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늦깎이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 때문에 고통은 깊어갑니다.

이별이 온 뒤에야 사랑을 알고 사랑하면서 외로움은 깊어갑니다.

죽음을 겪은 뒤 삶의 뜻 알 것 같아 고개 드니 죽음이 성큼 다가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짧은 동안

잃지 않고 얻는 것은 없으며 최후엔 또 그것마저 버리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였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 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