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은 맛있는 음식이야. 한국인이면 당연히 맛있다고 생각해야 해. 외국인들도 한국 치킨 먹는대잖아, 대한민국 치킨을.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해.” 그러니 치킨은 보수이다.
지금 전반적으로 기름을 덜 먹어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봐서는 기름을 적게 먹는 게 좋겠죠. 꼭 기름을 먹겠다고 하면 이렇게 드시면 좋습니다. 소기름은 정육점에 가면 거의 공짜거든요.
한국인이 먹는 떡볶이는 그 조리법으로 보자면 떡볶이가 아니다. 떡을 고추장에 조리거나 냄비에 만두, 어묵, 양배추, 당면 등등과 함께 넣고 끓인다. 떡조림 또는 떡탕이다.
다른 사람이 음식을 멋는 것은 빤히 쳐다보지 않는 게 인간끼리의 예의다. 밥 먹는 행위 자체가 성 행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원래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쾌락이 성적으로 느끼는 쾌락과 비슷하다. 음식을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민망한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TV를 통해서는 이 ‘빤히 쳐다보는 것’이 가능하다. 음식 먹는 사람을 TV를 통해 보는 것으로 쾌락을 느끼는 게 푸드 포르노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추와 깻잎에 쌈장을 바르고 풋고추와 마늘 올린 쌈에 그 무엇이 들어가든 한국인의 입에는 맛있다. 그 안의 재료가 무엇이든 맛의 포인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삼겹살이 아니라 이 쌈이다. 한국인은 쇠고기 등심구이, 소불고기, 돼지갈비, 제육볶음, 오리구이, 닭갈비, 꼼장어구이, 민물장어구이, 과메기, 캔참치, 샘멸치조림, 꽁치조림, 광어회, 우럭회, 가자미회.. 심지어 밥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쌈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한국은 노동자의 나라이다. 며칠 사이에 갑자기, 한국 노동자가 어떤 음식을 먹고 있는지 각자가 그 낱낱을 드러내보이며 여러 궁리의 말들을 하고 있다. 모두 백종원 덕이다. 고맙다.
인간이란 동물은 남자가 보육하도록 만들지 않았어요. 동물이 진화해온 수천, 수억 년의 역사를 우린 뒤집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지금 한국 사회의 복지 목표를 보면 아이를 떼어내 엄마가 일하는 동안 국가가 보육해주는 것으로 잡고 있어요. 난 이게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인간의 본능에 가장 가깝게 복지를 만들어줘야 하는 거죠. 여자가 아이를 적어도 일곱 살까지는 보육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걸 국가 복지의 최고 목표로 잡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음식은 정치와 절대 무관하지 않아요.
한국 천일염도 세계 명품이 될 수 있다면서 MB(이명박) 정부가 거론했던 게 프랑스 게랑드 소금이다. 하지만 둘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게랑드는 천년 이상 천일염을 생산한 지역이다. 문화 상품이란 얘기다. 제조 방법도 다르다. 우리처럼 비닐장판 깔아놓고 바닥을 긁지 않는다. 서해가 깨끗하기나 한가. 국내 대표적 천일염 생산지가 전남 신안인데 내 생각엔 경상도 정부가 면밀한 조사 없이 무식한 몇몇의 말만 듣고 시혜성 결정을 내린 것 같다. 하지만 더 나쁜 건 불이익이 두려워 침묵하거나 정권에 영합하는 학자들이다. 책임 묻겠다.
MSG가 건강을 해친다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이영돈 PD의 판정 놀이에 이 같은 허점이 지적되자 말을 슬쩍 바꾸었다. 질 낮은 재료에 MSG를 넣기만 하면 맛있어지니 원가를 줄이기 위해 이를 사용하고, 그래서 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리는 있으나 MSG 효과를 여타 조미료의 효과와 비교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왜곡하였다….(중략)….MSG는, 정확하게 글루탐산은, 감칠맛이 나지 않는다. 감각언어로는 ‘밍밍한 맛’이 맞는다. 닝닝한 맛의 글루탐산이 하는 역할은 짜고 달고 시고 쓴맛들의 뾰족한 부분을 깎고 눌러 융합되게 하는 정도이다. 집착할 맛이 아니다. ‘착하다’는 말도 감성언어이다. 음식에 붙일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착하니 착하지 않으니 따지는 이들이 있으면 이 한마디를 툭 던져주시라. “니나 착하세요.”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공용 음식을 차려 먹는 풍습은 유교 질서가 본격적으로 물러나는 한국전쟁 이후에 퍼졌다. 가정에서 이러는 것은 화목을 위해 좋은 일이다. 가정의 상차림에 머물렀어야 할 이 풍습이 외식 시장에서 번창하게 된 까닭은 근대적 의미의 외식 서비스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한국이 농업 사회에서 급작스럽게 산업사회로 변화할 때에 지금의 식당 상차림이 고정화하였는데, 집에서 하는 방식 그대로 음식을 낸 것이 탈이었다. 집 밥과 식당 밥은 달라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치고, 이제는 바꿀 때가 되었다.
~ by 황교익