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2월 23일 오늘의 명언

배삼룡

1945년 겨울이었다. 막 일본에서 돌아온 때였다. 일본 도쿄에서 트럭 운전사 노릇을 하던 나는 광복 소식을 듣자마자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 때 나이 스무 살. 청춘의 시작을 알리는 파릇한 나이였다. 그러나 직업은 없었다. 태어난 곳은 양구지만 자란 곳은 강원도 춘천이었다. 고향 춘천에서 실업자로 산다는 것은 정말 비참했다. 그 시절 나의 하루 일과는 시내를 거닐며 이 점포 저 점포 기웃거리는 게 전부였다.

간혹 사람들이 묻는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겠느냐. 뒤집어 말해 ‘당신의 지난 삶에 만족하느냐’란 얘기같다. 내 대답은 늘 똑같다. ‘이리저리 시행착오는 겪겠지만 결국 무대에 설 것이다’. 무대는 내 삶의 출발역이자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그때 다들 배삼룡이 죽겠구나 했는데 살아났지. 그 후로는 담배도 끊고 지금은 그럭저럭 건강이 괜찮아졌어

나는 친구에게서 며칠 전 춘천을 찾은 극단 ‘민협’이 곤경에 처했다는 얘길 들었다. 돈이 없어 여관비를 내지 못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길로 나는 여관으로 달려갔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단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배우가 되고 싶다고?” 단원들은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뭘 잘 하냐? 한 번 해봐.” 대뜸 반말이었다. “노래를 조금 할 줄 아는데요.” 단원들은 노래를 시켰다. 순간 배짱으로 나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헛기침을 두 번 한 다음 노래를 내질렀다. 음정도, 박자도 없는 한 마디로 ‘자유당’ 노래였다. 그래도 나는 넉살 좋게 2절까지 불러제꼈다. 다 듣더니 고참 배우가 손을 내저었다. “집에 가서 동생이나 봐.” 나는 철렁 가슴이 내려 앉았다. 눈 앞이 깜깜했다. 그 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배창순입니다!”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그 이름은 너 한테 안 맞아. 차라리 삼룡이라고 해라. 배삼룡!”. 웃음이 터졌다. 배우들은 대 놓고 킬킬거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삼룡’이란 이름은 조금 모자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의 배우 인생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이 때부터 나는 ‘배창순’이 아니라 ‘배삼룡’으로 살았다. 잡일과 잔심부름으로 얼룩진 숱한 설움과 애환의 나날이 그 이름에 묻어 있다. 그래서 지금도 배.삼.룡 이란 이름 석 자가 본명보다 좋다.

내 삶이 소진되는 날까지 무대에 서는 거예요. 어머니 염낭을 털어 유랑극단을 따라나서던 그날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접은 적이 없는 꿈이야.

내가 태어나던 날에도 아버지는 집에 안 계셨다. 어머니는 혼자서 나를 낳았고, 탯줄도 직접 잘랐다고 하셨다. 무심한 아버지는 밖으로만 나돌아 다녔다. 화가 난 어머니는 갓 태어난 나를 안고 아버지를 찾아 무릎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 이웃 사람이 보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나는 그때 얼어죽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양구 읍내에 소실을 두고 있었다.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는 아예 읍내에다 따로 살림을 차렸다.

누가 인정하든 말든 코미디언은 연기로 웃겨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요즘 개그맨들 보세요. 바탕없이 즉흥적으로 수다나 떨잖아요. 코미디가 아니예요. 코미디 전통을 팽개쳐버린 현실이 안타까워요.

대중과의 약속은 생명과도 같은 거예요. 나가서 한 마디만 하고 내려오더라도, 또 연기하다 쓰러지더라도 무대엔 올라야 되는 겁니다. 다리가 후들거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삼룡아, 넌 해 낼 수 있어’라고 외쳤죠

동네 사람들은 ‘진사댁’ 대신 ‘앉은뱅이네’라고 불렀다. 태어난 지 두 돌이 넘도록 내가 걸음을 못 뗐기 때문이다. 엉덩이로만 방 안을 훔치고 다녔다고 한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꽤 약았던 모양이다. 걷지만 않으면 누군가 업어준다는 걸 터득했던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은 빠르게 지나갔지만 배삼룡은 늘 느렸어. 거기서 생기는 시간 차가 사람들을 웃겼지.

소학생 시절, 나는 학교에서 명물로 통했다. 유명한 배우의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춘천 시내에 들어오는 서커스단의 공연도 빠짐없이 찾아갔다. 당시 춘천에는 극장이 ‘읍애관(邑愛館)’ 하나 뿐이었다. 그곳에서 올리는 악극도 나를 피해가진 못했다. 어머니 주머니를 뒤지기는 예사였다. 아니면 극장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 표를 사는 어른들의 바지를 붙들었다. “아저씨, 손 좀 잡고 들어가 주세요.” 나중에는 아예 ‘상습범’으로 지목됐다. 극장 사람들은 모두 내 얼굴을 꿰고 있었다. 이후로는 극장 담을 타고 화장실 창으로 들어갔다.

어리석고 약해서 눈물 자주 흘렸던 내 인생이 코미디와 닮았다

연구생 신세는 고달팠다. 그런 나에게 주연 여배우 김화자의 관심과 동정은 큰 힘이었다. 나는 밤마다 빨래를 했다. 선배들의 옷가지를 허리가 휘도록 빨았다. 그런데 유독 김화자만 나에게 빨랫감을 맡기지 않았다. 나는 서운했다. 진심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회만 노렸다. 하루는 김화자가 ‘칙간’에 간 사이에 그의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빨랫거리가 담긴 보자기를 안고 얼른 나왔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게 나왔다. 무명천에 검은 피가 묻어 있었다. 한 개도 아니고 두 개였다. ‘김화자가 언제 다친 적이 있었던가?’ 나는 걱정이 앞섰다. 그때 김화자가 나타났다. “무슨 짓이에요! 이게.”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빨래해 드리려고요.” 너무 화가 난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누, 누, 누가 배씨더러 빨래를 하랬어요?” 그는 따귀라도 갈길 듯이 다가오더니 빨래 보자기를 낚아챘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무명천은 여자의 생리대였다. 어릴 적에 일본으로 건너가 형과 둘이서만 지냈던 내겐 너무나 생소한 물건이었다. 죽을 죄를 지었구나 싶었다.

연예활동 60년 동안 각종 상을 많이 받았다. 그 가운데 잊지 못할 상패가 두 개 있다. 하나는 2001년 ‘MBC 명예의전당 코미디언 부문’에 오른 것이다. ‘웃으면 복이 와요’를 통해 코미디를 시작했고, TBC와 납치극 소동을 벌인 후 줄곧 MBC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내겐 더욱 뜻깊은 상이었다. 다른 하나는 2003년 9월 서울 여의도 KBS 공개홀에서 받은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문화훈장 대상’이다.

옛날 코미디가 묵은 김치라면 요즘 개그는 햄버거지. 요즘 개그맨들이 순발력은 뛰어난데 억지로 웃기려고 해. 장난기랄까? 그런 식으로는 가슴에서 우러나는 웃음을 끌어낼 수 없어요.

올해로 내 나이 여든이다. 어머니의 염낭을 털어 배우의 길로 접어든 지 꼭 60년이 되는 해다. ‘코미디 황제’라는 과분한 호칭까지 얻으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유랑극단의 꽁무니를 쫓아 트럭 짐칸에 올라탔을 때의 심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땐 배우 생활이 어떤 건지, 배우의 길이 어떤 건지를 전혀 몰랐다. 그저 무대가 좋아 모든 걸 던지고 걸었을 뿐이었다. 이제 ‘그게 배삼룡의 힘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오직 무대만 바라보는 것, 그게 바로 열정이었고 사랑이었다.

요즘 후배들에게 우리가 입었던 옷을 입으라고 하면 입겠어? 이제 우리 스타일의 코미디 전통은 끊어졌지. 요즘 개그가 인기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주겠어. 예전 코미디 관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는데 요즘엔 10대들을 대상으로한 개그뿐이야. 우리는 팬들이 평생동안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니 그게 기쁨이지

요즘에도 우리는 일이 있든 없든 한달에 보름은 만나지. 나는 경기도 퇴촌에,이 친구는 서울에 사는데 거의 내가 찾아가지.

의욕만 갖고 섣부르게 진행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되죠.

이 나이에 무대에 나서는 이유는 요즘 코미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이번엔 욕심이 하나 있어요. ‘배삼룡에게 저런 면도 있었구나 하는 연기를 하려고 해요. 배삼룡이가 살아있구나 하는 걸 보여드리고 싶은데, 잘 될지….

이전 세대에겐 기다림이란 게 있었어. 무대에 서서 대사 한 마디 뱉으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 선배들의 엄청난 빨랫감을 처리하는 등 ‘수련기간’을 거쳐야 무대에 설 수 있었으니까.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었어.

진짜 바보는 바보연기를 못해. 천재가 바보흉내를 낼 수 있는거지. 난 영원히 팬들에게 바보로 남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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