 보세요.

그 닭이 아무리 싸움닭이라도 처음에 그냥 붙여 좋을 때는 싸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곁에서 자꾸 성을 돋우면 이 놈이 어리석어서 정작 화를 돋우며 뒤에서 조정하는 사람은 못 보고 눈앞에 있는 닭과 맞붙어 벼슬에서 피가 나도록 싸웁니다.

또 일단 그렇게 싸울 때는 아무리 힘으로 떼어 놓으려 해도 계속 싸우기 떄문에 결국 둘 다 모두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되지요.

그야말로 진심이라는 독약으로 죽는 것입니다.

밤이나 도토리를 먹고 사는 다람쥐의 경우도 보세요.

자기들의 먹이인 밤이나 도토리 같은 것을 발견했을때 누군가 그것을 치워 안 보이게 하면 다람쥐는 그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그 자리에서 파르르 떨다가 죽어 버립니다.

탐심에 의해 진심이 커져서 그런 것이지요.

사실 며칠 꿂는다고 죽지는 않을텐데 그래요.

또 찾아서 먹으면 될텐데 탐심과 진심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하고 어리석게 죽어 가거든요.

다람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제 때 일본군 부대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관목을 한 트럭 싣고 부대로 가던 도중에 일본이 항복하여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지요.

그러자 그 사람은 관목을 실은 채, 곧장 자기 집으로 트럭을 끌고 갔습니다.

그렇게 차가 하나 생겼는데 마침 차를 살 사람이 있어 잘 되었다고 생각 하여 팔아 현금으로 바꾸었어요.

공으로 생긴 차로 돈을 번 셈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차를 판지 얼마 안되어 차 값이 몇 배씩이나 올랐다는 것입니다.

억울해 하던 그 사람이 그만 화병이 나서 죽었다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지요.

이런 일들이 모두 탐심에 죽고, 진심에 죽고, 치심에 죽는 것입니다.

탐심이 크면 진심도 크고 진심이 크면 치심도 커 허망하게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삼독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살펴 보면 굵고 가늘고,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탐진치 삼독이 우리 생활에 얼마나 많은 화와 해를 불러 일으키는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탐진치 삼독은 연쇄적으로 얽혀 해독을 낳는데, 우리가 만일 그 중 한 가지 진심만 일으키지 않고 살아도 수행은 절로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건강에도 좋고요.

성을 많이 내는 사람 치고 건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을 안 내는 사람은 항상 봄바람 같이 편안하고 화평하여 잘 못 먹어도 오래 삽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잘 했던 백운스님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는지 한 가지 사례를 이야기 할게요.

스님은 이름 있는 선지식이라 법회 때면 수백명의 신도들이 모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도 중에도 믿음이 크다는 한 사람이 성난 얼굴로 갓난아이를 안고 와서는 스님께 욕설을 하면서 그 아이를 키우라며 집어 던지고 갔어요.

신도들은 그동안 계율을 잘 지키는 분이라고 스님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참 기가 막혀 했지요.

신도들이 실망하고 의아해 하는 데도 스님은 아무 변명도 없었고 표정도 담담하셨어요.

그러자 대부분의 신도들은 신심이 싹 가셔서 침을 뱉고 돌아서 버리고 스님을 철저히 믿고 따르던 몇몇 신도만 남았어요.

그렇게 많은 신도들이 떠나 버린 뒤에도 스님은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아기를 받아 안으셨고 배고파 우는 아기의 배를 채워 주고자 손수 아기를 안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젖을 얻어 먹였습니다.

아기 기르는 아주머니들은 스님을 고약하게 여겨 멸시 하면서도 아기야 무슨 잘못이 있느냐며 젖을 물려 주었지요.

스님께서는 그렇게 멸시 속에 젖동냥을 해서 3년 동안 그 아기를 키웠어요.

그런데 그 아기는 어찌된 아기인가 하면 바로 그 아기를 맡긴 신도의 딸이 낳은 아이였고, 아이 아버지는 그녀가 좋아하던 마을의 총각이었지요.

옛날에는 처녀가 아기를 낳는 일이 있으면 그 집안의 명예가 더러워진다고 해서 아기를 죽이기도 했거든요.

그러니 그 딸의 생각에 부모의 꾸중도 두렵고 아기의 안전도 걱정되어 부모가 가장 신봉하는 스님께 맡기게 되면 우선은 화를 면할듯 해서 그런 얕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어요.

스님께서 3년을 그렇게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젖동냥으로 아기를 키우는 동안 그녀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자신이 몹쓸 짓을 했다 싶거든요.

그리고 아기 아버지도 따로 있고 하니 평생을 그렇게 놓아둘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3년을 미루다 못해서 부모님께 사실대로 고하게 됩니다.

사실을 알게 된 부모들은 기가 막혔지요.

황급히 스님께 달려가 백배 사죄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찾고자 하니 스님은 두말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기를 돌려주셨어요.

욕먹고 아기를 맡았을 때나 절 받으며 아기를 돌려줄 떄나 그 태도다 똑같았답니다.

그것이 참 보통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참선을 해서 내 생명을 찾으면 그런 경계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칭찬한다고 해서 내 인생에 더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고, 천하가 헐뜯는다고 해서 밝은 내 인생이 뿌리 뽑히고 흔들리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모든 행동은 자기가 하는 것이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무슨 일을 했을때 그 일을 내 일로서가 아니라 남의 일을 해준 듯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 ‘남’이라는 것 때문에 괴롭고 고달파하면서 그 수고에 따른 대가를 원하고 그 대가를 받지 못할 때 불만에 차 괴로워하니 결국 복을 얻지 못합니다.

내가 밥을 먹어야 내 배가 부르듯 내가 하는 일이 바로 내 일이요, 나를 위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설령 누가 칭찬을 안 해도, 누가 대가를 안 줘도 우주천지 인과의 원칙에 따라 대가를 받게 됨을 믿고 즐겁게 살게 되지요.

남의 일을 하려면 남의 눈치도 보아야 하니 괴롭고 답답 하여, 몇 푼의 이익과 칭찬이 있어도 큰 도는 얻지 못합 니다.

불교의 원리만 밝혀 알면 자타가 따로 없고, 세상 일에 내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 내가 내 일 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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