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집의 이름을 지으며

인간의 알고자 하는 욕구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 전에 먼저 그 사물에다 이름부터 붙여놓고 본다. 먼 우주공간의 별에서부터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물들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범인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사유의 세계에서 직관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이름을 붙여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보다. 말로서 표현이 되어야만 생각이 구체화되고 이름으로써 정리되어야만 생각이 일정한 꼴을 갖추고 이해가 되니까 명명(命名)부터 하는 것이리라.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여 생물(生物)과 무생물(無生物)로, 다시 살아있는 것은 식물(植物)과 동물(動物)로 나누는 등 때로는 한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구분하여 이름을 붙이는 작업만 해 온 스웨덴의 ‘린네(Carolus Linnaeus)’와 같은 학자도 있지 않은가.

가끔 주위의 문인들이나 서화가들의 작업실이나 자택을 방문할 때면 대문간이나 마루 위 등에 걸린 편액(扁額)에 집의 이름을 붙여놓은 것을 볼 때나, 저서의 서문 말미에 서재(書齋)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우리집에 이름을 붙여볼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 어머니의 49재(齋)에 맞춰 졸저를 내면서 서문의 말미에 “무학산 기슭 향림헌(香林軒) 어머님 방에서” 라고 써버렸다. 일단 저질러놓고 본 것이다. ‘향림(香林)’은 40여 년 전 어머니께서 고향의 자그만 암자(庵子)에 다니실 적에 얻은 불명(佛名)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 내외가 지안 스님을 뫼시고 반야암(般若庵)에 다니면서 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法名)이 ‘향암(香岩)’과 ‘보림화(寶林華)’이다.

나의 법명 앞글자인 ‘향(香)’과 아내의 법명 두 번째 글자인 ‘림(林)’자를 따 온 것과 어머님의 불명이신 ‘향림(香林)’이 일치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스님께서는 어머님의 불명을 어떻게 아시고 우리 내외에게 한자씩 나누어 작명을 하셨을까. 내외는 쾌재를 부르며 “향림(香林)”까지는 쉽게 합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뒤에 큰스님의 추인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러나 고민은 마지막 글자, ‘집’에 해당하는 글자를 고르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은 “향림헌(香林軒)”으로 서문은 탈고를 하고 계속 고민해 보기로 했다.

앞의 두 글자를 한자(漢字)로 하였으니 ‘집’에 해당하는 한자의 글자를 찾아보았다. ‘집 家(가), 집 齋(재), 집 宇(우), 집 院(원), 집 舍(사), 집 軒(헌), 정자 亭(정), 곳집 府(부), 집 閣(각), 집 屋(옥), 집 堂(당), 집 殿(전), 집 宮(궁), 집 戶(호), 집 臺(대), 집 宅(택), 객사 舘(관)’ 등 부지기수였다. 이들 중에서 앞의 두 글자와 소리와 의미를 따져보아 잘 어울리는 ‘堂(당)’과 ‘軒(헌)’을 두고 고민하다 ‘軒(헌)’으로 정하였다.

10여 년 전 이 지역에서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는 후배로부터 연구실 분위기에 걸맞게 세로로 세우는 액자 한 쌍을 선물 받았는데 미관상으론 어울리지만 내용이 과분하여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볼 적마다 늘 고민을 해 왔다. 하나는 “長生不老神仙府(장생불로 신선부)”요, 다른 하나는 “與天同壽道人家(여천동수 도인가)”로 대를 이루는 것이었다.

‘오래오래 살면서도 늙지 않는 신선의 마을에, 하늘과 더불어 수를 누리는 도인의 집’이라는 뜻인 것 같다. 어디 나에게 비할 바이겠는가 마는 미루어 생각하건대 꾸준히 나를 갈고 닦아 이에 버금하는 수준의 인간이라도 되길 바라는 후배의 간절한 바람이라고 감히 해석하면서 감사할 따름이다.

‘향림헌(香林軒)’, 지금껏 이순의 나이에도 남들에게 좋은 냄새는커녕 인간미도 제대로 풍겨보지 못했는데 이제부터라도 향내 나는 풀숲이 되어 세파에 찌든 이웃들의 얼굴이 조금이라도 펴지게 노력하자는 다짐의 뜻이리라. 임진壬辰 새해를 맞으면서 이 자그만 소망을 품고 두 손을 모은다.

김형춘 창원문성대학 교수, 문학박사, 월간 반야 2012년 1월 1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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