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편지

가을편지

1

그 푸른 하늘에

당신을 향해 쓰고 싶은 말들이

오늘은 단풍잎으로 타버립니다

밤새 산을 넘은 바람이

손짓을 하면

나도 잘 익은 과일로

떨어지고 싶습니다

당신 손 안에

2

호수에 하늘이 뜨면

흐르는 더운 피로

유서처럼 간절한 시를 씁니다

당신의 크신 손이

우주에 불을 놓아

타는 단풍잎

흰 무명옷의 슬픔들을

다림질하는 가을

은총의 베틀 앞에

긴 밤을 밝히며

결 고운 사랑을 짜겠습니다

3

세월이 흐를수록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옛적부터 타던 사랑

오늘은 빨갛게 익어

터질 듯한 감홍시

참 고마운 아픔이여

4

이름 없이 떠난 이들의

이름 없는 꿈들이

들국화로 피어난 가을 무덤 가

흙의 향기에 취해

가만히 눈을 감는 가을

이름 없이 행복한 당신의 내가

가난하게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입니까

5

감사합니다, 당신이여

호수에 가득 하늘이 차듯

가을엔 새파란 바람이고 싶음을

휘파람 부는 바람이고 싶음을

감사합니다

6

당신 한 분 뵈옵기 위해

수없는 이별을 고하며 걸어온 길

가을은 언제나

이별을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이별의 창을 또 하나 열면

가까운 당신

7

가을에 혼자서 바치는

낙엽빛 기도

삶의 전부를 은총이게 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의 매일을

기쁨의 은방울로 쩔렁이는 당신

당신을 꼭 만나고 싶습니다

8

가을엔 들꽃이고 싶습니다.

말로는 다 못할 사랑에

몸을 떠는 꽃

빈 마음 가득히 하늘을 채워

이웃과 나누면 기도가 되는

숨어서도 웃음 잃지 않는

파란 들꽃이고 싶습니다

9

유리처럼 잘 닦인 마음밖엔

가진 게 없습니다

이 가을엔 내가

당신을 위해 부서진

진주빛 눈물

당신의 이름 하나 가슴에 꽂고

전부를 드리겠다 약속했습니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잡기 어려운 이여

나는 이제 당신 앞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

이끼 낀 바위처럼

정답고 든든한 나의 사랑이여

당신 이름이 묻어 오는 가을 기슭엔

수 만 개의 흰 국화가 떨고 있습니다

화려한 슬픔의 꽃술을 달고

하나의 꽃으로 내가 흔들립니다

당신을 위하여

소리없이 소리없이

피었다 지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