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모음

감격하세요

나무들을 열어놓는 새소리
풀잎들을 물들이는
새소리의 푸른 그림자
내 머릿속 유리창을 닦는
심장의 창문을 열어놓는
새소리의 저 푸른 통로

풀이여 푸른 빛이여
감격해본 지 얼마나 됐는지.

나는 별아저씨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촌
나는 별아저씨.

나는 바람남편
바람아 나를 서방이라고 불러다오
너와 나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아
나는 바람남편이지.

나는 그리고 침묵의 아들
어머니이신 침묵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dome) 아래서
나는 예배한다
우리의 生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이 천하 못된 사랑을 보아라
나는 별아저씨
바람남편이지.

냉정하신 하느님께

지난 해는
참 많이도 줄어들고
많이도 잠들었습니다 하느님
심장은 줄어들고
머리는 잠들고
더 낮을 수 없는 난장이 되어
소리 없이 말 없이
행복도 줄었습니다

그러나 저 납작한 벌판의 찬 흙 속에
한 마디 말을 묻게 해 주세요
뜬구름도 흐르게 하는 푸른 하늘다운
희망 한 가락은
얼어붙지 않게 해 주세요
겨울은 추울수록 화려하고
길은 멀어서 갈 만하니까요
당신도 아시지요만, 하느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 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자기기만

자기기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기기만은 얼마나 착한가
자기기만은 얼마나 참된가
자기기만은 얼마나 영원한가
참으로 아름답고
착하고
영원한
자기기만이여
불가피한 인생이여.

신바람

내가 잘 댕기는 골목길에
분식집이 새로 생겼다
저녁 어스름
그 집 아줌마가 형광등 불빛 아래
재게 움직이는 게 창으로 보인다
환하게 환하게 보인다
오, 새로 시작한 일의 저 신바람이여
옆집 담 안에 마악 벙그는 목련들도
신바람의 그 아줌마를 하늘로 하늘로
다만 받쳐올리고 있구나, 다만!

잔악한 숨결

너무 맑은 바람은 갈증
너무 밝은 햇빛은 그리움
너무 투명한 것들의 玉石의 狂氣

이 맑은 공기의 한숨
밝은 햇빛의 고독
모든 투명한 것들의 잔악한 숨결!

잡념

잡념 레퍼터리, 천당을 가까이
잡념 레퍼터리, 지옥을 가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나도 모르게
잡념인가 봐

그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고
저절고 꺼지고
출입이 自在하니

그다지 스스로 있는 걸 어찌
좋다 하지 않으리요,
잡념의 볼기짝이여
잡념의 귀싸대기여

종이 꽃 피도다

하느님

꽃에는 비
풀잎에는 바람
우리한테는 너무한 희망
내려 주시도다

하느님

한 시대는 한 폐허요
群王들 열심히 준비하는
무덤에 항상 뿌리 내리는
유장한 들꽃들 보이오나

하느님

가차없이 길들어
지각없이 말없이
올봄도 산에 들에
종이꽃 피도다.

자기를 통해서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 자기는 거기 不在에 가깝다. 부재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을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이 넓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하늘과, 그 품에서 잘 노는 천체들과, 공중에 뿌리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보나파르트들과…… 눈들이 자기를 통해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 외로워하는 이건 한없이 투명하고 넓다. 聖者를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싹이 나오고
꽃이 피었어요
나는 부풀고 부풀다가 그냥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뛰어내렸어요
태양에서
(생명의 기쁨이요?)
달에 바람을 넣어 띄우고
땅에도 바람을 넣어 그
탄력 위에서 벙글거렸지요

인제 할 일은 하나
아주 꽃 속으로 뛰어드는 일,
그야
거기 들어 있는 태양들을
내던지겠습니다
향기롭게, 붉게, 푸르게

비 맞고 서 있는 나무들처럼
어디
안길 수 있을까.
비는 어디 있고
나무는 어디 있을까.
그들이 만드는 품은 또
어디 있을까.

흙냄새

흙냄새 맡으면
세상에 외롭지 않다

뒷산에 올라가 삭정이로 흙을 파헤치고 거기 코를 박는다. 아아, 이 흙냄새! 이 깊은
향기는 어디 가서 닿는가. 머나 멀다. 생명이다. 그 원천. 크나큰 품. 깊은 숨.
생명이 다아 여기 모인다. 이 향기 속에 붐빈다. 감자처럼 주렁주렁 딸려 올라온다.

흙냄새여
생명의 한통속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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