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깨치고 남을 편케하는 길/
혜인스님
■ 단양 광덕사에 도착하자마자 산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대형 크레인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아파트 20층 높이의 대불이 들어선다는 백만불전(百萬佛殿) 불사 현장에서 인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혜인 스님을 발견했다.
근래 보기 드문 대작불사 현장을 뒤로하고 스 님의 뒤를 따라 요사로 내려왔다.
인사를 올리고 근황을 여쭈니 “무고하다”하신다.
한 말씀 듣고자 찾아뵈었다고 하니 스님은 대뜸 “불교가 무엇인지 아는가?”하고 되묻고는 게송을 읊으셨다.
원각산중생일수(圓覺山中生一樹) 개화천지미분전(開花天地未分前) 비청비백시비흑(非靑非白亦非黑) 부재춘풍부재추(不在春風不在秋)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 원각산에 한그루 나무가 살아있는데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에 이미 꽃이 피었네.
그 색은 푸르지도 아니하고 희지도 않으면 또한 검지도 아니하되 봄이나 가을 바람에도 영향을 받지 않네.
오고 감이 없고 또한 머무른 바도 없건만 한물건도 없는 속에 무진장의 보배가 들었나니.
스님은 게송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어 설명해 주셨다.
“원각산을 찾으려니 그 모양이 없습니다.
이런 산이 있기는 한 것인가 의심을 막 해요.
헌데 그 산에 한그루 나무가 있단 말입니다.
나무속에는 일체의 한 물건도 없는데, 그 속에 또 무진장 보배 창고가 있다 합니다.
온갖 금은보화, 성인(聖人), 지옥이 모두 이속에 들어있어요.
어떤 이는 이 나무를 ‘마음’이라고도 부르고, ‘ 우주’라고도 부르는데 다들 제 맘대로 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나무가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거죠.” 불교의‘무변광대(無邊廣大)’함을 이보다 더 실감나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불교예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으로 시작해 일평생을 이 마음이란 놈과 씨름하면서 그것을 찾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찾지도, 알지도 못한다면 잘 사용하기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스님은 “불교의 근본은 마음을 찾는 종교요, 마음을 보는 종교요, 마음을 아는 종교요, 마음을 깨닫는 종교요, 마음을 잘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종교다”라고 덧붙였다.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불교를 믿는 것은 마치 소리 나지 않는 북 과 같아서 아무런 쓸모가 없죠.
불교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면서 불교를 믿어야 합니다.” 혜인 스님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일러 주었다.
“나는 불자님들을 대할 때 마다 늘 하심(下心)하는 마음을 먼저 강조하거든요.
매사에 하심할 줄 알아야 해요.
하심은 자신을 깨치고 남을 편하게 하고, 부처님 가신 길을 한 걸음씩 쫓는 수행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금경경)에 ‘무상즉불(無相則佛)’이고 ‘유상즉중생(有相則衆生)’이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은 늘 상에 얽매이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더 하심하지 않을 수 없어요.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내가 남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요즘 정치판이나 세상 돌아가는걸 보면 이놈, 저놈 하고 함부로 험구를 퍼붓는 일이 다반사더라구요.
면전이 아니라고 남을 낮추는 것은 더욱 잘못된 거죠.
항상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추세요.
고인(古人)의 말씀에 ‘도가 높은 자는 마음을 더욱 적게 쓰고, 벼슬이 높을 수록 항상 뜻을 낮추어야 한다’했습니다.
복은 손 모아서 비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는 사람에게 가는 겁니다.” 혜인 스님이 이렇게 하심을 강조하는 데는 은사였던 일타 스님의 가르침이 크게 영향을 미친 까닭이다.
일타 스님은 스무 살에 대장경을 독파하고 스물여섯에 손가락 네 개를 연비해 부처님께 공양한 그야말로‘생이지지(生而知之)’한 분이었다.
제방의 대율사로 존경 받으면서도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자비로웠던 스승은 누구에게도 모질게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