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단거리패 후배들에게 금품 요구 협박받아
임사라 변호사 글 전문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변호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나라에 ‘성폭력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가 생겼습니다. 관할 기관이 검찰청이라는 것 외에는 담당자도, 보수도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을 때였지만 기꺼이 신청하고 첫 성폭력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되었죠.
대전에 변호사 수가 500명이 돼가는 상황에서, 신청자는 20명. 그중에서도 여자변호사는 4명이어서 2년 동안 대전 지역 성범죄 사건의 3분의 1 이상이 제 손을 거쳐 갔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 달에 50건 이상 사건을 했지만, 정작 저를 지치게 만든 건 업무량이 아닌 피해자가 아닌 피해자들이었습니다.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목소리, 말투만 들어도 이건 소위 꽃뱀이구나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로 촉이 생기더군요.
변호사를 그만두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들어온 지 이제 두 달이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표가 됐단 소식이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큰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곽도원 배우 허위 미투. 스티브 잡스가 ‘connecting the dots’란 말을 했었죠. 점처럼 찍어왔던 무관한 경험들이 하나의 선이 되었다는.. 홍보회사 출신, 변호사, 성폭력 전담 업무.. 이 경험들이 다행히 하나의 선을 이루어 해프닝을 해프닝으로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제 곽배우가 연희단거리패 후배들(이윤택 고소인단 중 4명)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힘들다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선배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돕고 싶었습니다. 어젯밤 만나기로 약속했고 약속장소에 나갔는데, 변호사인 제가 그 자리에 함께 나왔단 사실만으로도 심하게 불쾌감을 표하더군요.
그 분들 입에서 나온 말들은 참 당혹스러웠습니다. 곽도원이 연희단 출신 중에 제일 잘 나가지 않냐, 다 같이 살아야지, 우리가 살려줄게(???!!!!!)
안타깝게도… 촉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배우의 마음을 알기에, 저는 이 자리에 있는 4명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17명 피해자 전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스토리펀딩을 해보는 건 어떠냐, 그럼 거기에 우리가 나서서 적극 기부를 하겠다, 스토리펀딩이 부담스러우면 변호인단에 후원금을 전달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요.
우리가 돈이 없어서 그러는 줄 아냐면서 싫다고 버럭 화를 내더군요. 그 후,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배우에게 피해자 17명 중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건 우리 넷뿐이니 우리한테만 돈을 주면 된다. 알려주는 계좌로 돈을 보내라. 고 했다더군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여러 차례 전화와 문자가 왔습니다. 불쾌했다 사과해라.. 뿐만 아니라 형법상 공갈죄에 해당할법한 협박성 발언들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너도 우리 말 한마디면 끝나’라는 식이죠. 이런 협박은 먹힐 리가 없습니다. 뭔가 걸리는 일이 있었다면, 여기에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그들 말대로 돈으로 입부터 막아야 했을 테니까요. 같은 여자로서 너무나 부끄러웠고, 마음을 다친 내 배우와 다른 피해자들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분들을 만나고 나서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언론에 제보를 할까, 공갈죄로 형사고소를 할까, 우리 배우가 다시 이러한 일로 언급되는 게 맞는 일일까. 무엇보다도 나머지 피해자들의 용기가, 미투 운동이 퇴색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곽도원 배우에 대한 허위 미투 사건 이후,
상처는 남았습니다. 출연하기로 했던 프로그램이 취소되기도 했고 영화 촬영 일정도 한 달 이상 미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위 글을 올린 사람을 고소하지 않은 것은,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with you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 제보나 형사 고소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러한 행동을 지속한다면 자신을 헌신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던 분들의 노력까지 모두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변화에는 진통이 수반됩니다. 저는 미투 운동으로 우리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제가 겪은 혐오스럽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변화에 따른 일종의 진통과도 같은 것이겠지요.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미투 운동의 흥분에 사로잡힌 것 같습니다. 미투 운동이 남자 vs. 여자의 적대적 투쟁이 되어버렸죠. 이번 일을 보면, 미투 운동은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에 이용당하고 성을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것을 또다시 이용하는…
저는 미투 운동이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사회 전체가 조화롭게 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중앙일보] 곽도원 소속사 대표 “연희단거리패 후배들에게 금품 요구 협박받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투의 본질을 잊도록 만드는 사람들. 처벌 받아 마땅하지만 곽도원님 대인배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