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듯이 아미타불만 불렀다”
-무여스님-
오늘은 희망의 새해 첫날이라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법문하겠습니다.
행복, 행복, 말만 들어도 설레는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 행복한 결혼 생활, 행복한 인생 등 여러분이 일상생활 중에 쓰는 말 중에 가장 고귀하고 누구나 바라는 말이 바로 행복입니다.
사람이 돈을 벌려고 하고 결혼을 하거나,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입니다.
행복이란 인간의 최고의 이상이요,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행복이란 ‘다행스럽고 복이 많다’라는 뜻과 ‘신심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만족스러운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여러분의 행복지수는 얼마입니까? 누군가 ‘인간은 행복을 찾는 나그네’라 했습니다.
인간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 나그네처럼 인생을 이곳 저곳 헤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을 행복을 찾는 여우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여우처럼 행복을 찾기 위해서 교활하고 온갖 잔꾀를 부리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부터 행복을 찾아다녔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떤 외국 시인은 ‘산 넘어 행복이 있다’고 하기에 간절히 노래하고 노래하면서 산을 넘고 또 산을 넘어도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소설 (어린 왕자)와 (성채)로 유명한 불란서의 비행 작가(생 텍쥐페리)는 행복을 찾기 위해서 공중을 날려는 꿈을 키우다가 비행사가 되어 야간에 아프리카 상공을 날다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 유럽인들이 꿈과 희망을 안고 행복을 찾아서 간 곳이 오늘의 미국입니다.
불자 여러분,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행복을 바라거든, 첫째, 일을 하라.
둘째, 사랑을 하라.
셋째, 희망을 가져라.’고 외쳤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많이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희망을 가져도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행복은 일시적이고 결국은 허망합니다.
옛부터 동양인들은 인간의 오욕과 오복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근본 욕망을 재물과 색욕(色欲)과 먹는 것과 명예와 잠자는 것을 들었습니다.
유가에서는 오래 살고, 부(富)하고, 건강하게 마음 편하게 살고, 도덕을 지키기를 낙으로 삼고,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을 다섯가지 복이라 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욕망을 성취하거나, 이 다섯 가지 덕목을 갖추는 것을 ‘복이 많다’, ‘팔자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옛 성인이나 도인들은 그런 행복도 허망하고 결국은 괴롭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는 5,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더벅머리 노총각이 행복을 찾아 나섰다.
성은 한(韓)씨요, 이름은 복동(福童), ‘복동’이라는 이름은 ‘복’이라는 말과 인연이 깊은지, 어릴 때부터 ‘우리 복덩이, 우리 복덩이’라고 했던 것이 ‘복동’으로 변했다.
그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심사숙고하다가 어떤 때는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하고, 어떤 때는 괴로움이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때는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생사의 기로에서 고민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잘 사는 사람, 행복한 사람을 직접 보고 장래 문제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어디로 갈까, 누구를 찾을까, 궁리 끝에 행복은 사랑에서 올 것 같아서 주위에서 행복하다고 소문이 난 친구 집을 찾기로 하였다.
그 친구는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대학까지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도 가졌다.
특히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은 고향의 예쁜 처녀와 결혼하여 잉꼬부부라고 할 정도로 금슬이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슬하에는 예쁘고 똑똑한 아들, 딸 남매까지 둔 친구로서 누가 봐도 복이 많다는 친구였다.
그 친구 집에 가면 행복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잔뜩 기대에 차서 갔다.
대문을 막 들어서는데, ‘우당탕탕!’ 살림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에 그 점잖은 친구의 입에서 막말이 터져 나오더니, 부인도 질세라 쌍소리를 하니 아이들은 죽을 것 같은 소리로 마구 울어 댔다.
행복을 찾으러 갔던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설마 내 친구 아무개는 아니겠지’라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나 분명히 친구 집이고, 친구의 목소리가 틀림없는 줄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여 도망치듯 나오고 말았다.
너무 충격이 심하여 온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걸음조차 제대로 걷기가 어려웠다.
친구 집에서 크게 실망한 ‘행복을 찾는 사람’은 비틀거리며 네거리까지 나왔다.
어디로 갈까…
여러 사람을 떠올렸다.
가장 믿었던, 가장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 친구에게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가볼 곳이 막연했다.
얼마를 생각하다가 고을에서 제일 갑부인 변 부자댁을 찾기로 했다.
자수성가한 갑부로서 언제 보아도 당당하고, 무슨 일이든지 자신만만하고, 어떤 사람에게도 굽힘이 없이 큰소리 떵떵치는 의지와 노력의 사나이 변씨에게 가면 남다른 행복을 느낄 것 같았다.
사랑채에서 변부자를 찾으니, 변부자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어떤 남자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하나밖에 없는 변부자의 동생이었다.
변부자는 삼 천석꾼인데, 삼십 석도 못하는 가난뱅이 동생한테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땅 두 마지기를 돌려주지 않는다고 볼 것 없이 나무라고 있었다.
그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만정이 뚝 떨어졌다.
허탈한 기분으로 그 집도 나오고 말았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변부자 댁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또 어디로 가볼까 고민하다가 당대의 이름 있는 정치가 댁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문지기에게 ‘정치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손님을 대하는 태도와 말이 불손하고 거칠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쌀쌀하여 마치 범죄집단 같은 곳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간신히 부인을 만나니 상전이 하인을 대하듯이 거만하고 딱딱하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왕 어렵게 들어간 집안이라 “행복한 정치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부인이 말하기를 “행복은 무엇 말라비틀어진 말입니까? 그 양반은 행복의 ‘행’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부인을 보니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거만하고 딱딱하고 험구이니 그런 여자의 남편이라면 행복과는 거리가 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봉건주의 시대 권문세도가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정작 정치가는 만나지도 않고 괴로운 심정으로 소슬 대문집을 나오고 말았다.
정녕 행복한 사람이 없단 말인가.
이제는 행복이라는 말도 싫어졌고, 행복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마음도 없어졌다.
비틀거리며 산속으로 올라가다가 길섶의 잔디 위에 쓰러졌다.
어느덧 밤이 되어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빛났다.
문득 저 반짝이는 별들처럼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다.
순간, 자살을 결심하였다.
굳이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의욕도 없었다.
자살을 결심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멀리 동쪽 하늘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잠이 들었다.
여러 날 제대로 자지 못한데다 피로가 겹쳐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뜨니 다음날 한낮이 지나서였다.
따뜻한 양지 바른 곳에서 실컷 자고 나니 지쳤던 몸도 완전히 풀리고, 행복을 찾겠다는 마음도 자살을 하겠다는 마음도 다 쉬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가볍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대단히 만족스럽고 기분이 좋았다.
순간 ‘이것이 행복이 아닌가’ 하고 쾌재를 불렀다.
이 이상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것인가.
그는 드디어 행복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그는 행복한 순간을 자세히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는 드디어 ‘행복은 마음에서 오는구나, 텅빈듯한 아무 생각도 없는 그런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대로 몇 시간을 누워 있었다.
여전히 아무 생각도 없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그는 목탁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목탁 치는 스님은 미치광이 같은 스님이었다.
스님은 일제시대 극장 선전원들이 사방에 영화 포스터를 붙인 통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다니면서 선전했던 모습처럼 앞에도 나무아미타불, 뒤에도 나무아미타불, 옆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주렁주렁 써서 붙였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쓴 깃대를 등에 지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목탁을 쳤다.
그 스님은 하루 종일 그렇게 서울의 골목을 다니다가 해가 지니 삼각산 도선사로 가는 중이었다.
스님은 그렇게 5년간이나 목탁을 치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다녔다.
스님께서 그렇게 요란하게 써 붙이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시내를 누비고 다니는 것은 귀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소리를 듣고, 눈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자를 보기만 하여도 그만큼 업장이 소멸하고 공덕이 쌓인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고, 때로는 염불로 업장을 참회하는 참회법도 가르쳐주는 거리의 보살이요 선지식이었다.
이 스님이 화담 스님이다.
스님의 세속 인연은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성이 황(고 19세에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은사스님께서 “너는 경전도 보지 말고 참선에도 관심을 갖지 말고 오직 아미타불만 일념으로 염해라.”는 말을 듣고 오직 아미타불만 했다.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새벽에 눈 뜨자마자 밤에 잘 때까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아미타불만 염하고 아미타불에 빠졌다.
처음에는 잘 안되더니 그렇게 지극하게 하여 3, 4개월이 지나니 자신이 생기고 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쯤 지나니 더 잘 돼서 1, 2 시간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 무렵 장안사 극락전에 서울의 어느 신심 있는 보살이 3·7일간 기도를 왔다.
주지 스님이 찾는다기에 주지실로 갔더니, “화담 수좌, 자네가 기도를 해주게.”하였다.
화담 스님은 주지스님의 말씀이 고맙기도 하고 처음으로 하는 사중 기도라 열심히 하였다.
공양하고 화장실 가고 극히 필요한 용무 보는 일 이외에는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고, 기도에 아예 몸뚱이를 바쳤다.
염불이 점점 잘 되는 것 같더니 몇 시간씩 일념에 들기도 하다가, 기도를 마칠 무렵에는 하루 반 가량을 삼매에 들기도 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도 계속 열심히 하다가 입산한지 3년만인 어느 날 아미타불의 무량한 광명을 보게 되었다.
그 때 나이 30대 중반이었다.
그 무량한 빛과 오묘한 진리를 체험하는 순간 그 기분을 억제치 못하여 하루 종일 금강산을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며칠을 미친 사람처럼 다니다가 이 기쁨을 나만 누릴 것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회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미타불 네 글자를 보여주고, 귀에 넣어줌으로써 세세생생 지은 업장을 녹여주고 죄업을 소멸시켜주어 일체 중생이 왕생극락하리라’ 하는 큰 서원을 세우고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서울로 갔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서울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 목탁을 치면서 올라오는 화담스님을 보게 되었다.
스님을 보는 순간 환희심이 나고 존경심이 났다.
얼마를 따라가다가 자기도 스님의 목탁에 맞춰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친근감이 났다.
도선사에 도착하여 화담 스님을 따라 밤새도록 정근을 했다.
다음날 아침인데도 전혀 피로한 줄 모르고 아미타불을 불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일주일이 지나니 몸은 가볍고 점점 기분은 더 좋았다.
그는 염불이 잘 될수록 화담스님이 장안사에서 아미타불에 빠지듯이 오직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념에 들었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염불을 할수록 진정한 행복, 참 행복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에 있다는 것을 더 절실하게, 더 진하게 느끼며 미친 듯이 아미타불만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아미타불에 빠져 석불만 보고 정근하고 있는데, 서울역에서 목탁을 치고 다니는 화담 스님이 보였다.
이상해서 옆을 보고 뒤를 돌아보아도 화담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 화담 스님이 내려갔는지도 모르고 염불에만 빠져있었던 것이다.
하도 신기해서 화담 스님을 계속 주시했다.
화담 스님은 서울 역전에서 얼마간 목탁을 치면서 다니더니 여러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뒤에 남대문을 거쳐서 중앙청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청담 스님께서 외출하고 들어오셨기에 경계를 자상하게 이야기했더니, “그간 애썼다.
참으로 좋은 경험을 했다.
식(識)이 맑아지면 그럴 수도 있다.
천안통이 열렸다.” 하면서 “보이더라도 일체 신경을 쓰지 말고 아미타불 일념에만 빠져라.”하였다.
그 이후 예사롭게 서울 시내가 보이고 인천 앞바다까지 보였다.
그 때는 지나가는 사람만 보아도 그 사람에 대해 다 알 것 같았다.
도선사에서 3개월 가량 기도를 하던 어느 날 화담 스님이 나타났다.
그는 화담 스님에게 묻지도 않고 사방에 나무아미타불이라 주렁주렁 매단 옷을 입고 따라나섰다.
그는 화담 스님의 목탁에 맞춰 아미타불을 목청껏 불렀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는 가는 곳마다 아미타불을 느끼면서 목이 터져라 서울시민을 위하여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불렀다.
두 스님이 아미타불을 부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우 모여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멸시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구경거리처럼 따라 다니기도 하였다.
상가 앞을 지나면 탁발하려고 온 줄 알고 돈이나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어떤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에서는 시장 상인이나 시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수십 명씩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그 때만 해도 시장 주변에 거지가 많았는데, 시장을 돌면서 돈이나 물건이 생기면 다 나누어 주곤 하였다.
스님은 정근하며 가다가 농번기에는 일손이 없는 농촌에 모도 심어주고 보리를 베어주기도 하였고, 어느 곳에서는 하루 종일 타작을 해주기도 하였다.
공사판을 지나가다 막노동꾼과 같이 힘든 일을 해주기도 했고, 어떤 읍에서는 우는 아이를 봐주기도 하였고, 환자가 있으면 간호도 해주고, 지나다가 노인정을 보면 절대로 무심히 지나가지 않았다.
어떤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화담 스님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보살행을 하고 또 거리를 다니면서 거리의 포교사가 되고 아미타불의 전달자가 되었다.
또한 스님은 자비하고 남에게 공경심이 대단하여 누구든지 부처님처럼 대하고 부처님처럼 모시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스님에게는 이 사람도 부처님, 저 사람도 부처님,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부처님처럼 대하여 스님에게는 가는 곳마다 부처님 세계요 극락정토였다.
그래서 스님과 한 번만 대화하거나 사귀면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다니다가 아미타불 일념에 들면 걸어가던 길이든, 절이든 세속 사람의 집이든 몇 시간씩 정근을 하다가 가곤 하였다.
어느 해는 충청도 계룡산 근처를 지나다가 사흘이나 묵으면서 정근을 하니 신도안에 가던 이교도들이 몰려와 공양을 듬뿍 내서 인근 주민을 포식시킨 적도 있다.
어느 해 충청도 천안을 지나가다가 화담 스님이 문득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도 수계를 해야지?” “네, 저도 받고 싶습니다.” 하니 길가의 큰 능수버들아래 정좌하더니 “나에게 삼배를 하게”하여 삼배를 드렸더니 “불법을 잘 호지하게.
자네가 체험한 것이 정법일세.
그것을 호지하는 것이 계일세.”하였다.
그러면서 “오늘부터 법산(法山)이라 하겠네.”하여 법산 스님이 되었다.
화담 스님은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아미타불 정근을 하여 극락정토를 발원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아미타불 인연을 맺어주고 갖가지 보살행으로 선근공덕을 쌓다가 말년에는 부산 범어사에 정착하였다.
법산스님도 줄곧 함께 수행하였다.
두 스님은 대중생활을 하지 않고 공양은 행자나 일꾼들과 같이 하고 잠은 부목방에서 잤다.
아침 공양을 하고 주변 도량 청소가 끝나면 어김없이 부산 시내를 내려가 아미타불 정근을 하며 다니다가 저녁에는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화담 스님은 총무스님에게 말했다.
“내가 석 달 후에 가야 되겠소.” 총무스님은 무심히 지나가는 말처럼 들었다.
가야 되겠다는 말도,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말인지, 돌아가신다는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가신다고 한 날 일주일 전에 총무스님을 방으로 불렀다.
때가 묻어 새카만 주머니에 꼬깃꼬깃 모은 10원 짜리와 100원짜리 돈 6만원을 주면서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네.
경책 한권도, 농짝 하나도 없네.
못난 중이라 옛 어른들처럼 땅 한 마지기도 부처님께 바치지 못하겠네.
적은 액수지만 사중에 보태쓰게.” 하면서 주고는 또 양말 속에 넣어두었던 3만원을 주면서 화장비로 써달라고 하였다.
화담 스님은 가시기 하루 전날 손수 향나무를 달인 물로 목욕을 하고, 미리 마련한 수의로 갈아입은 후, 깨끗한 장소에서 그간 입었던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태운 후, 실로 남은 것이라고는 수건 하나, 양말 한 켤레도 없이 오직 수의와 가사 장삼 뿐이었다.
3개월 전에 가겠다고 했을 때 가볍게 들었던 총무스님은 화담 스님의 거동이 이상하게 느껴져 학인 승려 두 명으로 하여금 곁을 지키도록 하였다.
예언한 날 10시가 되자 화담 스님이 조용히 말하였다.
“이제 내가 가야 할 시간이 되었구나.” 그때 곁에 있던 젊은 스님이 말했다.
“스님, 10시는 부처님께 마지 올릴 시간입니다.” “허, 듣고 보니 그 말도 옳구려.” 앉은 채로 열반에 들고자 했던 스님은 젊은 스님들의 부축을 받아 법당으로 올라갔다.
법당 옆에 단정히 앉아 사시 마지가 끝날 때를 기다렸다.
“이제는 가야겠구나.
나를 좀 눕혀다오.” 시내에서 정근하다가 황급히 올라온 법산 스님과 젊은 스님의 부축으로 반듯이 누운 화담 스님은 조용한 음성으로 발원하면서 가셨다.
“원컨대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일시에 성불하소서.
원컨대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일시에 성불하소서.
원컨대…..” 화담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범어사 스님들은 큰 충격을 받고 슬픔에 빠졌다.
특히 범어사 총무스님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아이구, 아이구…
진짜 도인 스님! 선지식을 옆에 두고 눈 어둡고 귀 멀어 몰라보았으니 참으로 한탄스럽구나.” 장례는 스님의 삶처럼 간소하면서 여법하게 치루어졌다.
법산 스님은 은사스님이 남긴 한줌의 재를 금정산에 뿌리고 부산을 떠났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고 더욱 신심을 내고 발심하였다.
그 이후로는 더 큰 소리로 더 간절하게 염불하였다.
그렇게 전국을 3년 가량 다니다가 발걸음을 멈춘 곳이 강원도 명주군의 어느 외딴 토굴이었다.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이는 산자락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 조그마하고 보잘 것 없는 집에서 살았다.
이곳에서는 지금까지의 거리의 삶과는 전혀 달랐다.
거의 두문불출하였다.
처음 몇 년간은 땔감을 구하기 위하여 산에 오른다던가, 양식이 떨어지면 탁발하기 위하여 외출도 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는 누군가 땔감이 없으면 땔감을,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조달하여 주었다.
그는 하루 종일 아미타불에 빠졌다.
오직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로 눈을 뜨면 잘 때까지 나무아미타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달이 가고 해가 지나서 10여년간 아미타불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
그간 어떤 때는 너무 좋아 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남모를 소리를 내며 즐기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법열에 자신을 억제하기 어려워 동해안을 질주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뒷산 상봉인 오대산 삼왕봉을 올라가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밤중에 방광하여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또 어느 해는 강원도 산골에 앉아서 서울을 보며 군사 정부의 나라 걱정을 하기도 하였고, 어느 여름에는 큰 비가 올 것을 예상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킨 일도 있고 언젠가는 동해안으로 상륙한 공비들 2명을 자수시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그를 인근 마을 사람들은 ‘살아있는 아미타불’ ‘살아있는 부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 도인 스님’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앞날을 내다보는 ‘신비한 스님‘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삼십년 가까이 부른 아미타불 속에서 진정한 희열을 느끼고, 그가 그토록 바라던 참 행복을 느끼다가 갔다.
그는 열반에 들 때도 아미타불 일념에 들어 법열을 느끼다가 얼굴에 미소를 지은 상태로 갔다.
이상 화담 스님과 법산 스님의 이야기는 법산 스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두 스님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가 그대로 좋은 법문이라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명하겠습니다.
흔히 행복은 인간의 근본 욕망인 오욕을 성취하거나, 유가에서 이야기하는 오복을 갖추는데서 느낄 수 있다고 하지만, 옛 성인이나 도인들은 그런 행복은 결국은 허망하고 괴롭다고 하면서 진정한 행복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화담 스님을 만나기 직전 잔디 위에서 푹 자고 텅 빈 듯한, 아무 생각도 없는 마음에서 오는 행복, 그 행복은 아주 고귀하고 아주 값진 체험이었습니다.
행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남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또 행복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잠언가 라로시푸코는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결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고 말했지만, 인간은 노력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맹자의 말처럼, ‘행복과 불행은 자기가 구하지도 않는데도 찾아오는 일은 없다.’고 봅니다.
행복은 스스로 만들고 창조하는 것입니다.
행복도 인과(因果)입니다.
행복의 씨앗을 크게 뿌리면 큰 행복을 얻을 것이며, 적게 뿌리면 적은 행복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의 인(因)을 부지런히 심으면 행복이 빨리 다가올 것이고, 행복의 원인을 제공하지 못하면 행복은 당신을 외면할 것입니다.
행복을 바라거든 행복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리십시오.
그러면 행복이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나이 칠십이 되도록 완벽한 아내를 찾고 또 찾아 헤매고 있는 사내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직도 여자를 찾아 헤매고 있나? 자네는 언제나 자리를 잡을 텐가?”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완벽한 아내를 찾고 있어” “아니 여보게, 칠십년 동안이나 헤맸으면 됐지, 이제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뭐가 모자라 또 헤매겠다는 것인가?” “난들 어떻게 하나, 완벽한 아내가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는걸.” 그의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래 그 동안 찾아본 결과 완벽한 여자가 있었나?” “꼭 한 번 있었지.” 그러자 그의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나?” 그러자 이 칠십 넘은 노인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매우 어려웠어.
그 여자 역시 완벽한 남편을 찾고 있었으니까!” 삶이란 불완전하기에 아름답고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 어른들은 소욕지족(小欲知足)이라 하여, 욕심을 부리지 말고, 적은 것으로 만족하게 살라고 가르쳤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 춥고 배고프며 구차한 중에서 마음을 편안히 하여 도를 즐기고 행복을 느꼈습니다.
행복은 크고 화려한 것 보다는 작고 소박한 것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땅을 수만 평을 소유했더라도 이 한 몸을 누일 곳은 한 평이면 족하고, 아무리 재벌 총수라도 하루 세 끼 이상은 더 먹을 수 없습니다.
올 때도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갈 것인데 무엇을 탐내고 어떤 것을 욕심부리리요.
당나라 철산선사는 대단한 인물이라 그의 인품이 궁중까지 알려졌습니다.
그 때 마침 나라에서는 동량감을 찾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토굴에서 토란을 구워먹고 있는데 사자가 왔습니다.
“큰 스님, 대왕님의 명을 받아 큰 스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그러자 철산 스님은 얼굴도 안 들었습니다.
세 번째 말하니 겨우 얼굴을 들면서 “나는 지금 토란을 구워먹고 있느니 방해하지 마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희랍의 철인(哲人) 디오게네스는 적은 욕망을 갖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한 벌의 옷과 한 자루의 지팡이와 조그마한 보퉁이 이외는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고 통나무집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알렉산드르 대왕이 그를 찾아 물었습니다.
“당신이 소망하는 것이 무엇이오? 무엇이든지 말해 보시오.” “나는 아무 것도 소망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일광욕을 하고 있으니, 당신이 햇빛을 가려 방해가 되니 비켜만 주시요.” 대왕은 떠나면서 “나는 알렉산드르가 아니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옛 선비들은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도다 ”하면서 영화가 지나치면 화가 되는 줄 알고 스스로 근신하고 삼갔습니다.
그리하여 한(漢)나라 고조 유방이 천하를 얻자 일등공신 장량(張良)은 떠나갔고, 진나라 도연명은 벼슬이 높아지자 귀거래사를 읊으며 전원으로 돌아갔습니다.
행복은 마음과 비례합니다.
마음은 크게 비우면 큰 행복,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적게 비우면 적은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느끼려면 마음을 크게 비우고 크게 쉬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쉰다는 것은 일체 생각을 끊어버리고, 일체 마음작용을 쉰다는 것입니다.
옛 스님은 “마음을 천 번 쉬고 만 번 쉬라‘고 했습니다.
쉬고 쉬고 또 쉬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쉬면 곧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임제 스님은 “쉬면 곧 청정법신이다” 했습니다.
옛날에 무업대달 스님은 학인들이 “스님, 법문 좀 해주십시오” 하면 화를 벌컥 내면서 “망상 피우지 말라 ”고 했습니다.
법문도 본분사 분상에서는 망상입니다.
이 망상이 근본자성을 흐리게 하고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번뇌망상도 쉬고, 쉰다는 생각까지도 쉬어서 대무심경지(大無心境地)에 들어가게 되면 깨치게 됩니다.
그 자리가 부처의 경지요, 바로 청정법신입니다.
그것을 열반을 성취했다고 합니다.
마치 숯불이 이글이글 타듯이 온갖 번뇌망상으로 헐떡거리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숯불이 다 타고 불기가 완전히 다 꺼져서 아주 고요하고 아무런 느낌도 없듯이 일체 번뇌망상이 쉬고, 쉰다는 생각까지도 쉬어서 아주 고요하고 무심한 경지가 열반입니다.
그것은 생(生)하는 것도 아니고, 멸(滅)하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라 생멸이 없는 도리라고 합니다.
그 깨달음의 경지에서 느끼는 법열에서만 참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선지식들의 한결같은 말씀입니다.
그것은 기쁘다고 할 수도 있고, 즐겁다고 할 수도 있는,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오묘하고 대단한 기분에서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떤 스님이 깨치고 나서 사흘이나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더랍니다.
얼마나 좋기에 사흘이나 추겠습니까.
어떤 도인 스님은 어찌나 좋은지 산천을 하루 종일 무릎이 깨지고 발에서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다녔다고 하며, 어떤 종사는 늘 잔뜩 찌푸린 얼굴인데 어느 날 깨치고 나서는 항상 싱글벙글하여 모르는 사람은 ‘마음 닦는다고 하더니 미쳐도 제대로 미쳤네’하고 걱정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법산 스님도 공부하다가 너무 좋아 자신을 억제하기 어려워 동해안을 질주하기도 하고, 뒷산을 올라가기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춤추는 기분이나, 하루 종일 산천을 망아지처럼 마구 다닌 기쁨이나, 항상 싱글벙글하는 즐거움은 본인이 아니면 어떻게 알리요.
진정한 행복은 그런 법열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참 행복은 수행에서만 느낄 수 있고, 수행에서 진정한 기분을 느껴보지 못하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쉬고 비울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옛 사람들은 수행 없이도 언하(言下)에 대오한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부처님 가신지가 오래인 말법세상이라선지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기가 어렵습니다.
유명한 육조(六祖) 대사는 출가 전에 더벅머리 노총각으로 시장에 땔감나무를 지고 팔러갔다가 거리를 지나가는데, 누군가 『금강경』을 읽는데 ‘응당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구절을 듣고는 순간 깨쳤습니다.
부처님 당시 어떤 아라한들은 부처님의 말씀 한 마디를 듣고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도 하였습니다.
옛 어른들은 그렇게 대단했습니다.
현대에는 수행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는데 진정한 공부인은 옛날보다 드물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은 옛 사람보다 근기도 하열하거니와 옛 사람처럼 돈독한 신심도 없고, 진정한 발심도 못한데다 간절한 성심도 없습니다.
그런데다 요즘 사람은 어릴 때부터 눈만 뜨면 책을 가까이 하고, 책 속에서 자라고, 지식으로 살아가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도 지식입니다.
이 지식도 마음공부에서는 적(敵)인 번뇌망상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발전할수록 그 지식으로 인해서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점점 왜소해지고 번뇌망상은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번뇌망상이 많아질수록 인간은 더 괴로워지고 진정한 행복과는 점점 멀어지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지금 세계는 미국식의 자본주의체제 아래 배금사상(拜金思想)과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배부르게 하고 편리하게 살아가게는 하지만 인간의 근본 욕망을 증장시켜서 행복으로 가는 길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잘 살려고 하면서 스스로를 망치는 결과가 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욕망을 줄이고, 절제된 생활을 영위하여 어떻게 근본자성을 다스리냐에 따라 인류의 장래가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쉬고 비울 수 없고, 근기마저 하열하니 방편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수행법입니다.
비록 각가지 수행법으로 수행하고는 있지만 옛 어른들에 비해서 순수하지 못하고 때 묻어 있기 때문에 수행하기가 어렵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괴로워도 해야 하는 공부가 수행입니다.
수행은 해라 말아라 할 필요가 없는, 큰 일 중의 큰 일입니다.
옛 선사들은 이 일을 위하여 육신를 바쳤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설사 깨닫지 못하더라도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念佛三昧)에, 참선하는 사람은 선정에는 꼭 들어 보십시오.
염불삼매란 안 되는 염불이라도 지극하게 성심성의껏 애쓰다가 보면, 염불에 마음이 집중되어 일체의 번뇌망상이 사라지고 마음이 아주 조용히 통일되어 안락한 상태를 말합니다.
선정이란 화두참구가 잘 되어서 화두에 완전히 빠진 상태, 완전히 몰입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화두가 간절하게 들려서 일체의 번뇌와 망상이 다 사라지고 나와 화두와 세계가 온통 한 덩어리가 되어서 아주 고요하고 아주 깨끗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는 참선하는 곳이 집인지 절인지도 모르고, 시작한지가 몇 시간이 지났는지, 밥을 먹었는지 몇끼나 굶었는지도 모르고, 일체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깊은 경지에 들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 전에 백양사 서옹(스님이 좌탈입망(坐脫入亡), 즉 앉아서 돌아가셨다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앉아서 죽고 서서 마음대로 죽는 것도 다 선정의 힘입니다.
삼매의 경지나 선정의 경지에 가면 법산 스님이 도선사에 앉아서 서울역에서 활동하는 화담 스님이나 인천 앞바다도 볼 수 있듯이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안목도 트이고 힘도 납니다.
여기에 도달해야 불교의 진수를 희미하게나마 확신할 수 있고, 수행이 무엇인지 입을 열 수 있으며, 진정한 법열 즉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경계는 꼭 체험하여 참 행복이 무엇인지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한 번만 제대로 느껴보시면 아무리 말려도 수행을 안 할 수 없고, 불자가 된 것이 한없이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행복 찾아 시방세계가 미친 듯이 헤매다가 지친 몸 이끌고 간신히 한 칸 토굴 도착하니 빈 마당 돌담 아래 행복의 꽃이 만발하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