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12
-아버님의 마을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논바닥 길바닥에 깔린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닭이 우는구나.
우리가 여기 나서 여기 사는 것
무엇무엇 때문도 아니구나.
시절이 바뀔 때마다
큰소리 떵떵 치던
면장도 지서장도 중대장도 교장도 조합장도 평통위
원도
별것이 아니구나.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동경도 서울도 또 어디도
시도 철학도 길가에 개똥이구나.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를 깁더라.
두런두런 오손도손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아버님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더라.
그이들의 눈빛, 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들은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토착화되지 않을
이 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하며
나는 헐은 토방에 서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지 않는구나.
목이 메이는구나.
네가 살던 집터에서
네가 살던 집터에 메밀꽃이 피고
달이 둥실 떴구나.
저렇게 달이 뜨고
이렇게 네가 보고 싶을 때
나는 너의 희미한 봉창을 두드리곤 했었다.
우리는 싱싱한 배추밭머리를 돌아
달빛이 저렇게 떨어지는 강물을 따라서 걷곤 했었지.
우리가 가는 데로 하얗게 비워지는 길을 걸어
달도 올려다보고 땅도 내려다보며
물소리를 따라
우리는 어디만큼 갔다가는 돌아오곤 했었지.
물기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이마를 마주대고
오불오불 꽃동네를 이룬 하얀 가을 풀꽃들
이슬을 머금어 촉촉하게 반짝여
가슴 서늘하게 개던 풀꽃들을 바라보는
달빛 비낀 네 옆얼굴은 왜 그다지도
애잔스러워 보였었는지.
앞산 뒷산이 훤하게 드러나고
우리 가슴속에 잔물결이
황홀하게 일어 돌아오는 길
우리는 동구 앞 정자나무 아래
우리 그림자를 숨기고
소쩍새 울음소리를 아득하게
때론 가까이
우리들 어디에다 새겨 듣곤 했었지.
그때 그 두근대던 너의 고동소리가
지금도 내 가슴에 선명하게 살아나는구나.
네가 네 집 마당
달빛을 소리없이 밟고 지나
네 방문 여닫는 소리가 가만히 들리고
불이 꺼지면
내 방 달빛은 문득 환해지고
나는 달빛 가득 든 내 방에 누워
먼데서 우는 소쩍새 소리와
잦아지는 물소리를 따라가며
왜 그리도 세상이 편안하고 아늑했는지 몰라.
눈을 감아도 선연하구나.
네가 꼭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은 철석같은 믿음이 되어
네가 곧 나타날 것 같아
나는 숨을 죽이며
온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은 모두 열리고
나는 세상의 온갖 소리들이 들리었었지.
그럴 때마다 너는 발소리를 죽여 와서
(나는 그때마다 네가 아무리 발소리를 죽여 와도
온갖 이 세상의 소리 속에서도
네 발소리를 가려 들었었지)
내 봉창을 가만히 두드리던
아득한 그 두드림 소리가
메밀꽃밭 속에서 금방이라도
들릴 것 같아
숨이 멈춰지는구나.
너는 가만히 문을 열고
떡이나 감홍시, 알밤이나 고구마를 들이밀곤 했지.
아, 그때 동백기름 바른 네 까만 머릿결 속에
가락 같은 가르맛길이 한없이 넓어지고
가르마 너머 두리둥실 떠오르던 달과
동정깃같이 하얗게 웃던 네 모습이
지금도 잡힐 듯 두 손이 가는구나.
생각하면 끝도 갓도 없겠다.
강 건너 나뭇짐을 받쳐놓고
고샅길을 바라보면
총총걸음하는 네 물동이 속 남실거리는 물에
저녁놀이 반짝일 때
나는 내 이마가 따가운 것 같아
이마를 문지르곤 했었다.
어쩌다 사람들이 있을 때
어쩌다 고샅길에서 마주칠 때
너는 얼른 뒤안으로 달아나거나
두 눈을 내리깔고 비켜서곤 했었지.
네 그 치렁치렁한 머리채와
빨간 댕기.
오늘밤도 저렇게 달이 뜨고
네가 살던 집터는 이렇게 빈터가 되어
메밀꽃이 네 무명적삼처럼 하얀한데
올려다보는 달은 이제 남 같고
물소리는 너처럼
저 물굽이로 돌아가는데,
살 사람이 없어
동네가 비겠다고
논밭들이 묵겠다고
부엉부엉 부엉새가
부엉부엉
저렇게도 울어대는 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