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윤 시모음

가끔은

가끔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대 속에 빠져
그대를 잃어버렸을 때
나는 그대를 찾기에 지쳐 있다.
하나는 이미 둘을 포함하고
둘이 되면 비로소
열림과 닫힘이 생긴다.
내가 그대 속에서 움직이면
서로를 느낄 수는 있어도
그대가 어디에서 나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해 허둥댄다.
이제 나는 그대를 벗어나
저만큼 서서 보고 있다.
가끔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좋다.

겨울의 노래
겨울입니다.
내 의식의 차가운 겨울
언제라도 따스한 바람은
비켜 지나가고
얼음은 자꾸만 두터운 옷을 껴입고,
한번 지나간 별빛은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지는 곳은
너무 깊은 계곡입니다.
바람이 긴 머리를 날리며
손을 흔듭니다.
다시는 시작할 수 없는
남루한 의식의 겨울입니다.
이제 웅크린 기침만
나의 주위에 남았습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이
아직도 계속입니다.

겨울 해변가에서

소리치고 있다.
바다는 그 겨울의 바람으로
소리지르고 있었다.
부서진 찻집의 흩어진 음악만큼
바람으로 불리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했다.
아니, 물보라로 날리길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겨울의 바다
오히려 나의 기억 한장을 지우고 있다
파도처럼 소리지르며 떠나고 있다.

내가 바닷물로 일렁이면
물거품이 생명으로 일어나
나를 가두어두던 나의 창살에서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 바닷가에서 나의 모든 소리는
바위처럼 딱딱하게 얼어 버렸다
옆의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그 겨울의 바람이
나의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 놓았다.

소리쳐 달리는 하얀 물살 꽃엔
갈매기도 몸을 피하고
바위조차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무너진 그 겨울의 기억을 아파하며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내 속의 시간
오히려 파도가 되어 소리치는데
바다엔 낯선 얼굴만 떠오르고 있다.

그대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으로
소유하려는 것조차
나의 욕심이라고 깨닫고
시인하며
가슴을 털며 돌아서면
사랑은 조건이 없는, 아니
진정한 사랑의 조건은
진실
그 하나만으로 족한 것
가면의 사랑으로 우리는
자기마저 속이려는 숱한
가여운 영원을 본다
사랑 없는 삶은
죽음보다 무의미한 것이기에
우선은
내 마음의 진실을 찾아
아픈 추억들 뒤지고 있다.

그대 뒷 모습

그대 아직도 기다리고 있나
그 허무한 기대
나무는 언제나 흔들리고
또한 그만큼 굳건해 지지만
그리워 눈감고 바라보는 눈길은
내가 다가갈 수 없는 먼 하늘 저편

다시 날개가 자라기를 바라지만
내 가슴의 바람은
불꽃 속에 넘실대는 그대 뒷모습
늘상 바위에 깨어지는 몸으로
더욱 더 흔들리는 그림자

나의 생명은 이제
그대로부터 시작된다.
잛은 삶을 그린 수채화
그 안에 마르지 않은
뒷모습 허전한 사람이 찍은
발자국이 번지고 있다.

기도의 편지

하느님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고
나는 나의 일을 합니다.
하늘 가득 먹구름으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건 당신의 일이지만
그 빗방울에 젖는 어린 화분을
처마 밑으로 옮기는 것은 나의 일,
하늘에 그려지는 천둥과 번개로
당신은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만
그 아래 떨고 있는 어린 아이를
안고 보듬으며 나는
아빠가 있다는 것으로
달랩니다.
당신의 일은 모두가 옳습니다만
우선 눈에 보이는
인간적인 쓸쓸함으로 외로와하는
아직 어린 영혼을 위해
나는 쓰여지고 싶어요.
어쩌면, 나는 우표처럼 살고 싶어요
꼭 필요한 눈빛을 위해
누군가의 마음 위에 붙지만
도착하면 쓸모 다하고 버려지는 우표처럼
나도 누군가의 영혼을
당신께로 보내는 작은 표시가
되고 싶음은
아직도 욕심이 많음인가요.

그대를 사랑하는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빛나는 눈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건
그대의 따스한 가슴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지와 잎, 뿌리까지 모아서
살아있는 나무라는 말이 생깁니다.
그대 뒤에 서 있는 우울한 그림자,쓸쓸한
고통까지 모두 보았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전부로 와 닿았습니다.
나는 그대의 아름다움만을 사랑하진 않습니다.
그대가 완벽하게 베풀기만 했다면
나는 그대를 좋은 친구로 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대는 나에게
즐겨 할 수 있는 부분을 남겨 두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무엇이 될 수 있겠기에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노을 스러지는 그 뒤로

산 뒤로 노을이
아직 해가 남았다고 말할 때
나무들은 점점 검은 눈으로 살아나고
허무한 바람소리 백야처럼
능선만 선명하게
하늘과 다른, 땅을 표시한다.

고통 속에서만 꽃은 피어난다.
사랑 또한 고통으로 해방될 수 있음을
무수히 자신을 찢으며 깨달아가는 것이다.
노을 쓰러지는 그 뒤로
바람마저 저지나가 버리는 내 마음의 간이역에는
아직도 기다리는 엽서 사연들이
오래된 낙엽으로 밟히고
먼저 잠든 자의 표정에서
내 슬픈 방황 먼 흐름의 물길을 찾는다.

창에 비치는 풍경이 눈앞에서 맴돌고
긴 흔들림에 영혼이 지쳐
내 속의 장미 시들어 가시만 남는다.
귀가를 서두르며 나는
스러지는 노을, 그 뒤로 따라가고 있다


눈물

아직도 가슴에 거짓을
숨기고 있습니다.
늘상 진실을 생각하는 척하며
바로 사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나만은 그 거짓을 알고 있습니다.

나조차 싫어지는 나의 얼굴
아니 어쩌면
싫어하는 척하며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내 속에 잇는 인간적,
인간적이라는 말로써
인간적이지 못한 것까지 용납하려는
알량한 <나>가 보입니다.

자신도 속이지 못하고
얼굴 붉히며 들키는 바보가
꽃을, 나무를,
하늘을 속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나를 보며 웃습니다.
비웃음이 아닌 그냥 웃음이기에
더욱 아픕니다.

언제쯤이면 나도
가슴 다 보여 주며 웃을 수 있을지요

눈물 나는 것이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랑한다는 말은
눈물을 아시나요

눈물을 아시나요
차가운 눈빛으로
사치스런 외로움으로
애써 외면하려 했던 리듬들이
나를 흔들고 있어요
기와지붕 미끄러진 바람이
생의 남은 조각들을
머리 속에 어질러 놓으면
느껴지던 그 꽃잎의 붉은 빛 눈물,
입 안으로 웅얼거리며 따라하던
사슴 무리의 울음소리
찾아보려 고개를 돌려도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대여
눈물을 아시나요
얼룩이 다시 꽃으로 피는.

밀려 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노래 부르기밖에 없어라.

눈오는 날엔

눈 오는 날에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로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밟히고 있다.
날으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 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보리라만
누군가의 머리 속에 남는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한갓 인간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알게 되리라.

어디 다른 길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표정을 고집함은
그리 오래지 않을 나의 삶을
보다 <나>답게 살고 싶음이고
마지막에 한번쯤 돌아보고 싶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그 누구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나에게 <나>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것만큼
그도 나를 아쉬워할 것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으며 살아야 하고
분노하여야 할 곳에서는
눈물로 흥분하여야겠지만
나조차 용서할 수 없는 알량한
양면성이 더욱 비참해진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나>조차
허상일 수 있고
눈물로 녹아 없어질 수 있는
진실일 수 있다.

누구나 쓰고 있는 자신의 탈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 갈 즈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뿐이다.
하늘 가득 흩어지는 얼굴.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마지막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용기와
웃으며 이길 수 있는 가슴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눈오는 날엔.
헤어짐도 만남처럼 가상이라면
내 속의 그 누구라도 불러보고 싶다.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눈이 그치면,
눈이 그치면 만나보리라.

느낌

사랑한다는 건
스스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그 상처가 문드러져 목숨과 바꿀지라도
우리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는 건
가슴 무너지는 소리 듣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이미 막아버린 자신의 성 허물어지고
진실의 눈물로 말하며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대 내부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나의 고집, 즐겨 고개 숙이는 것을
익히는 사랑으로 인해
자신이 하염없이 작아질지라도
즐거울 수 있음으로, 우리는 이미
사랑을 느끼고 있다

두려움

잔 가지를 자르고 있다
어린 나무를 키우며, 농부는
세상의 어려움을 견디게 하기 위해
우선의 아픔을 참게 하려는 것일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그대에게 빠져
아름답고 좋은 향기만 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사라졌을 때
내 속의 나무는 두려움에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그대의 미운 표정을 찾는다
그 미운 손가락마저 용납되어지면
화려한 눈빛 속으로 들어간다

잘려진 나뭇가지가 찬 바람에
파르를 떨고 있다. 그래도
모질게 놀리는 농부의 손



비가오는 날이면
거리로 나선다.
젖어 질척거리는 길에서
누군가의 모습을 밟으며
눈물젖은 가로수
등뒤에 선 그림자가 있다.
맺힌 가슴의 빗방울은
어디로 흐르나.
자신의 삶을 나눌 수없는 아픔
언제나 홀로일 수 밖에 없음
더러는 시원한 비에 젖는다.
다들 앞서가는 길에 서서
그들만큼 달리지 못하는 변명
빗방울들은 늘 어디론가 흐르는데
정지해 버린듯한 내 손목의 소리
비가 오는 날이면
거리에서 비를 맞는 나무가 되어
…………

사랑을 그리는 마음으로

푸른 소나무에 혼을 심는다
햇살 따스한 눈밭 위에
집을 지으면
반짝이는 눈빛에 바람이
등밀려 가고 있다

아직도 자라는 키 작은 낭만
사실주의 노래들이 휘감는 화폭에
짚단더미 뒤
숨겨둔 여인 훔쳐보며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서 있다

사랑을 그리는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
붓끝이 머무는 터벅머리 들판에
그림자 등지고 돌아서는 나무
손잡으며 눈밭 위를 걷는다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은
기다린다는 말인 줄 알았다.
가장 절망적일때 떠오른 얼굴
그 기다림으로 하여
살아갈 용기를 얻었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줄 알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마음은 늘 그대 곁에 있는데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살았다.

그대도 세월을 살아가는 한 방황자인걸
내 슬픔 속에서 알았다.
스스로 와 부딪치는 삶의 무게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한 줄도 모른 채
나는 그대를 무지개로 그려두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떠나갈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생명이 계속되는 동안

구름은 어떤 슬픈 꿈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우울한 얼굴로
나의 아픔을 새롭게 하는가
새들의 울음이 목메이는 저녁
지나가는 모두가
아무 의미없이 그리울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자꾸 나를 부른다.
온 몸을 떨며 손을 흔드는 들꽃
그 옆에 나비가 그려지고
생명이 계속되는 동안
살아 있어야 한다, 사랑으로.

아직도 따스한 눈으로
들꽃을 본다.
아무것도 아닌 채
사라질 수 있는 그들이 부럽고
나 또한 그런 목숨으로
내 삶의 마지막 책장을 덮어야지
생명이 계속되는 동안
살아 있어야 한다, 들꽃처럼.

소망의 시1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
햇살같이 가벼운 몸으로
맑은 하늘을 거닐며
바람처럼 살고 싶다. 언제 어디서나
흔적없이 사라질 수 있는
바람의 뒷보습이고 싶다.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그리고 살고 싶다
길 위에 떠 있는 하늘, 어디엔가
그리운 얼굴이 숨어있다.
깃털처럼 가볍게 만나는
신의 모습이
인간의 소리들로 지쳐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앞세우고
알타이 산맥을 넘어
약속의 땅에 동굴을 파던 때부터
끈질기게 이어져 오던 사랑의 땅
눈물의 땅에서, 이제는
바다처럼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고 싶다.
맑은 눈으로 이 땅을 지켜야지

소망의 시2

스쳐 지나는 단 한 순간도
나의 것이 아니고
내 만나는 어떤 사람도
나는 알지 못한다.

나뭇잎이 흔들릴 때라야
바람이 분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햇빛조차
나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살아 있음이
어떤 죽음의 일부이듯이
죽음 또한 살아 있음의 연속인가,
어디서 시작된지도
어떻게 끝날지도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생명을 끈질기게,
지켜보아 왔다.

누군가,
우리 영혼을 거두어 갈 때
구름 낮은 데 버려질지라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져도 안타깝지 않은
오늘의 하늘, 나는
이 하늘을 사랑하며 살아야지.

소망의 시3

가끔은 슬픈 얼굴이라도
좋다, 맑은 하늘 아래라면.
어쩌다가 눈물이 굴러 떨어질지라도
가슴의 따스함만으로도
전해질 수 있다, 진실은

늘 웃음을 보이며
웃음보다 더 큰 슬픔이
내 속에 자랄지라도
<웃음>만을 보이며 그대를 대하자.

하늘도 나의 것이 아니고
강물조차 저 혼자 흘러가고 있지만
나는 나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내 삶의 전부를
한 개 점으로 나타내야지

지나가는 바람에도 손잡을 수 있는
영혼의 진실을 지니고
이제는 그대를 맞을
준비를 하자.

시를 생각하며

꽃잎 떨어지는
시간 속에 귀 열어 세웠다

출발을 위한 시를 생각하다 돌아온 저녁 쉽게 타협하지 못해 떠돌던,
잠들지 못하던 긴 방황의 날들, 산기슭으로 오르던 시간도 ‘우우’ 구두 속으로
밀려들어 떨어지는 꽃잎 몇 개와 땀내의 아궁이에서 지펴진다

무채색으로 그려보던 미래
구름으로 흐르다 내가 세워 둔 꽃밭의
구두에 이르러 붉게 물든다

밤새 새를 그리다 잠든 아이의
설레고 두려웠던 완성의 순간
내일이면 꽃잎은 구두에 축축이 들어찬다

늦출 수 없었던 긴장 느슨하게 끈을 풀어 바람에 널었다 자라나는
발톱 놓였던 자리에 떨어진 꽃잎, 빨강 물감으로 그려지고 나는 출발의 아침 시를 생각하며

아침의 기도

빛 속을 걸었다 영혼의 울림만 종소리처럼 번져 나갈 그 날을 맞으면
시간의 축은 사라지리라 그래, 이제 더욱 가까워졌어.
약속의 그날을 기다리면서도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었지.
자꾸만 나타나는 징후들이 두려워지는 나는 그들과 함께 흙이 되어 누워있을 나 자신을 본다

자신을 태운 불길로
주변의 생명을 밝히는 나무
새들의 순수와 사랑의 손길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어.

신이여 나는 두렵습니다. 나무에서 막 떨어진 낙엽처럼 길거리를 뒹굴며
어디에선가 한줌 부식토가 되어 풀뿌리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신이여,
내 흩어지는 영혼을 잡아주소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기름의 등잔으로 그날을 맞이하는 초라함을 가려 주소서.
먼저 손 내밀지 못했던 자존심과 망설이던 주저함을 진작 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해 주소서

해 떠오르는 아침이
오늘 다르게 느껴지는 건
약속의 그날이 더욱 가까워졌기 때문이라고
다시 새로운 하늘이 열리어
기쁨과 슬픔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을
나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의미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의 의미를 지니리라

바람조차 내 삶의 큰 모습으로 와닿고
내가 아는
정원의 꽃은 언제나
눈물빛 하늘이지만,

어디에서든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잊혀질 수 있다
사랑으로 죽어간 목숨조차
용서할 수 있으리라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의 의미를 지니리라

수채화로 그린 절망

내가 묻기도 전에 해는 서산에 진다.
시간의 질문들이 줄지어 따라간다.
결국 그대는 흑백사진의 한 장면으로
기억의 한쪽 면을 차지할 것이다.

영혼을 학대하기 위해 육신을
팽개쳐 버린 모습으로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그대의 고통을 읽기에 앞서
가슴 아리는 절망으로 빠져들었다.
내 짊어져야 할 그 짐들을
그대에게만 맡겨두고, 나는
잘도 잠을 잤구나. 그대 지친 몸으로
잠 이루지 못해 뒤척일 때도
나는 어줍잖은 낱말이나 맞추며,
싸구려 추억에 잠겨 잔을 들었구나.
내 앞에서 말없이 흐르는 그 흔적들과
함께 추락하며
여기쯤에서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억겁 윤회로 인해 나 여기 서 있다면
앞 생의 어떤 인연의 끈으로 나는 그대에게
이만큼의 고통을 안겨 주었나.
시간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고
이미 예약된 다음 생을 느끼면서도
구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나를 본다

수채화로 그린절망2

이제 강가에는 아무도 없고
아직 그대의 절망은 끝나지 않아
나의 가장 아픈 곳에 남아 있다.

어쩌면 바람으로 흩어지고 싶어도
흙의 일을 흙으로 돌 리는 일과
하늘에 노을 그리는 일이 남았다는 핑계로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지친 그대를 힘들게 한다.

강가에 선 나무들은
철새의 약속을 믿지 않지만
흐르는 강물을 보며 기다린다.
기다릴 수밖에 다른 일은 없다고
어린 나무들을 돌아보며
타이르고 있다.

수채화로 그린 절망3

우리는 전생에 어떤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았나.
말로도 남의 가슴에 상처주지 않고
미소로 그들을 도우며
그들의 고통으로 밤을 새웠다면,

다른 누가 우리의 다정함에
시기하는 말을 하늘에다 했는가.
그로 인해 이 생을 받았다면
자랑하지 말아야 했어.
내 삶이 남과 다름을 말하지 말아야 했다.

이번 생에 이 고통 다 지나면
이젠 윤회의 테두리 벗어나
바람으로 흩어지고 싶다.
이 욕심 다시 씨앗이 된다면
다음 생엔 아주 조그만 절망으로
마무리 지으며 살고 싶다.

수채화로 그린 절망4

자신을 잊기 위해 애쓰던
차가운 바람의 날들
말 못하고 돌아서던 순간이 있었다.
가슴속 수많은 단어들이
서로 먼저 나오려고 부딪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초라하지 말라고
하늘의 푸른 절망이
먼저 손을 내민다.
내 가진 건 그대의 맑은 웃음,
고통스런 변명은
건너뛰는게 옳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히 말했다.
아니 충분히 비참했다.
이제는 시간이 낯설 게 느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내 절망의 끝이 보인다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은
기다린다는 말인 줄 알았다.
가장 절망적일 때 떠오른 얼굴
그 기다림으로 하여
살아갈 용기를 얻었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줄 알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마음은 늘 그대 곁에 있는데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살았다.
그대도 세월을 살아가는 한 방황자인걸
내 슬픔 속에서 알았다.
스스로 와 부딪치는 삶의 무게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한 줄도 모른 채
나는 그대를 무지개로 그려두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떠나갈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나로 인한 그대 고통들이 아프다.
더 이상 깨어질 아무것도 없을 때, 나는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

집착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몸부림은 거세지고
너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버둥거림으로
봄은 그렇게 지나갔다
마지막이라고 수없이 중얼거려 보아도
다음 장의 그림은
어김없이 노을로 펼쳐진다

인생의 황혼이 보인다고 하던
어느 선배 시인은 이미 노을 속으로 가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 공간에서
곡선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서로 엉켜
빛의 한쪽 편을 잡는다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복사꽃처럼

빛과 어둠으로 나누는 언어다
사랑이라는 말은
바람이 일어나는 저녁에서야
방풍림 속에 나를 세워둔다.
익숙해질 혼자 됨을 위하여
말하면 안될 것 같은 가슴이면
꽃씨를 심어야 하리
들꽃같이 서서
바람 뒤에서 흔들리며
눈물 숨기려고 웃는 나를
가슴 넓은 나무는 보고 있다

잠들기 전 낡은 구두를 정원에 세운다

가끔 절망하면 황홀하다

가끔 절망하면 황홀하다
나에게서 떠난 먼 여행,
나무들이 구름을 흔들고
햇살은 반갑지 않은 것들로
그물을 짠다

어둠의 먼저 묻어나는 세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
참새들은 끊임없이 허수아비를 만들고
배신은 어디에서나 이루어진다
반짝이는 눈의 여우가 아닌
본질의 나,
용서할 수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하늘은 밝음을 향해 선 자의 것이라고
분노하며
다시 허물어지는 그 어디,
체념을 배우며 지나는
설명되어지지 않는 황홀을 느낀다

절망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되어진
나의 아픔이라면
이 정도의 외로움쯤이야
하늘을 보면서도 지울 수 있다.
또 얼마나 지난 후에
이보다 더한 고통이 온대도
나에게 나의 황혼을 가질 고독이 있다면
투명한 겨울단풍으로 자신을
지워갈 수만 있다면
내, 알지 못할 변화의 순간들을
부러워 않을 수 있다.

밤하늘 윤동주의 별을 보며
그의 바람을 맞으며, 나는
오늘의 이 아픔을
그의 탓으로 돌려 버렸다.
헤어짐도 만남처럼 반가운 것이라면
한갓, 인간의 우울쯤이야
흔적없이 지워질 수 있으리라

하루하루가 아픈 오늘의 하늘,
어쩌면
하염없이 울어 버릴 수도 있으련만
무엇에 걸고 살아야 할지
아픔은 아픔으로 끝나주질 않는다.

화석

별빛 차가운 얼굴을 하고
내 의식의 낡은 창에
나보다 가난한 의미를 심는다.
가로등을 켜듯, 확실한 생이 아님을
빈 손 마디마디 시리게 깨달으며
다시 어쩔 수도 없이
홀로 거기서 타오른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내 양심의 낡은 창가에서
더욱 초라한 모습으로 서성이는
이처럼 헛된 짓을 나는
밤마다 거울을 깨듯 놀라고 있다.

손에 만져지는 아픔이
슬픔으로 창에 비치면
아직 부끄러운 표정으로
흩어진 언어에 불을 지르고
쓰러진 내 그림자와 함께
검고 자그마한 화석이 된다.

혹은 아니다의 틈에서

‘이것은 꽃이다’와 ‘아니다’ 사이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와 ‘아니다’ 사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와 ‘아니다’ 사이
이다와 아니다 사이에
시가 있다
새로운 날개를 뻗어 날아간다 아니다
그 자리에서 아래로 추락한다 사이에
시가 있다

모든 정지한 것은 죽은 것이다, 아니다
말의 혼란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찾기는
너무 힘들다 아니다 존재의 본질은
처음부터 이다와 아니다인지 모른다

홀로서기

홀로 서기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작은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 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엔 아무 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으며
체념할 수밖에……
위태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서고 있었다.

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멀어져 갈 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 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냉담하게 돌아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 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 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 지라도.

5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며 어겨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 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톰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디가에서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 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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