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시모음

가을산

활딱 벗고 빨래했구나
저 산골자구니
오늘밤 감기 들어
동침하고 싶어라

강변의 추억

가는 봄같이 가는 봄같이
누이는 바람 강 건너듯
시집가고
강가까지 따라 나와
강물에 발을 적시며
손을 흔드는
노랑 풀꽃

큰 누이 작은 누이

그리움

오늘밤 달이 높이 뜨고
올 들어 처음 소쩍새가 웁니다
이 산 저 산에서
이 산 저 산 하며 웁니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아련하여
멍멍한 귀를 닦습니다
달빛이 싫으면
문 닫고 돌아누우면 되지만
엎딘 가슴 여기저기 귀 묻어도
이제 소용없음을 압니다
먼 데서 가만가만 소짝소짝 울어도
그리움은 벅차 올라
산처럼 넘어져 와 나를 덮을 것임을 나는 압니다

오늘 밤 달이 높이 뜨고
올 들어 처음 소쩍새가 웁니다
올 봄 또 어찌 다 견디어 낼까요

노을

해가 저물었다
가문 강변에 풀꽃들이
불 쬐듯 모여들어 숯불처럼 서로 살려낸다

강물에 발을 씻고 맨발로 야윈 풀밭을 걸으면
이슬 없는 풀잎들, 발바닥이 뜨겁다
풀잎 뒤에 숨은 어둠 서늘하고 뼈가 걸리고 밟힌다
밟히어 찌르고
피없이 끊기고 갈갈이 찢긴다

노란 초가집

하늘은 청명합니다
고샅길을 걷습니다
울 너머 핀 개나리꽃를 보며
움막이라도, 내 집 한 칸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기둥을 세워 받치고
한 기둥은 닿지 않습니다

짓지 못한 노란 초가집이 천천히 허물어지는 슬픔,
다시 걷습니다

밤비

죽은 여자가 울고 있다
저녁 내내 내리는 비
내 등에 홈을 파며

내일 저물 때
황톳물 붉게 흐르는 강에 가서 보라
큰 산그늘이
강에 떠 있으리라

봄잠

요즈음
외로움이 잘 안 됩니다
맑은 날도 뽀얀 안개가 서리고
외로움이 안 되는 반동으로
반동분자가 됩니다

외로움의 집 문을 닫아두고
나는 꽃 같은 봄잠을 한 이틀쯤

쓰러진 대로 곤히 자고 싶습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슬픔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시인학교 졸업식

굶자
어제는 탈탈 굶고
오늘은 배고프다
죄짓고 싶은 마음도 어디에 쑤셔박고
머리 부벼 우는 날
외롭다 외로움이 안 되어 외롭다

굶자
배고픔도 배고픔으로 때우고
이 악물면 대낮에도 별이 뜬다
고흐의 그림도 흑백으로 죽여 보고
좀 괴롭자
흐린 날들이다
굶자
청청하게 굶자

외딴집,
외딴집이라고
왼손으로 쓰고
바른손으로 고쳤다

뒤뚱거리며 가는 가는 어깨를 가뒀다

불 하나 끄고
불 하나 달았다

가물가물 눈이 내렸다

편지

오늘밤 유난히 달이 높이 떴구나
갈아놓은 텃논 흙더미에
달빛이 번득이고
봄이야 봄처럼 왔건만
봄에도 기다리는 봄을 너는 아느냐
모래바람으로 머리 아프게
봄바람은 날마다 분다

누이야
고압선 전깃줄에 걸려
까맣게 금간 달을 보며
봄밤에도 봄을 기다리다
나는 얼굴이 까맣게 타서 돌아온다

초가 일기

하늘 아래 집을 이었습니다
병아리를 내리고
한 귀퉁이 담을 허물었습니다
남향부터 복사꽃이 피고
그늘 없는 냉수를 마셨습니다

초가집

제 그림자를 잡고 앉아 있는 여자
시꺼멓게 그을려 있다

풀꽃들이 저물어
낮은 처마 밑으로
찾아들고 있다

흔적

어젯밤엔 그대 창문 앞까지 갔었네
불 밖에서 그대 불빛 속으로
한없이 뛰어들던 눈송이 송이
기다림 없이 문득 불이 꺼질 때
어디론가 휘몰려 가던 눈들

그대 눈 그친 아침에 보게 되리
불빛 없는 들판을
홀로 걸어간 한 사내의 발자국과
어둠을 익히며
한참을 아득히 서 있던
더 깊고
더 춥던 흔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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