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5월 22일 오늘의 명언

김학원

대통령과 제1야당의 대표가 만나서 2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도 공동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서로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이라면, 애당초 만나지 말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빅토르 위고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그 사람을 신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지상의 어떤 권력도 때가 무르익은 생각을 막을 수 없다

여운계

4학년 때 실험극장이 생겼고 졸업하면서 드라마센터가 생기니 배우들이 자연적으로 그쪽으로 흡수가 됐어요. 월급을 못 받아 다들 가난했는데 다행히도 가장은 아무도 없었어요. 결혼할 형편들이 못 됐던 거죠.

<아우와의 만남>이라는 특집극을 찍으러 백두산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본 백두산 천지가 지금도 눈에 선해요.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요. 몹시 빠른 속도로 구름이 움직이는 사이로 아주 잠깐 동안 시퍼런 물이 보였는데, 그것이 너무도 깊고 컴컴했어요.

굉장히 스트레스가 돼요. 하지만 그 부담을 배움이나 깨달음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죠. 인간은 10억이면 10억명 모두 다른 개체라 볼 것도 배울 것도 무궁무진해요.

굉장히 짓궂었어요. 위로 있던 언니들은 돌아가셨고, 남자 삼형제와 딸 하나인 제가 같이 자랐어요. 사내아이들처럼 놀았고 내가 좀 다혈질이었어요. 어리고 여리고 연약했으면 보호와 귀여움을 받았겠지만 워낙 말괄량이에다 못생겼으니, 그리 인간적인 대접을 못 받았죠. (웃음) 엄마도 나는 공주처럼 안 키웠어요. 내깔려뒀어요.

구석의 쪼그만 강당에서 연극한다고 유명인사가 되진 않았어요. 정식으로 연극을 배운 것은 극회가 처음인데, 특별히 어떤 배우를 동경했다거나 모델이 있었다기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창작 그 자체가 재미있었어요.

그때 나이가 스물대여섯인데 다들 꽃처럼 아름다울 때잖아요. 더구나 배우들이니 얼마나 예쁘겠어. 그런데 난 워낙 못생겼으니까 어디를 봐도 멀찌감치서 볼 무대용이지 1, 2m 앞에서 카메라에 비추는 드라마용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TV가 나를 선호하지 않은 것이죠.

나는 내가 제일 망가진 것 같은데….

나는 옛날 아녀자들에겐 화장도구가 많지 않았을 거라 보고 메이크업을 거의 안 한다고 설정했어요. 다른 여배우들과 상의는 안 했죠. 그런데 처음 화면을 보니까 너무 흉하게 나와 시청자에게 미안한 노릇이라 나중에는 조금 추한 면을 가렸죠.

난 공부가 부담이 전혀 안 됐어요. 열심히 안 했거든.

난 남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타입이라 군기 잡는 데는 전혀 소질이 없다.

난 내 자신을 너무 잘 알았어요. 지금은 우리 또래가 다 노역을 하니 노역층이 든든하지만 당시는 노역 배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난 20대에 주름을 그리고 노역을 한 거예요. 스물네살 무렵부터 오늘날까지 노인 연기를 한 세대인 거죠. 속상하지 않았냐고요? 많이 분했죠.

남의 머리 빗겨주는 취미는 지금도 있어요. 미용이든, 뜨개질이든 양재든 손으로 하는 일을 잘하거든요.

당시엔 방송국에 미용 담당 부서가 없었어요. 다들 미장원에서 각자 하고 왔죠. 그러다 1970년 들어서 머리하느라 방송이 늦어지고 중간에 스타일을 바꾸기도 어려워 연기자들의 요구로 상주 미용사가 생긴 거예요. 나는 다른 배우들 머리도 가끔 해줬어요. 이 역할은 머리를 이렇게 디자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도 하고, 양공주 역이면 내가 어려서 본 양공주는 이랬다고 참견도 하고.

만담도 하고 선생님 말과 제스처도 똑같이 흉내내고 노는 시간에 즐겁게 해준다고 인기가 있었죠. 반장, 부반장, 규율부장 다 해봤지만 주로 부반장을 했어요. 반장은 하기 싫었거든요. 책임이 너무 무겁잖아요. 공부에는 전연 집착 안 했어요. 원래가 난 집착이라는 게 안 돼.

본명들이 아주 희한한 게 많아서 어느 시점에 꼭 들통이 나요. 비행기 탈 때라든가, 방송국 출연료 받을 때 보면 이숙자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언년이야. 아유, 얼마나 재밌어요?

사실 교사자격증도 있고 학교로 가려고 했는데 취직이 안 됐어요. 그런데 드라마센터가 실험극장보다 1년 늦게 연극만 하는 극장으로 설립되면서, 관람료를 받으면 월급을 준다고 해서 연극을 계속 했죠. 졸업했는데 용돈을 타 쓸 수는 없잖아요. 결국 월급은 한번도 못 받았지만.

시작은 KBS에서 하고 동양방송이 개국하면서 그리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저는 영광스럽게 발탁된 것이 아니고 그냥 스닉 인(sneak in)해버린 경우예요. 왜 이런 표현을 쓰냐면 정말 예쁘고 잘생긴 신데렐라들은 등장도 떠들썩하게 화려하게 했는데 나는 언제 어디서 주모가 필요하다고 부르면 그리로 가고 다방 마담이 필요하다면 가고, 그렇게 흐지부지 시작한 거예요.

시험은 할머니 역과 여학생 역의 대사를 주고 그중 하고 싶은 것을 골라 선생님 앞에서 성우 연기를 하는 것이었는데 가만 보니 애들이 전부 소녀 역할만 연습하는 거야. 그런데 여학생 대사는 “얘, 영자야 너 시험 끝나고 어디 가니? 나하고 보령극장에서 만나자” 이런 식이니 대사에 어떤 굴곡이 없더라고. 그런데 할머니의 대사는 애들을 야단쳤다가 울다가 웃다가 그래요. 아, 이게 재밌다, 감정변화가 좋다 싶어 그걸 연기했죠. 그랬더니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배를 잡고 웃으며 기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내가 할머니 역할을 한 거지.

억지로 했죠. 사랑하는 마음이… 참 실감 안 나대요. 속상했어요.

얼굴이 시대극에 맞지 않아서 그래요. 난 모든 게 다 얼굴로 귀결돼요.

연극무대에서는 주인공을 했어요. 그렇지만 연극은 끝까지 돈이 전혀 안 됐고 점점 TV 일이 많아졌죠.

연기를 계속하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해. 여배우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만 두겠다고 해도 이번 한번만 해달라고 부탁해서 한 것이 4년 동안 8번의 공연을 했죠.

연기자는 자기가 설정한 이미지를 충분히 제대로 표출해야지, 이론이 아무리 강해도 표현을 못하면 소용없잖아요. 우리는 액션을 하는 사람이니까.

운자는 집안 돌림자예요. 그러니까 운자에 붙일 글자를 정해야 하는데, 여자아이에게 붙이는 글자가 숙자니 순자, 영자 등 뻔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친척 중에서도 늦게 태어난 편이라 남은 글자가 없는 거라.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께서 날 낳을 즈음 꿈에서 우연히 벽시계를 보셨대요. 고민할 것도 없이 계자를 붙이셨죠.

유 선생님 작품은 전부 성공했는데 제가 그 분 작품 80%는 출연했어요. 미모를 별로 안 따지는 분이라, 오호호.

의 장모 역은 집안의 실세는 아니면서도 좀 두드러지지 않았나요? <내 사랑 누굴까>에서는 몇 십년 주부 노하우로 다져진 철두철미한 시할머니 역이었지만 굉장히 강하지 않던가요? 참, 거기선 이순재 선배님과 부부로 나왔죠. 이순재 선배님이 제 아들 역은 무척 많이 했지만 부부로는 처음 나온 작품이었어요.

이 세상에는 너무도 큰 슬픔을 가슴에 담고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이요. 키워주신 분들께 고마워해야겠다는 생각도 해요. 낳은 부모 품에서 못 자랐다는 건 거꾸로 누군가, 시설이건 양부모건 키워줬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가끔은 그런 감사의 표현이 상대적으로 약하구나 싶기도 해요.

이병훈 감독이 <대장금>을 제의했을 때도, 사극이면 머리를 뒤로 다 넘겨야 하는데 커버할 도리가 없다고 거절했죠. 그런데 쪽은 안 질 거라면서 “도대체 이 역을 왜 안 합니까?” 하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지금도 왜 나여야 했는지는 이해 못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정말 좋은 역할이라서 좋은 반응을 얻어 다행이었어요. 작가가 대사를 의롭게 써주셨어요.

이제 귀찮아서 그런 거 안 해요. 내깔려둬요. 후배들이 미처 경험이 없어서, 훈련이 부족해서 생기는 기술적 미숙함은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인생 코치는 안 해요.

좀 색다른 냄새가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나지 않습니까? 예전 시즌도 가끔 봤는데, 연기자들이 다 제멋대로 하고 있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그 와중에 눈길을 끄는 뭔가가 있었어요.

중학교 2학년까지 수원에서 다니다가 서울의 무학여중으로 전학을 왔는데 규율이 엄해서 그것을 어기고 영화를 보러가는 일이 많지는 않았어요. 내가 최초로 본 영화는 중2 때 단체 관람한 이념 대립에 관한 반공영화였어요. 38선을 넘어서인가, 지평선을 넘어서인가 하는 제목이었는데…. 40대, 50대까지만 해도 이건 내가 처음 본 영화니 제목을 잊지 말자 다짐했었는데 마지막 기억한 게 10년 넘어버리니 그만 잊어버렸네! 아무튼 메시지는 차치하고 그 커다란 스크린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연기를 하는 인상이 깊이 남아 있어요.

지금도 내 판단을 존중해주신 아버지한테 굉장히 고마워요. 내가 뭘 해도 그걸 왜 했냐, 이게 더 낫지 않냐는 말씀이 없으셨어요. 간섭하면 어떤 길을 가다가도 다시 돌아와 의지하게 되는 법인데, 내버려두시니까 오로지 내가 길을 가야만 했죠. 그래서 홀로서기를 더 빨리 했는지도 몰라요.

처음 제안을 받고는 매주 정해진 시각에 방송하는 일이 부담스럽고 딱히 할 말도 없을 것 같아서 사양했다가 지인들이 그렇게 좋은 프로를 왜 안 하느냐고 해서 시작했어요. 결국 나는 프로그램에 별 도움이 안 되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는 것은 많아요.

처음에는 정극이 아니라고 생각해 망설였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작가가 얼마든지 상상력을 동원해 자기 기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묘미가 있고, 연기자도 연기 폭을 많이 넓힐 수 있는 작품이에요.

큰 감동을 받은 예술작품은 무학여중 3학년 때 명동 시공관에서 단체 관람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였어요. “아, 오페라라는 것이 저렇게 좋은 거구나!” 했죠. 그건 마치 뭐랄까, 산속에 맑은 샘이 있잖아요? 가느다란 줄기지만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서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생명수를 주잖아요. 오페라가 그렇게 보였어요.

힘들기도 했고 남자가 많은 학교이다 보니 눈에 띄는 것도 싫어서 강력하게 안 하겠다고 한 적도 있는데, 나만한 배우가 없는 거야.

위고

나의 취미는 귀족적이고 나의 행동은 민주적이다.

노동은 생명이요, 사상이요, 광명이다.

커다란 슬픔은 슬퍼하는 자를 변모시킨다. 그것은 신성하고도 백열하는 광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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