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모음

깃발

깃발을 뜯어먹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바람은 깃발한테 붙잡혔다
깃발은 손아귀로 바람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하면서

또 못된 짓 할래, 안 할래
자꾸 묻는다

고등어

좌판대 위에 누운 생선들 중에
고등어 몸통이 제일 통통하다

침투하려고 했니?
표류하고 있었니?

그물에 걸린 잠수정같이……

고등어,
너에게도 조국이 있었으리

관계

화들화들 꽃 피기 시작하는 저 살구나무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요

나 혼자서 그냥 살구나무 아래 서 있었는데
살구꽃들이 낭비하는 조명탄을 고스란히 받고 서
있는 일이 황송해서
꽃 참 곱다, 단 한 번 중얼거렸을 뿐인데

이를테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 나 뜨
거워진
연애 같은 거, 그게 아니라면
눈을 채 감지도 않고 치르는 촉촉한 和姦 같은 거,
잠깐 생각하고 있었을 따름인데

말못할 사건이 그렇게 터진 건가요
바람도 겨드랑이에 손을 갖다댄 일이 없는데
살구나무는 자꾸 킥킥거려요
나도 또 따라서 자꾸 킥킥거려요

퍼뜩퍼뜩 말 좀 해봐요
어째 그만 일없이 들통이 났다는 건가요

눈 오는 밤

한 입,
또 한 입,
눈을 받아먹던 아이들이 집으로 다 돌아간 뒤에

한 등,
또 한 등,
마을의 집들이 모두 전등 스위치를 내린 뒤에

오줌이 누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가
그때, 가로등은
흉내를 한번 내보기로 하였다

아,
아아,
눈을 받아먹으려고
저 혼자서 입을 크게 벌려보았다

大雪

상사화 구근을 몇 얻어다가 담 밑에 묻고 난 다음 날,
눈이 내린다

그리하여 내 두근거림은 더 커졌다

꽃대가 뿌리 속에 숨어서 쌔근쌔근 숨쉬는 소리

방안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웠어도 들린다

너를 생각하면서부터
나는 뜨거워졌다

몸살 앓는 머리맡에 눈은
겹겹으로, 내려, 쌓인다

돼지

저 돼지 한 마리
멱살 잡힌 채 정육점 입구까지 끌려온 돼지 한 마리
구차한 기색이란 없다
오히려 당당해 보인다
꼭꼭 닫아두었던 가슴 열어제치고
먹는 데 골몰하던 거추장스런 큰 머리 떼어내고
다시는 기어다니지 않겠다고 발목도 떼어내고
올림픽 높이뛰기 선수처럼
뛰어오른다 경쾌하게
이 못된 세상 박차고 뛰어오른다
꿀꿀거리지도 않는다

등꽃, 등꽃

등꽃이 피었다
자국이다, 저것은
허공을 밟고 이 세상을 성큼성큼 건너가던 이가
우리 집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내 사는 꼴 들여다보고는 하도 우스워
혼자 키들거리다가 그만
나한테 들키는 순간이었는데,
급한 김에 발자국만 여러 개 등나무에 걸어놓고
이 세상을 빠져나간, 그 흔적임이 분명하다
얼마나 가벼워져야 나는 등꽃, 등꽃이 되나

마당밥

일찍 나온 초저녁별이
지붕 끝에서 울기에

평상에 내려와서
밥 먹고 울어라, 했더니

그날 식구들 밥그릇 속에는
별도 참 많이 뜨더라

찬 없이 보리밥 물 말아먹는 저녁
옆에, 아버지 계시지 않더라

목련

징하다, 목련 만개한 것 바라보는 일

이 세상에 와서 여자들과 나눈 사랑이라는 것 중에
두근거리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니

두 눈이 퉁퉁 부은
애인은 울지 말아라

절반쯤만, 우리 가진 것 절반쯤만 열어놓고
우리는 여기 머무를 일이다

흐득흐득 세월은 가는 것이니

물집

호두가 아구똥지게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감자가 덕지덕지
몸에다 흙을 처바르고 있는 것,

다 자기 자신이 물집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다
터뜨리면 형체도 없이 사라질 운명 앞에서
좌우지간 버텨보는 물집들

딱딱한 딱지가 되어 눌어붙을 때까지
生이 상처 덩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그래서, 나도 물집이다
불로 구워 만든 물집이다
나도 아프다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며칠 집을 비워두었더니
멧새들이 툇마루에 군데군데 똥을 싸놓았다
보랏빛이었다
겨울 밤, 처마 아래 전깃줄로 날아들어 눈을 붙이
다가 떠났다는 흔적이었다
숙박계가 있었더라면 이름이라도 적어놓고 갔을 걸,

나는 이름도 낯도 모르는 새들이 갈겨놓은
보랏빛 똥을 걸레로 닦아내다가
새똥에 섞인 까뭇까뭇한, 작디작은 풀씨들이 반짝
이는 것을 보았다

멧새들의 몸을 빠져나온 그것들은
어느 골짜기에서 살다가 멧새들의 몸 속에 들어갔
을꼬, 나는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골짜기에서
이 누옥까지의 거리를 또 생각해보았다
내일도 모레도 내가 없으면
내가 없으면 이 처마 아래로 날아들어 잠을 청할
멧새들의 또랑또랑한 눈을 생각해보았다

봄똥

봄똥, 생각하면
전라도에 눌러앉아 살고 싶어진다

봄이 당도하기 전에 봄똥, 봄똥, 발음하다가 보면
입술도 동그랗게 만들어주는
봄똥, 텃밭에 나가 잔설 헤치고
마른 비늘 같은 겨울을 툭툭 털어내고

솎아 먹는
봄똥, 찬물에 흔들어 씻어서는 된장에 쌈 싸서 먹는

봄똥, 입 안에 달싸하게 푸른 물이 고이는
봄똥, 봄똥으로 점심밥 푸지게 먹고 나서는

텃밭가에 쭈그리고 앉아
정말로 거시기를 덜렁덜렁거리며
한 무더기 똥을 누고 싶어진다

聖 아기

제 앞뒤도 가릴 줄 모르는 어린 것,
제가 싼 똥을 손으로 주무르고 볼에 처바르고
입에도 우겨넣는다
앞에 가리기에 여념이 없는 더러운
어른들이 보지 않을 때, 마침내 저지른다
저지르는 것이 두려워 떨고 있는
어른들이 보지 않을 때,

소낙비

톡, 하고
살구 한 알이 가지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나는 엎드려 朴龍來 詩集을 읽는다)

토독, 톡, 하고
살구 두 알이 덩달아 떨어진다
(풀벌레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한다)

토독, 톡, 톡, 하고
살구 세 알이 급하게 땅으로 뛰어내린다
(콧속으로 풀 비린내가 훅 들어온다)

토독, 톡, 톡, 톡, 톡, 하고
살구는 이제 떨어지며 제법 빗방울 소리를 낸다

시인

나무 속에
보일러가 들어있다 뜨거운 물이
겨울에도 나무의 몸 속을 그르렁그르렁 돌아다닌다

내 몸의 급수 탱크에도 물이 가득 차면
詩, 그것이 바람난 살구꽃처럼 터지려나
보일러 공장 아저씨는
살구나무에 귀를 갖다대고
몸을 비벼본다

이른 봄날

이른 봄날, 앞마당에 쌓인 눈이
싸묵싸묵 녹을 때 가리
나는 꼭 그러쥐었던 손을 풀고
마루 끝으로 내려선 다음,
질척질척한 마당을 건너서 가리
내 발자국 소리 맨 먼저 알아차리고
서둘러 있는 힘 다해 가지 끝부터 흔들어보는
한 그루 매화나무한테로 가리

연초록의 이삿날

연초록을 받쳐들고 선 저 느티나무들 참 장하다
산등성이로 자꾸 연초록을 밀어올린다
옮기는 팔뚝과 또 넘겨받는 팔뚝의 뻣센 힘줄들이 다 보인다
여기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더 가져가겠다는 뜻 없다
저수지에도 몇 국자씩이나 퍼 주는 것 보기 참 좋다

장마

神은 처마 끝에 주렴을 쳐놓고
먹장구름 뒤로 숨었다

빗줄기를 마당에 세워두고
이제, 수렴청정이다

산골짝 오두막에 나는 가난하고 외로운 왕이다

나, 장마비 어깨에 걸치고 언제 한번 철벅철벅 걸어 다녀를 봤나
천둥처럼 나무 위에 기어올라가 으악, 소리 한번 질러나 봤나

부엌에서 고추전 부치는 냄새가 올라올 때까지
구름 뒤에 숨은 神이 내려올 때까지
나는 게으르고 게으른 사내가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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