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 시모음

국화

누가 두고 갔나
문 앞에 놓여 있는 국화 한 다발
잠자는 이 깰세라
가만히 탁자 위에 올려두네.
바깥은 때 이르게 싸락눈 내리고
밤내 기다리던 손님 맞듯
발끝으로 다가서는
진한 꽃향기
어둠 속에 혼자 서서 눈감아보면
보낸 이의 아픈 마음 지울 수 없네.

가을에 아름다운 사람

문득 누군가 그리울 때
아니면
혼자서 하염없이 길 위를 걷고플 때
아무 것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단풍잎 같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질 때
가을에는 정말
스쳐가는 사람도 기다리고 싶어라.
가까이 있어도 아득하기만 한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미워하던 것들도 그리워지는
가을엔 모든 것 다 사랑하고 싶어라.

기도

전생에 나는 그대 문 앞에 서 있던
한 그루 나무일지 모른다.
흔들면 우수수 잎새 떨구는
말없는 나무일지 모른다.
다시 태어나도 그대 창가 맴도는
바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대가 마지막 순간에도 두 손 모을
한마디 기도이고 싶다.

걸어온 날들

한 장의 낙엽을 보며
내 걸어온 날들을 생각합니다.
꽃이 되기 전의 씨앗
그리고 잎이 되기 전의 새순같이
우리는 모두 눈부신 날들이 있었습니다.

나목

옷 다 벗어버린 나무를 본다.
마지막 열매마저 새들에게 내준
가지는 부러져 아궁이로 간다.
나무처럼 살고 싶다.

모짜르트를 듣는 시간

겨울 오전11시
모짜르트를 듣는다.
얼었다가 다시 풀린 강 위로
은비늘 같은 햇살이 튀고
목도리를 두고 간 아이가
동동거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시간
커피향 묻어 있는 거실에 앉아
마음을 붙잡는다.
음악은 세상의 밀실
침입자 찾기 힘든 안전한 공간
창문을 두드리는 피아노 소리 듣다가
일어나 문득 세상을 내다본다.

눈물

꺼내어도 꺼내어도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당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구속이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내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그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 징역이다.
제 형기 다 채우고 만기 출소한 아들 입에
두부를 떠 넣는
죄 없는 어머니의 눈물 같은,
사람이 사람을 잊을 수 없다는 그 생각은
생각이 아니라 형벌이다.

눈 편지

산에 눈 왔다.
어젯밤 새들은 어디서 잤나?
파랗게 갠 하늘이 배달해준
편지에 녹아
나무들이 울고 있다.

다시 사랑할 시간 허용된다면

누구를 향한 건지 나의 누옥은
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하고 있다.
못 하나 박을 데 없는
부박한 내 마음의 비 새는 초가
한때 나는 사랑할 줄 몰랐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다 누군가를
욕망하기에 길들어 있었을 뿐,
누군가를 용납하기보다 누군가를
분별하기에 길들어 있었을 뿐,
내가 지었던 내 마음의 누옥은
작은 비에도 여기저기 새는 곳이 많았다.
다시 내게 사랑할 시간 허용된다면
비 새는 누옥을 고치고 싶다.
마음의 평수 더 크게 넓혀
작지만 넉넉하게 살고 싶다.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뜨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나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山寺의 풍경風磬처럼 먼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初老의 들길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사랑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딥니다

눈 무게 견디지 못한 나무들이 부러집니다.
그대 무게 견디지 못한 나도
부러질지 모릅니다.
눈썹 위에 얹히는 눈은
나비보다 가볍습니다.
가벼운 것이 모여 무거움을 만듭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쌓아두면 무겁습니다.
사랑은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딥니다.

여우의 사랑

사랑한다는 말보다 쉬운 말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낡은 말도 없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랑 앞에 다쳐 내 마음은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기 두렵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향하는 내 마음
달리 표현할 길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결코
나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낡은 말도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내 마음
습관에 길든 한 마리 여우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 속엔
눈부시도록 푸른 하늘이 들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사랑 받는다고 하는 말 속엔
햇빛처럼 가득한 따뜻함이 들어 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누가 누구를 한없이 기다린다는 말 속에
숨어 있는 예쁜 가시,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보다
예리한 아픔은 없다.

외로움이 깊으면

외로움이 깊으면 가을도 깊어간다.
수면에 떨어뜨린 눈물만큼
낙엽이 쌓이면 가을도 깊어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번뇌의 강안江岸에 매어놓은 빈 배
묶여 있는 배를 풀어 강 건너는
오랜 내 외로움의 쌓여가는 낙엽
수심 어린 표정으로 수심 깊어가는
가을이 깊으면 외로움도 따라 깊다.

어머니

엄마,
우리엄마, 하고 불러봅니다.
철들고, 어느새 나이 마흔 후딱 넘어
한 번도 흘려보지 않은 눈물 흐릅니다.
정월 대보름입니다. 마흔 넘어 처음 보는
보름달입니다.
눈 내린 듯 환한 밤길 걸어
술 받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달아,
달 본 지 십 년도 이십 년도 더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았기에 눈물 흘린 지
십 년도 이십 년도 더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
목 메는 이름입니다.
어머니,
세상의 아픈 사람들 모여 불러보는
이름입니다.
세상의 섧은 사람들 다 모여 힘껏 달불 돌리는
어머니,
대보름입니다.

어머니와 풀벌레

풀벌레 운다.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밤이
세상에 보자기 하나 덮어놓는다.
보자기에 덮인 찬밥처럼 나는
점점 더 식어간다.
한 번쯤 눈물 섞인 밥을 먹는
사람의 일생
더 먹어, 더 먹으라며 밥그릇 밀어주시던
어머니 손등 위로 눈물처럼 묻어나며
세월이,
풀벌레 울음 같은 세월이,
왔다간 가고 왔다간 가고
뜰 앞을 윤회한다.

작은 평화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간의 말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만히 귀 맡기고 있으면
흔들리던 마음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창가에 걸려 있는 흐린 하늘을
커튼 걷듯 걷어서
세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찌푸리고 있는 얼굴 위로
활짝 웃는 입 모양 그려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흐린 하늘은 금방 울음을 터뜨릴지 모릅니다.
찌푸리고 있는 얼굴은 또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 때문에 힘겨운 건지도 모릅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더 큰 이유는
상처받지 않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마

햇볕에 말리고 싶어도 내 마음
불러내어 말릴 수 없다.
더러우면서도 더러운 줄 모르는 내 마음의 쓰레기통
씻어내고 싶어도 나는 나를
씻어낼 줄 모른다.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착각
제대로 볼 수 없어 온몸이 아프다.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캐논

매달려 있는 홍시가 멀리 있는
호롱불 같다.
안개도 투명한 안개가 있는지,
이파리 떨군 감나무를 보며
파헬벨의 캐논을 듣는다.
첫 소절이 그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 짧은 순간
계절이 벌써 마흔 번 넘게
집 앞을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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