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下心)과 안심(安心)
지정스님
(봉암사 선원) 보살은 이렇게 서원한다.
“모든 중생의 집이 되어서 그들의 선근을 키워주고, 귀의처가 되어서 해탈을 이루게 하고, 스승이 되어서 정법에 들게 하며 등불이 되어서 업보를 환희 보게 하며 빛이 되어서 깊고 묘한 법을 비추리라” 이글은 80화엄경 10행품 가운데 선법행(善法行)에 나오는 구절로 보살마하살은 오로지 중생의 행복과 해탈을 위해서 수행하고 설법한다는 내용이다.
‘나’라는 생각이나 ‘나의 이익’을 위한다는 개념은 철저히 버리고 무아(無我)의 입장에서 자신을 낮추고 중생의 뜻을 따르고 공경할 때 진리의 문에 들어설 수 있고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공경하고 받드는 것이 곧 여래를 공경하고 찬양하는 것이라고 화엄경은 말해준다.
지리한 장마철에 잠깐이나마 화창한 날씨다.
100여명 스님들이 삭발을 끝내고 산행도 가고 한담도 나누며 저마다 수행일기를 챙긴다.
고독을 제대로 체험했다면 우담바라의 위대함을 보았을 것이건만 지극히 혼자인적이 별로 없었던 탓에 고독의 심연에 들어가지 못했었구나.
참선하는 스님들의 얼굴모습은 일반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세상의 욕락에 대해서 나름대로 한 꺼풀 벗은 감이 있다.
비장한 모습, 나한상처럼 기이한 모습, 초연한 모습, 정갈한 모습, 소탈한 모습, 늙수그레한 모습, 만고풍상을 격은 듯한 모습, 처절히 지친 모습, 넉넉한 모습, 소담하지만 결의에 찬 모습, 저마다 업(業)과 수행의 길이 다르기에 각자 특색 있는 모습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렇게 준열하게 살다가 바람처럼 구름처럼 모두 사라지겠지.
각자 개성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저 모습이야말로 바로 화엄(華嚴)이리라.
거기에 무슨 가식이 붙을 것이며, 위선이 있겠는가? 권위나 의례의식을 중요시하는 유교문화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주위사람들의 신망, 비난, 칭찬, 험담 등 이러한 것에 무척이나 가치를 두고 신경을 쓰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솔직한 감정토로나 의사표현이 지극히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주위환경에 맞추려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었다.
객관적인 안목으로는 모범생일지 모르나 한 꺼풀만 벗겨내면 왕 내숭이거나 위선덩어리의 자신과 마주치게 된다.
이렇듯 자신의 삶이 아닌 주위환경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구체적인 방향성이 모호해지고 목적내지 목표의식이 애매해 질 수밖에 없다.
목표가 불명확하니까 방황하고, 판단이 흐려지며, 반듯한 일처리가 안 되니까 괴로워한다.
대저 주위환경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삶의 함정이 이런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사람들일수록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려거나 윗사람에 대한 권위를 무시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게는 철저히 권위로 다가선다.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에게서 배척받기 쉽고 한편 배척당하고 소외된다는 것에 대하여 괴로워하고 심하면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 날수가 없게 된다.
자기의 알량한 지식이나 경험의 잣대로 단체의 질서나 어른에 대한 권위나 공경심을 팽개치므로써 그나마 조그마한 명분이나 정당성마저 저버리고 만다.
단체의 질서를 존중하고 윗사람에 대한 도리를 다했을 때 행동거지가 당당해 질 수 있고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자신을 물처럼 철저히 낮추고 타인의 권위을 십분 존중해 줄때 굳이 원하지 않아도 대중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고 호감을 주는 이치다.
자칫 전체적인 틀을 보지 못하고 작은 선(善)에 집착하다보면 자신의 삶도 고달프고 주위사람들도 피곤하게 하고 만다.
바다가 지극히 낮으니 백천(百千)강물을 수용할 수 있고, 남을 공경할 때 어떠한 수모도 감내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생긴다고 청량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수 만년 캄캄하던 동굴도 불이 켜지면 금방 밝아지듯, 아만(我慢)의 틀을 깨고 하심(下心)할 때 운명처럼 느껴지던 소외의 공포심이나 인정받으려고 안달하는 소인(小人)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마가 지나가면 7월의 불볕더위는 기승을 부리겠지만, 내 마음은 한결 청량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