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통해서는 진리를 추구하고, 종교는 지고(至高)의 선(善)을 통해 성(聖)의 경지를 목표로 하며,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이름다움〔美〕을 추구하여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 준다. 문학의 장르에 따라서는 전문적인 글꾼이 쓴 작품이 아닌데도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글들이 종종 있다. 대개는 그들이 하는 일이 보통사람들과 좀 다르다. 의사로서 삶과 죽음의 경지를 넘나드는 상황을 자주 목도한 사람이거나, 승려나 수녀 등 교역자로서 범인들과 다른 삶의 공간에서 수행하는 경우 등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기록한 게 세인들의 시선을 끈다.
법정(法頂) 스님의 <무소유(無所有)>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난(蘭) 화분 하나 때문에 얽매어 고민하다 결국 버리고 나서 ‘무소유’의 참뜻을 깨달아 집착을 버리고 본연의 일상으로 돌아가신 체험담을 소박한 필체로 쓰신 글이다. 또 하나, 며칠 전 조계종의 포교지 <직장불교>에서 포교원장 혜총 스님의 글에서 읽은 내용이다. 꽃을 키우는 사람은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 없다는 ‘운허’스님의 말씀을 듣고는 90개에 달하는 분재를 키웠는데, 어느 날 자운 스님을 모시고 출타 후 돌아와 보니 꽃이 모두 말라죽었더라고 한다. 그때까지 아무 말씀도 않으셨던 스님께서 ‘네가 꽃을 사랑하느냐?’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하시면서 자기 입장에서 뿐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라는 꾸중을 들으셨다고 했다. 법정 스님의 ‘난’도, 혜총 스님의 ‘분재’도 자기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리라.
‘배려’는 ‘마음을 쓰고 걱정해준다’는 뜻이다. 순전히 상대를 위한 것이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배려는 받기 전에 주는 것이며 사소하지만 위대한 것이라고 했다. 연 전에 읽은 책 <배려>(한상복 지음)에서 인용한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가고 있었단다. 그와 마주친 사람이 ‘당신은 정말 어리석군요.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닙니까?’했더니 그 맹인이 말하기를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게 배려의 참 모습이리라.
인류의 영원한 보금자리인 지구촌엔 바람 잘 날 없이 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지구촌의 화약고 중동을 비롯하여 미얀마, 태국, 티벳, 아프리카 등 곳곳에서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담보로 한 투쟁이 멈출 줄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싸움도 종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명과 영혼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종교가 분쟁의 중심에 서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종교가 남을 배려하지 못한다면 어디서 배려의 참 뜻을 찾을 것인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된다. 나와 남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상대의 민족을, 상대방의 종교를, 상대국의 역사를, 남의 가정을, 상대의 기업을, 나와 마주하는 사람의 처지를, 내가 대하는 사물의 입장이 되어 잠깐이라도 생각해보자.
아파트 베란다에서 십여 년 동안 기르던 키 50센티 정도의 은행나무 분재를 5년 전쯤 제멋대로 살아가라고 텃밭으로 옮겨 주었다. 올 봄에 가서 쳐다보니 족히 4미터는 넘어 보였다. 그간 내가 너에게 죄를 많이 지었구나. 용서해 다오. 자유자재로 제 멋대로 클 수 있는 나무를 내 기분대로 가위로 자르고 철사로 동여매고, 겨우 죽지 않고 살 정도로 거름이나 물을 주면서 연명시켜놓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좋아라 했던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그래 지금부터라도 너의 입장에서 보아 줄 테니 마음껏 자라거라.
응당 매임과 머무름 없는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하건만, 어떻게 부주색성향미촉법생심(不住色聲香味觸法生心)하여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 而生其心)’할 수 있을까.
김형춘 香岩 (반야거사회회장·창원전문대교수)글. 월간반야 2008년 5월 제9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