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구하여야 할 텐데 복을 구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광덕스님
불법을 배우는 불자로써 무엇보다 깨달음을 구하여야 할 텐데 복을 구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복을 구하는 일과 깨달음을 구하는 길은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습니다.
첫째 자비보시를 행하며 중생을 위하여 봉사 헌신하는 사람이 상(相)을 여의지 않았다면 그것을 복을 구하는 결과가 됩니다.
유의공업에 떨어지는 선행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좋은 과보를 받을 뜻 이라도 함께 있다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둘째로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여 일심 정진하되 그것이 세간적인 선업이든 출세간적 수행이든 그 모두는 필경 깨달음에 귀일됩니다.
깨달음 안에는 지혜와 복이 함께 하는 것이며 그것은 깨달음의 절대성과 함께 영원 무한 절대 원만합니다.
셋째로 깨달음을 구하는 생각도 없이 오직 세속적 생활이 개선되고 장애요건들이 제거되며 세속 속에 그 뜻이 순탄하게 펴지기를 바라는 기본 목적에서 수행하더라도, 염불 독경하고 생각을 바꾸고 맑고 깊은 마음에 머무르며 바라밀행을 닦아간다면 그 기복 소망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세 번째의 경우와 같이 세간적 생활에서 장애 없고 뜻 이루기를 바라는 기도에서도, 얻고자 하는 욕심만을 붙들고 내세운다고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 순응한 마음이 되고 법성에 순수한 행을 하여 한결같이 닦아감으로 마음이 맑아지고 행이 청정해진 데서 소망의 과실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되풀이 말하면 기복행 위에 있어서 진실한 수행이 있어야 이루어 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참되게 믿고 행할 따름입니다.
복업을 닦더라도 상이 없으면 지혜행이 되어 깨달음이 함께 할 것이며 깨달음의 수행이라도 수행상이 없으면 참수행이 되어 깨달음에 이를 것이니 복과 혜가 함께 함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발심이 고난을 당하여 발보리심하기도 하고, 현실적 고난에 갇혀 보리심을 발하지 못할 때도 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역시 우리는 현실적 복업을 구하면서도 항상 무상보리를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