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모음

 

사랑의 우화

                                                      이 정 하

내 사랑은 소나기였으나
당신의 사랑은 가랑비였습니다.
내 사랑은 폭풍이었으나
당신의 사랑은 산들바람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었지요.
한때의 소나긴 피하면 되나
가랑비는 피할 수 없음을.
한때의 폭풍이야 비켜가면 그뿐
산들바람은 비켜갈 수 없음을.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에

                                           서 정 윤

   사랑한다는 말로도
다 전할 수 없는
내 마음을
이렇게 노을에다 그립니다.

   사랑의 고통이 아무리 클지라도

결국 사랑할 수 밖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삶이기에
내 몸과 마음을 태워
이 저녁 밝혀드립니다.

   다시 하나가 되는 게
그다지 두려울지라도
목숨 붙어 있는 지금은
그대에게 내 사랑
전하고 싶어요.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에
익숙하지 못하기에
붉은 노을 한 편에 적어
그대의 창에 보냅니다.

사랑은 어떻게

                                 릴케

  한데 사랑은 어떻게 그대를 찾아왔던가?
빛나는 태양처럼 찾아왔던가, 아니면
가을 낙엽처럼 찾아왔던가?
아니면 하나의 기도처럼 찾아왔던가? – 이야기를 들려다오

  반짝이는 하나의 행복이 하늘에서 풀려나와
날개를 접고 마냥 흔들리며
꽃 피어오르는 내 영혼에 커다랗게 걸려 있었더니라……

사랑의 비유법

                                      서정윤

   사랑한다는 말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같다.

   목숨을 걸고
달려가던 그리움이
자꾸만 나무를 흔들고
눈물이 별이 되어 달리는
하늘 아래
사랑으로 살아지지 않는
삶이 있다.

   진정으로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만이
아직도 목숨을 지키고
가슴 아득한 곳에 켜있는
촛불의 그림자만 떨리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얘기와
사랑한다는 얘기는
결국 같다.

사랑의 노래

                                             헤르만 헷세

        나는 사슴이고 당신은 노루,
당신은 작은 새, 나는 수목,
당신은 태양이고 나는 눈,
당신은 대낮이며 나는 꿈,

        한밤에 잠든 나의 입에서
황금새가 당신에게 날아갑니다.
티없이 맑은 소리, 아름다운 깃.
새는 당신에게 노래합니다.
사랑의 노래를, 나의 노래를.

장미의 연가

박 렬

너무도 사랑했기에
향기로운 독백만 진동시키다.
사모함이 넘쳐 그 질투심에
가슴 깊이 가시가 자라나더니
제 홀로 붉어지다,
그 뜨거운 열정으로 하여
내 사랑이 꽃잎으로 져 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정 하

새를 사랑한다는 것은
새장을 마련해
그 새를 붙들어놓겠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 높이 훨훨 날려보내겠다는 뜻이다.

사랑은

                                   신 달 자

    사랑은
나의 결점

    도시
숨기지를 못한다

    사랑은
나의 패배

    한번도
완성되는 법이 없다

    사랑은
나의 악습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해

                                           원태연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을 년
미친 개한테 주둥아리 물릴 년
달리는 차바퀴에서 튕겨나온
돌에 맞아 죽을 년
발바닥을 바늘로
죽을 때 까지 찔러도 시원챦을 년
아무리 심한 욕을 하고
죽일 년 살릴 년 해 보아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나 / 쁜 / 년

사랑

                                                정호승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부르는 노래

     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 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나무와의 사랑
— 증오에서 사랑까지

                                             이승욱

    그를 미워하다가,
사람도 아닌 그를 半信半疑하다가,
어쩌다 그 그늘에 몸 누인 것이 그만 사랑한 것이 되었다.
아예 미워하지 않았어야 했을걸.
그래서 사랑하지도 않았어야 했을걸.
괜히 미워한 것이 사랑한 것이 되었다.

    사랑한 이후로, 나무는 자꾸 가랑잎을 떨군다.
노란 잎, 붉은 잎, 연분홍 잎 자장가를 흩어 나를 달랜다.
얌전한 친구야, 나를 위해 내 뿌리 곁에 썩어다오.
나무는 방뇨를 하듯, 제 구슬픈 피륙을 뜯어 나를 애무한다.

그래, 그래,
숨차게 무서리지는 바람소리 들으며,
나는 벌써 사람의 말을 다 잊어버린다.
그의 숨쉬는 뿌리 곁에 짙은 두엄냄새를 푼다.

    (아아, 두고 온 땅. 썩은 몸 다시 살려 돌아가고픈 곳.
그 곳에 모질게 살아, 잠시나마 지겹도록 사람이었던 한 때,
사람은 또 얼마나 구역질나는 惡臭였더냐!)

사랑

                                            김지하

          누굴 보듬어 안을 만큼

          팔이 길었으면 좋겠는데

          팔이 몸통 속에 숨어서

          나오기를 꺼리니

          손짓도 갈고리마저 없이

          견디는 날들은 끝도 없는데

          매사에 다 끝이 있다 하니

          기다려 볼 수밖에

          한 달 짧으면

          한 달 길다 했으니

          웃을 수밖에

          커다랗게 웃어

          몸살로라도 다가가

          팔 내밀어 보듬어 볼 수밖에.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첫사랑

                                              류시화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남자의 사랑이란…

                                                  성지희

지나가는 여자 어떻게 생겼는지 아니 방금 지나쳤는지조차
모르겠는데 갑자기 눈 흘기며 입 삐쭉 내미는 그녀에게
영문도 모른체 사과하는 것.

전화벨 소리 울리면 사랑스러운 그녀가 아닐까하며
기대하지만 그 꿈이 깨어지기도 전에 또 기다리는 것.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는데 못 들었는지 무슨말했어? 하는
그녀에게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은 것.

우리집 가는 버스를 그녀가 못본게 너무 다행이라 여기고
그녀 집 가는 버스 오면 내가 먼저 타는 것.

매번 그녀의 집 앞에서 입맞춤을 해주고 싶은데

그녀가 화를 내면 어쩌나라는 생각 때문에 자꾸 머뭇머뭇하게 되는 것.

아침부터 화가 나 있는 그녀를 보며
내가 뭐 실수한게 아닌가 마음 졸이는 것.

그녀가 화를 내면 모두 내 잘못이고
내가 화를 내면 내 마음이 옹졸한 것.

어느 날 지겹다는 말을 내뱉는 그녀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수백번 수천번 다짐하게 되는 것.

나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 웃음이 나오는데
갑자기 그녀가 화를 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것.

이쁜것만 봐도 모두 사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그 마음의 백분의 일도 안되는 작은 선물에도 감격하는
그녀가 내곁에 있다는 것이 무지 감사한 것.

여자의 사랑이란

                                                         성지희

지나가는 여자 그냥 스쳐 지나가는데 뭘 보냐며
괜히 입 삐쭉 내미는 것.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 할까 말까 하다가
동전만 팽개치고 자존심 때문에 그냥 지나쳐 가는 것.

사랑한다 말하는 그 앞에서 무슨 말인지 잘 못알아 들었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한번 더 얘기하게 만드는 것.

상대방 집 가는 버스 오면 괜히 못 본 척 해서 못가게 하고
우리 집 가는 버스 오면 왔다! 하며 같이 따라 타게 만드는 것.

집 앞에서 머뭇거리는 그에게 이제 가라고 말로만
성화 부리고 속은 바짝 긴장해서 다음 행동 기다리는 것.

오늘은 사랑한다는 말을 해보리라고 아침부터 잔뜩 벼르지만

막상 만나면 밤이 될때까지 입만 삐쭉삐쭉 하다
그냥 집에 가는 것.

내가 화를 내면 그가 전화를 해서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고
그가 화나면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것.

하루종일 보고 싶었는데도 그를 만나게 되면 엉뚱하게
지겹다는 듯이 말을 하게 되는 것.

우울해서 아무말 하고 싶지 않은데 뭐가 그리 좋은지
종일 하하 웃어대는 그에게 우린 성격차이가 있다며
그를 황당하게 만드는 것.

사랑한다 제대로 표현 못하는 바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내미는
작은 선물에 고맙다는 말대신 그냥 펑펑 우는 것.

밥과 잠과 그리고 사랑

                                                  김 승 희

   오늘도 밥을 먹었습니다.
빈곤한 밥상이긴 하지만
하루 세 끼를.
오늘도 잠을 잤습니다.
지렁이처럼 게으른
하루 온종일의 잠을,
그리고 사랑도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식은 숭늉처럼 미지근해져 버린
그런 서운한
사랑을.

   인생이
삶이
사랑이
이렇게 서운하게 달아나는 것이
못내 쓸쓸해져서
치약 튜브를 마지막까지 힘껏 짜서
이빨을 닦아 보고
그리고 목욕탕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봅니다.
자신이 가을처럼 느껴집니다.

   참을 수 없이 허전한
가을 사랑
하나로.

그래도 우리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영원의 색인을 찾듯이
사랑하는 사람 그 마음의 제목을 찾아
절망의 목차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아야

따름이
아닌가요.

우울한 샹송

                                            신석필

     우체국에 가면
잃어  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원 태 연

  인간이 얼마만큼의 눈물을 흘려낼 수 있는지 알려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사진을 보지 않고도 그 순간 그 표정 모두를 떠올리게 해주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비오는 수요일 저녁, 비오는 수요일에는
별 추억이 없었는데도 장미 한다발에 눈여겨지게 하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멀쩡히 잘 살고 있던 사람 멀쩡한데도 잘 못살게 하고 있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신이 잠을 자라고 만드신 밤을 꼬박 뜬 눈으로 보내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강아지도 아닌데 그 냄새 그리워 먼 산 바라보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우연히 들려오는 노래가사 한 구절 때문에

  중요한 약속 망쳐버리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껌 종이에 쓰여진 혈액형 이성관계까지 눈여겨지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스포츠 신문 오늘의 운세에 애정운이 좋다 하면
하루종일 호출기에 신경 쓰이게 만드는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썩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던 내 이름을 참 따뜻하게 불러주었던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날 그 순간의 징크스로 사람 반병신 만들어 놓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담배연기는 먹어버리는 순간 소화가 돼
아무리 태워도 배가 부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목선이 아름다우면 아무리 싸구려 목걸이를 걸어주어도
눈이 부시게 보인다는 걸 알려준
한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 여자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지는

  그저 모든 이유를 떠나
내 이름 참으로 따뜻하게 불러주었던
한 여자를 사랑하다 가겠습니다.

사랑하는 까닭

                                한 용 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사랑의 진리

                                                 원태연

만날 인연이 있는 사람은
지하철에서 지나쳐도
거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헤어져야 할 인연인 사람은
길목을 지키고 서 있어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이런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번 엇갈린 골목에서
지키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또,사랑의 진리이기도 하다.

사랑을 이유로 사랑해 주세요.

                                                 E.브라우닝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오직 사랑을 이유로 사랑해주세요.
“난 그대 웃음에, 미소에, 사냥한 말에 반해,
그대만의 사고방식이 나와 잘 어울리고
언젠가 기쁨을 주었기에 그댈 사랑해” 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대여… 이런 것들은 스스로 변하거나
당신의 마음에 달리 투영될 수도 있어요.
그렇게 맺은 사랑는 또 그렇게 풀릴지 몰라요.
저를 사랑하지 마세요.
저에 눈물을 닦아주는 애정어린 연민 때문에
그대의 위안을 오해 받았던 사람은 웃기를 잊어
그대의 사랑을 잃을 수도 있으니깐요.
세세에 사랑의 영원을 통해 사랑할 수 있도록
오직 사랑을 이유로 사랑해 주세요.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뿐

                                                          황지우

          내가 먼저 待接받기를 바라지 않았어 !  그러나

          하루라도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다시 이쪽을 바라보기 위해

          나를 對岸으로 데려가려 하는

          환장하는 내 바바리 돛폭.

          만약 내가 없다면

          이 강을 나는 건널 수 있으리.

          나를 없애는 방법,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 뿐 !

          사랑하니까

          네 앞에서

          나는 없다.

          작두날 위에 나를 무중력으로 세우는

그 힘.

짜라투스트라의 사랑

                                               김 영 현

내 일찍이
한 사람의 철학도였을 때
이 세상 너머에 절대적인 무엇이 있어
(혹은 있을 것만 같아)
나를 유혹하였다네

나의 존재 그곳으로 향해
부나비처럼 날아갔다네
청춘의 아픔, 불면으로 가슴을 태웠다네

절대적이며 또한
객관적인 진리를 찾아
사사로운 삶을 넘어서
이러저러한 우연적인 일들과
이어저러한 농담과 객기를 넘어서

마치 짜라투스라가 태양을 향해 걸어가듯이
허무의 중심에
도사리고 있을 불멸의 의미를 찾아
걸어갔다네, 마치 되돌아볼 줄 모르는 아이처럼.

세상의 사랑 나를 유혹하였네
세상의 일들 나에게 오라 손짓하였네

하지만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덫처럼 나는
다소 오만하게
다소 거만하게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일회적인 역사의 행진 그너머에 있는
어쩌지 못할 운명의 그림자
바라보았네,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오, 나의 영혼이여
영원불멸 꿈꾸지 말고
가능의 세계 다 소진하라

일찍이 핀다로스는 그렇게 말했다지

신의 얼굴 바라보는 것
슬픔뿐인지도 몰라
인생은 그저
봄이면 피고
가을이면 시드는
풀잎 같은 것일지도 몰라

그러나 절대적인 것 또한
유혹적이었네, 이브를 꾄 뱀의 눈처럼
어쩔 수 없는,
이룰 수 없는 슬픈 사랑처럼.

사랑의 말

김 남 조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해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 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버리고
그 벌이 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 번 쏟아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사랑한다

                                                      정호승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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