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세계종교인구를 검색하여 보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구구각색이다. 물론 조사 기관에 따라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통계자료를 인용하였는지 차이가 나도 너무 심하다. 게다가 주로 기독교 관련 단체에서 발표한 자료가 많아서인지 아전인수 격으로 그들의 종교 인구를 부풀려 놓은 게 눈에 보인다.
유럽의 경우 교회나 성당이 텅텅 비어있는 곳이 많은데도 인구 전체를 기독교 인구로 잡는다든지, 우리나라도 자기들끼리 싸울 때는 ‘이단’이라고 열을 올리면서도 통계에는 모두 너그럽게 기독교에 포함시키고 있다. 세계종교지도에서도 차츰 변하고는 있지만 중국의 경우엔 전통 민속종교로 표시하다가 요즈음엔 대승불교로 표시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군이 주둔하여 ‘미국에 의한 질서(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에 편입되어 있다. 그러기에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미국 쏠림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미국에 유학을 하고 미국 정관계에 인맥을 가져야 출세할 수 있고, 그들의 기업과 손을 잡아야 기업을 키울 수 있다.
학문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야 국내 대학 교수 신규임용에 서류라도 내어볼 수 있다. 미국 편향적 학문의 폐해를 이야기하면서도 쉬 고쳐지기 어려울 게다. 이러한 미국문화의 근저에 ‘기독교’가 있다. 대세가 이러니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출세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바야흐로 세계는 변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국제사회의 역학구도는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위상이 약화(?)됨과 맞물려 중국의 부상이 눈에 띤다. 중국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여 여러 측면에서 거부반응을 보이는 데 그 중 하나가 기독교에 대한 태도다.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 같으면 서도 눈에 보이지 않게 제동을 거는 것으로 들었다.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이 명약관화하니 기독교문화의 미국과 불교문화의 중국의 대결구도가 심상찮다.
중국인들에게 불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제 지구상의 G2 국가로서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그들의 ‘정체성’을 ‘불교’에서 찾으려는 것 같다. 본래 ‘유교’와 ‘도교’가 중국에서 발생하였지만 민속종교적인 색채가 짙을 뿐 아니라 보수적이고 퇴영적, 복고적인 경향이 있기에 민족과 국가를 넘어 세계화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반면에 불교는 보편주의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특정의 민족이나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포교와 전도에도 무리가 없다고 본 것이다. 특히 미국과의 대결구도에서 중국이 불교를 옹호하는 것은 기독교문명을 앞세운 ‘기독교 패권주의’의 미국에 맞서기 위한 전략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 삼국시대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래 불교가 국교로까지 융성했던 것은 당시에는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의한 세계질서(중국의 힘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시니카(Pax Cinica)’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미래학자들이 다시 ‘팍스시니카’를 강조하는 것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이와 때 맞춰 온라인상에서도 중국 불교의 약진이 눈에 띤다. 특히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불교음악은 거의 중국에서 온 것이라 한다.
중국정부가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이유는 비단 미국과의 대결구도 만은 아니고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과도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그 첫째는 불교가 ‘평등의 종교’라는 점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승단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해 어떤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고, 출생보다는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신분이 결정된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중국정부로서는 이보다 더 나은 이념의 논리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불교는 ‘계승의 종교’라는 점이다. 과거 문화유산의 계승이 국민통합을 위한 정체성으로 본 것이다. 중국은 곳곳에 과거 찬란했던 불교문화의 유적을 갖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자산이 될 것이다.
아울러 불교는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하여 개혁이나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은 곳곳의 불교문화유적을 다시 챙기고, 사찰을 중수하며 거액을 투자하여 불교행사를 치르면서 분위기 조성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정부의 불교 정책에도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티베트와 티베트불교, 달라이라마 14세일 것이다. 앞으로 중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지켜볼 일이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3월 1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