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식 어록

1집이 가수로서 음반을 내고 데뷔하는데 의미를 뒀다면, 2집은 한명의 가수로서 이제 자신의 음악을 펼쳐간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무척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음반은 그때까지도 별반 방송에는 관심이 없었던 내가 가장 선호하는 팬과 만날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앞으로도 나는 가수일 것이다. 가수는 가장 확실한 나의 미래다. 지금까지의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유형의 가수였다면 앞으로 또한 나는 내가 원하는 나의 유형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거기서 언제나 나의 전제는 사랑이 될 것이다.

구속기간동안 나는 내 삶과 나의 음악에 관해서 생각했다. 사촌형의 어깨너머로 기타를 배울 때부터 드디어 인기를 얻은 가수가 되고 지금 이렇게 되기까지 세월은 그 시간만큼의 고통과 기쁨과 함께 참 많이도 흘러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나간다면 맑은 노래를 부르는 건강한 가수가 되고 싶었다.

나는 나를 용서한 팬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불렀고 그들은 박수로서 다시 나의 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어느 사람의 말도 있듯이 나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거기에 맞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원해서 만든 가정을 유지해야 할 신성한 의무였다. 하지만 가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만들고 열심히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나는 서울촌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나는 나를 놀리는 거의 모든 녀석들을 방과 후에 때려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독기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소문을 이길 방법은 특별하게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방송에 나가 나는 건강하노라고 외치고 다닐수도 없고 그렇다고 오는 전화마다 일일이 소리칠 수도 없었다. 조용히 침묵하는 길뿐이었다. 사실 그 소문이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친 것은 별로 없지 않은가. 조용히 음악을 만들고 침묵하는 길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고집이 세고 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국민학교 입학식날 내가 없어져 찾아보니 상급생들 여러명과 학교 뒤에서 싸우고 있었다는 얘기는 집안끼리 모이면 아직도 단골로 등장하는 화제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노래부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나도 나이가 들어 머리가 허옇게 세고 삶의 마지막에 다다른다면 나도 저렇게 미친듯이 노래부르다 무대 위에서 쓰러지고 싶었다.

좋은 세상, 좋은 음악, 좋은 사랑..내가 바라고 절실히 원하는 것이다. 지금가지 세 장의 앨범을 냈다.네 번째 앨범에서 나의 모든 음악생활의 전부를 보이려고 노력했다. 밝은 마음으로, 깊은 사랑으로 기대해 주기 바란다.

중학교때 나는 처음으로 기타와 만났다. 나무통에 쇠줄을 붙인 단순한 악기가 아닌 지금까지 내 삶의 전부가 된 ‘살아있는 음악’과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만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출연료도 없이 지배인 기분에 따라 차비 몇 푼씩 받는게 고작이였지만 매일 무대에 올라 노래부르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이다.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는 통일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싶다. 아이에서부터 백발이 정정한 할아버지까지 누구나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그런 노래를 하나 만들어 부르고 싶다. 마치 지금 누구나가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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