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원을 크게 세워야 하는가
-지운스님-
원을 크게 세우면 큰 원으로 인해 작은 번뇌와 업이 소멸됩니다.
그래서 병이 낫기도 합니다.
원을 세운다는 것은 보리심을 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은 반조의 의미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뇌세포는 마음따라 움직이니 서원을 따라 온몸의 세포가 나란히 섭니다.
원은 내 성격을 인도합니다.
이와같이 발원한다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의미가 됩니다.
대원으로 인해 사소한 일에는 동요가 되지 않으며 마음이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니 꼭 큰 원을 세우고 기도하십시오.
무념무상이란 생각이 없다는 멍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념과 망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생각은 다 나쁘고 망념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으면 무념입니다.
깨달은 사람도 좋고, 싫고, 더럽고, 깨끗하고, 예쁘고, 밉고 등 표면적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자취(흔적)는 남지 않습니다.
대상에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상에 마음이 동요되고 머물면 착각을 일으킵니다.
생각은 하되 대상에 머물러 자신의 의견이나 상상을 덧붙이면 망념 망상이 됩니다.
깨달은 사람은 어떤 느낌도 없는줄 아는데 그건 죽은 마음입니다.
그 죽은 마음으로 어떻게 중생구제를 합니까.
기도가 잘 되었으면 분별심이 없어야 합니다.
즉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지는게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과 내가 같은 불성이라는 것)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어 법을 설합니다.
내 마음을 동요케(일어나게) 하는 것은 모두 경계입니다.
수행중 무얼 느끼려는 의도를 버려야 수행이 잘 됩니다.
보려고 하고 느끼려 하고 깨달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 기다리는 마음이 번뇌가 되어 깨닫지 못합니다.
상념은 버리려 하면 더욱 성하게 일어납니다.
모든 생각은 관찰대상입니다.
불보살에 의지하며 사는 것은 신앙이고 내안에 있는 부처의 성품에 의지하는 것은 신심입니다.
신앙심이 강하면 수행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형상에 취하는 사람은 사이비에 빠지기 쉽습니다.
(부처님 모습만 봐도 좋다며 형상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 신심이 있으면 신앙은 자연히 생깁니다.
기도만 하는 사람은 불법을 모를 수 있습니다.
법을 먼저 듣고 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학습을 하다보면 지혜가 밝아져서 신심이 생깁니다.
불교신심은 체험을 동반합니다.
믿기만 하고 앎이 없으면 광신자가 됩니다.
앎이 있으면서 믿음이 없으면 탁상공론이 됩니다.
기독교는 믿음에서 시작되어 믿음으로 끝납니다.
앎은 있지만 수행이 없어 증명되기 힘듭니다.
기독교는 세월따라 변질되었지만 불법은 세월이 흘러도 똑같습니다.
신의 사랑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게끔 해주어야 진짜 사랑입니다.
종속 관계로 묶어두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은 중생도 똑같이 부처되게 하는 것이 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장 좋아하는 공양은 ‘저도 깨달아 부처되겠습니다’ 하고 발원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절대로 깨달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 깨달음 자체가 무아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지혜가 곧 법신입니다.
그래서 법신은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모든 종교중 가장 수승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종교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 , 불법은 모든 상을 떠났기 때문이며 최고는 굳이 최고라고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종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갇혀있는 사람입니다.
스승은 복덕과 지혜를 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복을 짓는 사람은 연민심을 갖고 있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고 복만 짓는 것을 치복(어리석은 복)이라 합니다.
연민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가장 좋습니다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것도 중생을 제도하려는 연민심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80종호 32상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보리심을 냈기 때문에 갖춘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항상 중생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깨달은 사람도 습업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감정적인 뿌리는 잘 해결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선지식을 대할 때는 그의 과거지사를 물을 필요도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그가 설하는 법만 보면 됩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복덕이 많아야 합니다.
복덕이 적으면 하는 일마다 걸림이 많습니다.
영험은 정성을 드리는 그 마음에 있지 도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이란 재미없는 것을 재미로 삼는 일입니다.
자비롭고 부드럽게 사람을 대하는 사람은 지혜가 개발된 사람입니다.
곧 모든 존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직 중생제도의 방편으로만 화를 냅니다.
그러나 화가 마음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멀리서 볼 때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은 계행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멀리서 볼 때 뜀박질을 해도 고요한 기운이 넘치는 사람은 선정을 닦은 사람입니다.
법 없이 살수 있을 만큼 착해도 어리석으면 착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착함에는 지혜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인상하나 찌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선법을 닦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했을 때는 반드시 회향을 해야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공덕을 불보살에게, 위없는 가르침에, 일체중생에게 회향해야 합니다.
회향이란 내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공덕이 생기므로 남에게 돌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