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시모음

가을 밤비

쏘나타로 쏟아지는 가을밤비 소리
놋날로 맞고맞아
젖고 싶네 흐물어지도록
차겁게 떨며 떨며
속죄하고 싶어지네

지난 봄 붉게 꽃피운 죄
지난 여름 울울창창 녹음 우거졌던 죄
푸르딩딩 덜 빠진 때얼룩이도 탈색시켜
얼음 직전의 순수울음
인생을 울구싶네.

간이역

시력 나쁜 눈길은 못 봐서 지나치고
약삭빠른 발은 볼품없다 지나친다마는
쉰고개를 넘어오신 부르튼 맨발이여
얼마나 고단하신가

불개미 한 마리도 안 밟으려 애쓰느라
가벼운 사잇길도 힘겨웠던 삐걱정갱이
절룩걸음이여 그대 기다려 나는 있다
인정의 간드레불 끄지 않는다

물러앉은 3등인생 졸음겨운 하품질로
쉬파리떼 왱왱거리는 고향의 푸념질로
거친 두 손 뒷짐 진
등 굽은 고향으로.

개구리소리

여름밤의 이 테마뮤직도
백의민족의 것인가
뒷간냄새 자욱하던 고향의 것인가
비가 오실 예감으로
본능이 먼저 알고 우는
청개구리 떡두꺼비 맹꽁이 같은 개구락지떼
모기소리 소쩍새소리 순서 없이 반주삼아
울다가 그쳤다가 합창이다가 중창이다가
소년과수로 늙어가는 삼종숙모(三從叔母)의
18번 수심가같이
자기도 모르게 길든 입버릇같이
질척이는 밤비소리
고향 그리운 이런 밤에는
개뿔 같은 사랑보다는
차라리 차라리
한 탯줄에 태어난 친자매나 다름없는
머슴의 딸이 그립다
사방치기 공기받기 고무줄 친구가 더 그립다.

나이 들면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이
제 자신이 되고 만다
제 모양 제 색깔의 자기다워지고 만다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가을나이로 익어가면
이기고 짐이 부질없다
인생은 결단코 씨름판의 힘겨루기 같은
한판 승부로 결판낼 수 없는 줄을

적어도 경쟁자도 결국엔 자기인 줄
그래서 여름초록도 늙어지면
어룽더룽 울긋불긋 단풍 지고 만다니까
마침내는 제 자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니까.

누이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영계영계 하는 친구들이
업어 키운 막내동생처럼 대견스러워지는
여자 오십의 이 합자연증(合自然症)

누가 들어도 하품할 이 나이에는
반나절은 눈이 쉬고 반나절은 귀가 쉬는
겨울산하가 되고 싶다
세상의 누이가 되고 싶을 따름이다

빵빠르를 울리며 출현해서는
젊음을 요절내듯 결단내듯
치닫는 신세대도
어리광 받아주듯 손뼉 쳐주고 싶다

비범은 고사하고 평범도 밑돌아서
굳이 있음 없음을 가릴 필요조차 없는
누구에게나 흉허물없는 사이이고 싶다
슬플 때 간절해지는 고향 같은 이름으로.

눈을 감으면

눈을 감으면
두 눈을 감아버리면

내가 살아온 세월의
얼마나 많은 진실(眞實)과
얼마나 많은 허위(虛僞)가

타동사(他動辭)에 얹혀 실려
타인(他人)의 그것처럼 달려드는가

그래서 번쩍
눈떠 죽고 싶다.

떠남

꽃아
나도 너처럼
화려한 소문 앞세워 와서
황홀히 황홀히
붉게 죽고만 싶었더니라

꽃도 아닌 잎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라
신(神) 지폈던 무당(巫堂)에게
신이 떠나버린 듯
아아 얼마나 홀가분한가 말이다
비로소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닌가.

독서시절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뮐러의 실연시 겨울나그네
소월의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과

지드의 좁은 문
하디의 테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석순옥을 만났던 이광수 의 흙.

내 생애 단 한번 순수의 계절
나 소녀적 그 독서시절에
날 사로잡던 이 명작들이 있어서

은발머리 희뿌우연 겨울수풀 되어도
아무때나 다시 10대 여학생이 되어
행복할 수 있어라 행복했던 독서시절.

밤을 기다리며

듣고 싶어라
밀레의 그림 속 저녁 종 치는 소리

집착과 욕망에 끌려다닌 벌건 대낮이 가고
그 어이없는 낭패를 까맣게 덮어 지워주면서
타일러 깨우치는 침묵하는 어둠

달려가 어머니의 검정 치마폭에
얼굴 묻는 아이처럼
눈물자국 덜 마른 그 아이 얼굴 가득
넘치는 만족이여

고치 속에 다리 뻗어 안식하는 누에 번데기
그렇게 오너라 밤, 밤이여.

백두산 천지에서

용서치 마시어요
남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참배하지 못하는
못난 겨레의
너무 큰 종교 백두산 천지여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배달이 신앙하올
장엄한 절대(絶對)여

전율적 침묵 앞에
그저 다못 넋을 잃을 뿐인 속수무책을
제발 벌주시어
따끔한 맛으로 정신차리게 하시어요.

새벽눈

천상의 종소리로
쏟아지는 새벽눈발

오오 산타 마리아여
흰 눈 속에 무릎 접은 당신의 딸
저 오늘 왜 이리도 행복하지요
세상이 왜 이리도 따뜻하지요

살아 있어 다할 수 없는
감사함의 눈물이여.

첫눈 속을 걸으며

첫눈 속을 걸었다
흠뻑 맞고 싶어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용서하심 같아서
교황성하의 강복(降福) 주심 같아서
좋은 날 뿌려주는 색동꽃종이 같아서

뜨겁게 뜨겁게
뺨을 적시며
가슴을 적시며

지치도록 걸으면서
좋은 울음 울었다.

십자苦像

돌아갈 고향은
임하댐 속에 수몰되어 자취도 없고

사람을 믿은 부질없음과
그래도 믿고 싶은 슬픈 어리석음과
세상것을 사랑한 덧없음이여 속절없음이여

이 많은 잘못 잘못투성이 나를
대못에 꿰인 채로 기다리시다니요

당신만이 나의 옳은 선택이십니다
당신을 사랑해온 일만이 칭찬받을 짓입니다
울음 터질 벅찬 나의 자랑이십니다.

아침기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수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無策) 이 상책(上策)인 불운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그래서 더러 용서도 빌어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가며

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여 있어
늘 미안한 자격미달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어머니 안 계신 어머니날에

살모사(殺母蛇) 새끼같이
우렁고둥새끼들같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어머니께만은 죄인일 수밖에 없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에게만은 모두 성모님이십니다
모르긴 몰라도 예수님 그 분도 아마
성모 마리아, 어머님께만은
죄 무거운 불효를 아파 아파하셨을 겁니다
오오 어머니
어머니의 빈자리는 하늘만하십니다
하늘하고 땅보다 더 크십니다요.

오후

천천히
담담하게
조용히
객쩍고 미안하게……
이런 말들과 더 어울리는 오후(午後)
그래서 오후가 더 길다
그런 오후를 살고 있다 나는

지는 해가
더 처절하고
더 장엄하고
더 할말 많고
더 고독하지만
그래서 동치미 국물보다 깊고 깊은 맛이여
그런 오후를 살고 싶다 나는

우리나라 하늘빛

아득도 해라
비 그친 우리나라 저 하늘빛은

청년 예수를
듬직한 아들로 여겨서는 아니되고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 하느님으로 믿어야 하는

기막힌 가슴의 어머니의
깊고도 머언 눈빛처럼
초로(初老)의 모친(母親)을 바라보시는
하느님 예수의 아득한 눈빛처럼

너무 깊어라
멀고도 드높고 아득도 해라.

지천명

그만 포기할 때가 아닌가 싶네
천명(天命)을 알아버린 쉰객 벽오동
실패인생 반백년을 막 내릴 때라 싶네

창법(唱法) 공부 50년간
어르고 간 빼먹는 산발머리 떼귀신들
비바람 눈서리도 달래어 눙쳐 앉혀
꼬드겨 부리는 재주 그 힘들고 오랜 공부에도

어드메인고
빈 하늘 안 보이는 득음(得音)의 길은

봉황은 단념하고 날벼락이나 기다리는
겸손을 배우는 노년 입문(老年入門)
선 채로 맞아 불타 덩치째로 나뒹굴어져
임자 없는 거문고로 때없이 울구 싶네

안 들어도 눈물나는
전설의 꽃빛 보라
기억 밖의 밤이슬같이 떠돌다 지고 싶네.

한밤중에

사랑이신 하느님
오온 마음으로 불러봐요
잠이 안 와 베개 속에
얼굴 깊이 파묻고
달인 피를 졸여졸여
간절하게 불러봐요
당신의 못난 딸
저 여깄어요
못나서 여직 힘든
저 여깄다니까요.

초봄 날씨

젖배린내 나는 햇살
졸음 겨운 아지랑이
게다가 귓속말 바람까지도

사내를 밝혀 암내 피우느라
간지라운 저 초서체의 눈웃음과
초서체의 목소리

전신만신이 가려워진다
귓밥 자꾸 후벼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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