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6형제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이 늑약이 알려지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비롯하여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로 대한은 망하였다. 이 일을 어찌 하는가. ” 분노한 군중들이 종로를 메웠고 종로 상인들은 일제히 철시했다. 어떤 이들은 도끼를 떠메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통곡했고 을사오적을 죽이라 호소하기도 했다. 그때 실로 귀티가 나는 서른 여덟의 남자가 이상재 이동녕 등과 함께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회영.
오성과 한음 중 오성이었던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그 가문에서 정승판서가 수두룩했던 ‘삼한갑족’의 일원이었고 명동성당 아래 일대의 땅을 몽땅 보유했던 거부이기도 했던 그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살려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비밀리에 사람을 사서 을사오적을 죽일 계획을 꾸미기도 했지만 무위에 그쳤고 고종에게 밀사 파견을 제안하고 그 신임장을 몰래 빼돌려 간도의 이상설에게 전달했지만 밀사들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하지도 못했다.
대한이 다시 ‘조선’으로 바뀌고 황제가 ‘이왕’이 되고 3천리 강토가 일본의 치세에 들어갔던 1910년 12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두만강을 건넜다. 얼굴을 베고 지나가는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면서 잰걸음을 하던 그들은 바로 이회영의 가족들이었다. 이회영과 그 형 둘, 그리고 왕년의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요 과거에 급제하여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던 동생 이시영 등 6형제의 가족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형제들이 지닌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현금화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길이었다.
나라를 회복할 무장 항쟁의 군자금으로 그 재산을 쓸 요량이었다. 전답과 토지는 물론, 조상 제사를 위한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제사냐 하는 심사였으리라. 일행 중에는 가족 아닌 왕년의 이씨 가문의 노비들도 끼어 있었다. 노비문서를 불태운지 오래였지만 그들은 끝까지 옛 주인과 함께 하겠다고 했다. 노비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았던 주인들이 큰일을 한다는데 어찌 우리가 따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두만강을 건널 때 이회영은 뱃사공에게 뜻밖의 후한 배삯을 치른다. 뱃사공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자 이회영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이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건너게 해 주시오.” 뱃사공은 이 약속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전한다.
그렇게 건너간 만주에서 그들은 가지고 나온 재산을 털어 ‘경학사’를 세운다. 밭 갈면서 공부한다는 그 뜻처럼 구국계몽운동 이념에 입각한 교육 기관이었다. 또한 그 부설기관으로서 ‘신흥강습소’를 건립하는데 경학사는 곧 문을 닫지만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이후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다. “삽과 괭이로 고원 지대를 평지로 만들어야 했고 왕복 20리나 되는 좁은 산길이라서 험한 산턱 돌산을 파 뒤져 어깨와 등으로 날라야만 하는 중노역이었지만 우리는 힘든 줄도 몰랐고 오히려 왕성하게 청년의 노래로 기백을 높이며 진행시켰다. – 교관 원병상의 회고, 이회영 평전 (김삼웅, 책으로 보는 세상 중)
그렇게 만든 신흥무관학교의 교가 가사를 보면 망국의 설움이 아니라 오히려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영절에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이건 중국을 얘기한다. 중국인들을 ‘업어 길렀다’는 소리) 동해 섬중 어린것들 품에다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일본 사람들을 젖먹여 키웠다는 소리)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는 피가 우리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곡조는 “신대한의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로 시작되는 독립군가이자 찬송가이기도 하고 <조지아 행진곡>의 그 곡조.
만주 벌판을 누비던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들과 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 그외 모든 독립운동 영역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데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수업료는 무료였다. 그 밑빠진 독에 퍼부어진 물은 모두 이씨 가문의 재산이었다.
일본과 그 압력을 받은 만주 군벌에 의해 신흥무관학교가 폐쇄되자 이회영은 북경으로 옮긴다. 그의 집은 그대로 독립운동가들의 전진기지이자 휴식처이자 사랑방이자 회의 장소였다. 독립운동가, 또는 그런 뜻을 지니고 북경을 찾은 조선인들은 예외없이 이회회영의 집을 찾았다. 그 가운데에는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도 있었다. 그의 기록에 나타난 이회영의 모습은 사뭇 눈물겹다.
“두 달 만에야 식비가 와서 나는 우당 (이회영의 호) 댁을 떠나 동단패루에 있는 공우로 갔다. 허구헌날 돼지기름에 들볶아 주는 음식에 비위가 뒤집혀서 조반을 그대로 내보낸 어느날 아침이었다. 뜻밖에 양털을 받친 마괘를 입고 모발이 반백이 된 노신사 한 분이 양차를 타고 와서 나를 심방하였다. 나는 어찌나 반가운지 한달음에 뛰어 나가서 벽돌 바닥에 두 손을 집고 공손지 조선 절을 하였다. 그리고 노인이 손수 들고 오시는 것을 받아 들었다. 그 노인은 우당 선생이셨고 내 손에 옮겨들린 조그마한 항아리에는 시큰한 통김치 냄새가 끼쳤다.” (이덕일 저, <이회영과 젊은 그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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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음식에 비위가 역하여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는 젊은이를 위해 통김치를 손수 들고 왔던 노인. 이회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북경행 이후 그의 형제들에게는 잇단 비극이 닥쳐 왔다. 한때 손에 물 안묻히고 살았을 이씨 가문 며느리들은 삯바느질로 연명해야 했고 아이들을 제대로 학교에 보내지도 못했다.
이씨 형제의 재산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차지했던, 즉 일찌기 고관 댁의 양자로 들어가 그 재산을 상속받았던 둘째 형 이석영은 상하이의 빈민가에서 굶어죽었고 그 아들은 의열단원으로서 일제 밀정을 처단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다가 20대의 나이에 병을 얻어 죽었다. 동생 철영은 애초 만주 신흥무관학교 시절 죽었고, 맏형 건영의 가문도 대가 끊겼다. 막내 호영은 만주에서 독립운동 중 소식이 끊겨 버렸다. 여섯 형제 가운데 살아남아 해방을 본 것은 다섯째 시영이 유일했다.
이회영은 예순 여섯의 나이에 다시 만주로 향한다. 만주 군벌 장학량에게 무기를 구하려 했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처단하기 위해 갔다고도 하는데 주위에서 고령을 이유로 만류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늙은 사람이 텁수룩하고 궁색한 차림을 하고 가족을 찾아간다고 하면, 누가 나를 의심하겠는가? 내가 먼저 가서 준비 공작을 해 놓을테니 그대들은 내가 연락을 하거든 2진, 3진으로 뒤따라오라.”
그러나 그의 출발은 밀정에 의해 일제에 낱낱이 전달되고 있었다. 요동반도 끝 대련에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받는다. 그리고 1932년 11월 17일 하필이면 을사늑약 체결 27년을 맞던 그날 세상을 떠난다. 일본 경찰은 그가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얼굴에 유혈이 낭자했다는 전언으로 비추어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도 유력하다. 평생을 안온하게 살 수 있었던 온 집안 사람들을 이끌고 풍찬노숙의 망명길로 떠났던 이회영은 그렇게 평생을 바치고 쏟기만 하다가 죽어갔다.
아나키스트였던 그가 독립된 나라의 상을 그렸던 글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진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인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서 중앙정치의 기구를 구성하며, 경제 건설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 운영의 합리화를 꾀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80년 전에 꾼 독립국가의 꿈을 아직 우리는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또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가장 큰 희생을 치루었던 그의 기념관은 국고 아닌 사비로 조성되었고, 지금도 국고의 지원은 1년에 기백만원에 그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우당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뭘 바랐다면 그런 선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니.
출처 :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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